사이펀 신작시|박몽구
빙의 외
모깃소리밖에 못 내는 타성
벗어날 수 없을 때
누군가 내주는 큰소리의 그늘에 숨는다
누군가 초점이 흐린 과녁 위에
한 사람을 세워 놓고 날리는 화살에
작은 주먹질이며 목젖 아래 꾹꾹 눌러둔
비난의 말들 함께 실어서 날릴 때
막혔던 속이 터널을 관통하듯 뚫린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와
씻을 수 없이 깊게
난자당하는 저 사람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지
아니면 한낱 제물일 뿐인지
돌아보지 않는 큰소리에
맷집 좋은 욕설도 한 바가지 싣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 놓은 틀
벗어나서 걸으면 이단이 되고
미리 만들어 놓은 항목 밖
또 다른 항목이 필요하다고
아테네로 가는 길은 한 가닥만이 아니라
여러 가닥이 있다고 반대했다가
그 길을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멱살 잡혀
어디에서나 훤히 보이는 과녁을 향해
빙의된 것도 모른 채
속마음도 헤아리지 않은 채
날아가는 돌 살의를 띤 구호들
한 사람을 생애를 갈기갈기 찢는 걸 넘어
깨끗한 새벽이 피투성이 검붉은 어둠에 눌려
떠오르지 못하는 걸 모른다
갈대 끝에 맺혀 있는 핏빛 언어를 외면한 채
남의 목소리 빌린 빙의
가눌 수 없이 몸집 불리는 봄날
봄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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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임승차
죽음보다 깊은 잠마저 깨뜨리는
까똑까똑 기계음
잠을 개키고 폰 열 때까지
파란 눈을 연방 껌벅거린다
무엇을 거머쥘 생각 없이
절벽 위에 선 집을 지키는 누이를
일년 내내 흔드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저들의 이빨로부터
빅시스터의 낡은 가죽의자를 지켜주십시오
사인북에 이름을 적어도 될까요?
작고 여린 사람이 앉은 의자를
물어뜯는 걸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화들짝 잠귀를 빼앗긴 채
다 읽지도 않고
이름 석자를 슬쩍 올린다
여리고 힘없는 빅시스터라지만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손
투표도 없이 가죽의자에 앉을 사람
한번도 거르지 않고 내려보낸다
달마다 꼬박꼬박 세금을 걷어가면서
납세자들에게 어떤 판을 만들겠다고
약속 한번 한 적이 없다
방점이 딱 찍힌 차림표 속 메뉴 말고는
다른 메뉴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빅브라더가 보이지 않게 흔드는 판은
더 이상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누구도 손 내밀어 주지 않는
이태원 억울한 혼들이
이 봄 가기 전에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진혼가를 울려야 한다고 외쳤지만
메뉴에 없다는 이유로 묵살했다
그런 살풍경을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운명을 결정하는 아고라에
한번도 모습을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불티나는 빅시스터의 출간 목록과
보이지 않는 손이 내놓은 차림표는 다르다고
아무리 큰소리로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
짐짝 같은 몸 슬쩍 검표도 없이 실은
만원 전철이 긴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누군가 입맛도 묻지 않고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사람들
쑥쑥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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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구 : 광주 출생으로 1977년 《월간 대화》로 등단하였다. 전남대 영문과,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단단한 허공』, 『5월, 눌린 기억을 펴다』. 『라이더가 그은 직선』 등의 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