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래의 알콩달콩 페북에서 볼수있는 글입니다.
<부모님 뵙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1922년도에, 어머니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서 1921년도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한국 나이로 올해 꼭 100세가 되는 해입니다.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6.25 전쟁과 보릿고개 등 모진 풍상을 다 겪으셨습니다.
아버지는 15세에, 어머니는 16세에 꼬마 신랑과 꼬마 신부로 부부의 연을 맺고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혼례식장에서 아버지를 처음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서 연지곤지 족두리를 쓴 혼례식장에서 염치불구하고 고개 들어 슬쩍 보니 잘 생긴 낭군이 웃고 있더랍니다....
대둔산 허리를 훠이훠이 돌아 4km를 걸어서 시집을 와 보니 보리 세발이 전 재산이었고 아버지는 소학교 4학년 이었답니다. 꼬마 신랑 도시락 싸줄 식량도 없어 새 신부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형님에게 매 맞는 것도 남몰래 훔쳐보았다고 했습니다.
1939년도 큰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세 살 먹었을 때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끌려갔습니다. 해방이 되어 남루한 옷차림에 목숨만이라도 건져 살아서 돌아온 아버지가 참 고마웠다는 어머니. 돈 한 푼 없이 돌아왔어도 살아서 돌아온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빨치산 인민군이 출몰하는 산간벽지에 산 우리 동네는 낮에는 국방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지배하는 위험천만한 곳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인민군은 총을 앞세워 밥을 지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민군에게 밥을 제공하면 아침부터 국방군이 와서 또 조사를 하고 다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리 집 앞 논배미에서 인민재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보는 앞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잔대울이라는 깊은 골짜기 처형장을 끌려갔습니다. 죽기 위해 끌려가는 아버지 심정과 죽으러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누구든지 한번 죽음의 골짜기에 끌려가면 걸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포기하고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러 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 왔어.”하시면서 마당에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어머니는 판단이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인민군에게 인민재판까지 받고 사형을 선고받고 끌려간 남편이 살아왔다면 다음날 아침 국방군에 의해 또 죽을 것이다. 총살형 직전에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은 국방군으로 하여금 인민군에게 협조하기로 약속했을 것이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어머니는 빠르게 판단했던 것.(사실여부는 지금도 모른다)
“신발 절대로 벗지 마세요.”
어머니는 자는 아들을 깨워서 솥단지 하나만 머리에 이고 한손엔 아들을, 한손에 솥단지를 부여잡고 십리길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면소재지 지서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수를 했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온 가족이 살았고 아버지는 애국심을 인정받아 민병대 대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이때 그나마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사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1939년도 첫째 아들을 낳고 1965년도에 열 번째 막내로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나 호적에는 10남매가 아닌 5남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을 낳았지만 다섯 명이 죽고 다섯 명이 살았습니다.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이 14년 차이가 납니다. 이 기간 동안 다섯을 잃으셨습니다.
첫돌이 지나서 아장아장 걸을 때쯤이면 홍역으로 죽고, 또 홍역으로 죽고 했답니다. 다섯 명의 아이가 연거푸 죽으니 그 아이들을 묻는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둘째 형님을 1953년도에 낳고 또 죽을까봐 소쿠리(광주리)에 넣어 윗목에 놓으면 산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답니다. 그 말이 통했던지 둘째 형님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다고 하여 둘째 형님은 소쿠리로 불렸고 어머니는 소쿠리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번 설에 작은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죽은 조카들을 묻으러 아버지와 산에 갔답니다. 그때 당시는 여우들이 아기들의 시신을 파먹어서 엎드려 묻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에게 삼태기에 있는 아이를 절대 땅에 내려놓지 말라며 땅을 팠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엎드려 묻으면 다음 아이가 산다는 믿음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 믿음이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아버님, 그런데 그 아기들 묘는 어디에다 썼어요?” “응 학교 뒷산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뒷산은 돌이 많고 뱀도 많아서 또 아장살이(아기 묘)가 많아서 올라가지 않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선생님이 고사리를 꺾으러 우리를 강제로 내 몰았을 때 나는 거기서 뱀도 보고 아장살이 아기 뼈도 보았습니다. 그때 아기들 뼈를 보고 놀라서 도망치곤 했는데 어쩌면 그 아기 뼈가 내 형아들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몰랐던 일을 50년이 지난 지금 소름처럼 기억이 소환되었습니다.
