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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 윤휴(1617-1680)일대기
윤휴(尹鑴, 1617~1680)의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윤갱(尹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윤호(尹虎)이고, 할아버지는 윤희손(尹喜孫)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며 부모님이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이다. 윤휴는 아버지의 근무지 경주부의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난을 피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에서 살았다. 윤휴의 집안은 선비 가문으로서, 고조할아버지 윤자관(尹子寬)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성균관 생원이었던 윤휴의 증조할아버지는 벼슬에 나가 이조참판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학문을 닦았다.
윤휴의 아버지 윤효전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인 민순(閔純)에게 학문을 배우고, 1617년(광해군 9) 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여기서 대비는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를 말한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외부에서 계비를 선택하여 인목왕후를 궁궐로 데려와 영창대군을 낳았고 적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궁 공빈 김씨가 낳은 광해군이 세자를 두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을 예고하였다.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두 개의 당파,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으로 인해 아버지 계열인 소북이 자멸하자 윤휴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윤휴의 학문
윤휴의 어린 시절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인성교육 정도가 있었을 뿐 대부분은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 13) 19세 때에 이미 10살이나 연장자이던 당대의 석학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높게 평가되었다.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3일간의 토론을 벌였는데 그 끝에 송시열이 “30년간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라고 말할 정도로 윤휴를 인정하였다. 권시(權諰)와 처남인 권준(權儁)·장충함(張沖涵)·이해(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 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자주 교유하였다.
윤휴는 배움의 초기부터 서인 계열의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 유명한 유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이 중에서도 민정중(閔鼎重)·유중(維重) 형제는 윤휴가 머물던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그의 나이 20세에 벼슬에 나갈 뜻으로 상소문 만언소(萬言疏)를 지었으나,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피난을 갔다가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과 청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맺었으며 많은 대신과 백성이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인질에 포함되었다. 이때 윤휴는 신하로서의 자신을 자책하여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 굳게 다짐하였다. 그가 다시 벼슬에 나갈 뜻을 가진 것은 윤휴가 58세가 되던 1674년(현종 15)으로,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 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이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해 대의소(大義疏)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숙종 초기 남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판서 등을 지내며 북벌론을 주장하고 호포제(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등 파격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할 때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를 해온 윤휴는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견해를 피력하게 되고 주자의 해석은 완벽하기 때문에 한 글자도 바꾸면 안된다는 송시열과 극단의 대립을 펼치게 된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공맹이 다시 살아 돌아오면 나의 견해를 인정해 줄 것이다.”
사문난적으로 몰린 윤휴가 남긴 말이다.
윤휴는 서인 송시열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1680년 죽는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은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으로,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공격하는 용어였다.
사문(斯文)은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한국에는 고려말에 사문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에 준하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매장시키는 악의적인 용어로 활용되었다.
윤휴의 무덤은 여주에 묻히었는데, 후손들이 1970대 보문산 자락 대전으로 이장하였다.
윤휴의 개화사상이 당쟁으로 조명을 못 받은바 대전의 시민활동가들이 매년 추모제를 거행하여 윤휴를 기리고 있다.
윤휴와 송시열
윤휴는 각지를 유람하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도, 윤선거, 윤원거, 윤문거, 권시 등을 만나 친분을 다지는데 특히 인조반정 공신들에게 찍혔던 송시열과 가까이 지냈다. 윤휴와 송시열 둘 다 병자호란 이후 한때 벼슬길을 기피했던 점, 학문의 경지가 깊었다는 점, 북벌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뜻이 잘 맞았고 아주 좋은 친구 사이가 됐다. 둘의 사이가 나이와 당파를 떠나서 매우 친하여 이유태 등은 마치 율곡 이이나 제갈량의 환생과도 같다고 할 정도였다. 이때는 윤휴도 서인들과 두루두루 친했다.
그러다가 둘이 원수지간이 된 것은 효종 4년(1653) 윤휴가 주자의 중용장구가 틀렸다고 다시 쓰게 되면서인데 주자에 목숨을 걸었던 송시열은 "주자의 서술에서 1자 1획을 더하고 빼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면서 아예 틀렸다고 다시 짓는 윤휴를 찾아가서 극렬히 화를 냈다. 그는 주자가 학문의 진로 개척과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학문 연구와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새로운 길을 찾고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배들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주자를 비롯한 각종 유교 경전과 고전 등에 대해 새로운 분장, 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경서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주자의 주해와 저서는 물론 다른 유교 경전에 대해서도 재해석을 했다. 또 이황, 이이 등의 이기론을 비판했는데 그는 성리학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성리학 사상만이 완벽한 진리라는 사고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한참 동안의 논쟁 끝에 윤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선포했다.
얼마 뒤 화가 풀렸는지 아님 사문난적이라고까지 한 것은 너무했는가 싶었는지 송시열은 윤휴를 다시 찾아가서 "아직도 주자의 해석이 그르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으나 윤휴는 "공은 어째서 주자만이 공자의 뜻을 알고 나는 모른다고 하는가?"하면서 완고하게 뜻을 고수했고 이후 송시열은 다시는 윤휴를 찾지 않았다.