큰 며느리가 첫 손주를 가졌습니다. 첫 손주가 5개월 되던 그 즈음 어머니는 저를 임신했습니다. 첫째 며느리 산후조리에 마음이 분주할 때 당신도 아이를 가졌으니 마음이 심란 했을 테지요. 어머니는 굳은 결심을 하고 저를 지우러 대전에 있는 산부인과 가셨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앞서 죽은 아기들 생각이 나셨던지 발길을 돌렸습니다.
며느리 배가 남산처럼 점점 불어오고 어머니는 다심 큰 결심을 하고 뱃속에 있는 저를 데리고 다시 대전 산부인과에 가셨습니다. 이번에는 꼭 아이를 떼고 오리라.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수술대에 올라서 눕자 뱃속의 아기가 살려달라고 손짓을 하고 발길질을 그렇게 하더랍니다. 차마 못 떼고 낳은 10번째 아들이 바로 저 정청래입니다.
그 열 번째 아들은 동네에서 제법 똘똘(?)하고 귀여웠던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밤이면 어머니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마실을 왔고 나는 그 앞에서 장미화, 남진 노래를 부르며 재롱을 떨었고 공연료로 10원씩 받았습니다.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양지뜸 막내아들이 서울로 대학을 갔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그 아들은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한다며 학생을 운동을 하고 수배를 받았습니다. 경찰은 내가 총학생회실에서 숨어서 지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골집에 가서 나를 잡는다며 집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경찰에게 잘 보이면 막내 아들이 무사할까봐 파전에 막걸리를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경찰이 가고 나면 총학생회실로 전화를 해서...“막내야. 자수해라. 자수만 하면 구속은 면하게 해준단다.”며 우셨습니다. “어머니, 경찰들 믿지 마세요. 다 하는 얘기예요.”
그 후에 안기부에 끌려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4시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고문당한 것을 어머니는 모르십니다. 미 대사관저 점거농성으로 두 번째 감옥에 갔을 때 어머니는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오셨습니다. 1시간 중에 55분간을 우셨습니다.
“막내야. 밥 세끼는 꼬박꼬박 챙겨 먹어라. 나, 간다.”
이 한마디 남기시고 비척비척 보안과 앞마당을 걸어서 나간 모습이 어머니가 정상적으로 걷던 마지막 모습입니다. 감옥에 있는 저를 본 것이 충격이었던지 사흘 후에 어머니는 도라지 밭에서 쓰려지셨습니다. 2년 만기 출소하여 본 어머니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얀 백발에 눈만 또렷하시고 몸은 너무나 작아지셨습니다.
6년을 누워 계시다가 어머니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시면서 차마 눈을 못 감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병간호에 속상하셔서 술만 드시다가 10개월 먼저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머님 염을 하면서 나온 제가 드렸던 10만원 짜리 수표가 꼬깃꼬깃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2004년 내가 처음 국회의원이 되어 동네에 갔을 때 어머니 친구들이 오셔서 제 볼에 당신들의 볼을 비비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고 얘야. 니 엄마가 이 존꼴을 보고 갔어야 하는데 원통하다 원통해...” 저도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는 눈물입니다. 일제치하 태어나 온갖 설움 다 견디고 6.25 전쟁이 죽을 고비 넘기고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 아버지들...
어머니, 아버지 산소 앞에 서니 우리네 부모님들의 한 평생이 서러워 눈물이 났습니다. 한국 현대사 고비고비 굽이굽이 다 헤쳐오신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살아만 계신 다면 원이 없겠는데 시간은 자꾸 저만치 흘러만 갑니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ㅠㅠㅠ
첫댓글 효자 정청래의원님께서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담으려 찾아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항상 지켜보시고 대견해 하실것입니다.
총재님 수고하셨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