윤휴도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파악했다는 사상, 성리학만이 사물의 진리라는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오랜 친구인 송시열 등과 절교하게 된다.
송시열(1607-1689 83세졸)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 우재(尤齋) · 문정(文正)이다. 아버지는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낸 송갑조(宋甲祚), 어머니 선산곽씨(善山郭氏)는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07년(선조 40) 외가인 충청도 옥천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주6의 사부(師傅)가 되어 『주역(周易)』과 『서경(書經)』을 가르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삼전도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물러나 은거하며 평생토록 산림(山林)으로 자처하였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북벌(北伐) 의지를 표명하자 스승 김집 및 송준길 · 이유태(李惟泰) · 권시(權諰) 등 동료들과 함께 출사하였다. 그리고 주자학의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欲)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대청복수(對淸復讎)의 당위성을 제기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렸다. 그러나 1650년(효종 1) 조정 관료들과의 갈등 및 김자점(金自點)을 비롯한 친청 세력의 견제로 고향으로 물러났다. 이후 김장생의 행장(行狀)을 찬술하고, 이이의 연보(年譜)를 교정하는 등 스승들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며 서인 도통(道統을 수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1657년(효종 8)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 아래 북벌의 선결 과제를 제시한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리고 다시 출사하였다. 1658년(효종 9) 이조판서의 직임을 맡아 공안(貢案) 개정 및 호포제(戶布制 시행 등 내수(內修)의 방도를 건의하였고, 독대(獨對)와 밀찰(密札)을 통해 효종과 더불어 북벌의 계책을 은밀히 논의하였다. 그러나 1659년(효종 10) 효종이 갑자기 죽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89년(숙종 15) 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의 원자(元子)주28 정호(定號)를 미룰 것을 청한 일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동궁을 무함하고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송대 신유학(新儒學)을 집대성한 주희에 대한 절대적 존신(尊信)에 기반하였다. 천리의 보편성과 인간의 도덕적 자각을 전제로 의리(義理)과 정통(正統)의 가치를 강조하였던 주희의 학문과 행적을 통하여, 양란 직후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혼란을 극복할 전범(典範)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물로는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 의심스럽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뽑아 해설을 덧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한 『정서분류(程書分類)』, 주희 문인들이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내용을 교감하여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송 이방자(李方子)의 『주자연보(朱子年譜)』와 명 대선(戴銑)의 『주자실기(朱子實紀)』를 통합하여 정리한 『기보통편(紀譜通編)』, 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를 합치고 보완한 『절작통편(節酌通編)』, 『논어』와 『맹자』에 대한 주희의 초기 견해를 조목별로 정리한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 등이 있다.
주희의 경서 주석을 따르지 않았던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주이라 지목하고, 윤휴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인 친구 윤선거(尹宣擧)마저 주자학의 배신자로 비난한 일은 숙종 연간 노소 분기의 중요한 원인을 이루었다.
숙종의 세 차례 환국
1680경신환국, 1689기사환국, 1694갑술환국
숙종(1661-1720 60세 졸)의 재위기간(1674-1720) 46년 집권하면서 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 등 세 차례의 환국은 남인과 서인의 권력이동을 세 차례 가져왔다. 환국이란 정치국면이 바뀐다는 뜻으로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은 다시 권력을 잡게 되어 남인의 몰락으로 남인의 거두 윤휴 사약 받다.
정국은 숙종의 왕통 계승 문제가 대두되며 남인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게 된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숙종은 이듬해인 1681년 15세의 새 신부를 계비로 들인다. 그녀가 바로 인현왕후이다. 그러나 그녀도 5년이 되도록 후사가 없자 숙종은 초초해진다.
그때 숙종에게 등장한 여인이 장희빈이다. 그리고 1688년 장희빈은 숙종이 그토록 원했던 왕자를 생산한다.
인현왕후는 서인의 실세인 민유중의 딸이고 장희빈은 남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두 여인의 갈등은 이미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희빈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기를 든 송시열의 상소는 숙종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정국운영에 방해가 되는 서인들 때문에 자신의 왕권강화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한 숙종은 1689년 다시 기사환국을 단행한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자 서인의 우두머리 송시열은 정읍에서 1689년 사약을 받는다.
결국 기사환국은 장희빈을 후원한 남인세력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실각한 서인 세력은 더 큰 아픔을 겪게 되는 데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송시열을 잃은 것이다. 송시열은 원자 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다가 사약을 받게 된다.
1694년 4월 숙종은 또 한번의 환국을 일으킨다. 그리고 권력은 다시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갔고 남인 측의 지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장희빈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숙종과 장희빈의 갈등으로 1694년 갑술환국 단행 한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해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어 궁궐 밖이 아닌 내명부 후궁으로 밀려나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한다.
장희빈(희빈 장씨)은 1701년(숙종 27년)에 궁궐 안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가 밝혀지면서 숙종의 명으로 사약을 받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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