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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1830. 7. 27 |
프랑스, 7월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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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 |
영국, 노예해방 선언(8.1) 독일, 관세동맹 결성 |
리옹 폭동, 파리 폭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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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 |
모르스, 전신기 발명 |
블랑키, 사계절 병단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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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 |
영국, 차티스트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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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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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틀링, 『실존 인간과 당위적 인간』 출간 블랑키와 사계절 병단, 파리 시청 점령 (5.12) |
기해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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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
청, 아편전쟁 (~1842) 영국, 세계 최초의 우표 발행 (5.6) 아편전쟁 |
프루동, 『재산이란 무엇인가?』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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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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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위기 발생, 곡가가 지속적으로 상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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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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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2월 혁명 |
김대건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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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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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의 일부 부대가 ‘무산자화’에 대항하여 항의 시위를 일으킴 (2.22)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2.24) 6월 폭동 (6.23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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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아라 : 교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교재를 다시 정독하세요. 그런 연후에 댓글을 달도록 하세요.
수정하였습니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대한 인식이 팽배해지던 1800년대의 시대 상황 속에서 불안정한 사회를 바꾸어 보려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던 명목상의 노동자 중시나 사회변혁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시민과의 융화에 실패한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2월혁명부터 시작해서 6월폭동까지 노예제 폐지나 ‘제2공화국 선포’ 등 여러부분에 있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 바라는 것이 있다면 프랑스 농민의 압도적 보수주의와 도시와 농촌 간의 혐오감정 등이 개선되었다면 갈등이 좀 더 줄어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김창환 : 1) 2월 혁명부터 시작해서 6월 폭동까지 -> 2월혁명부터 시작해서 6월폭동까지 2) ‘제2공화국 선포’ 등 에 있어서 많이 개선된 것은 ->> 3) 도시와 농촌 간의 혐오감정 등이 좀 더 개선된 상태에서 투표했다면 갈등이 좀 더 줄어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수정하였습니다.
1840년대 사회주의의 모습은 공상적이고 2%부족해 보였던 이전의 사회주의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사회주의는 1848년의 혁명에서 노동자들의 불만 즉 인권보장, 평등, 참정권 등을 향한 욕구를 표출하는데 사상적 근본이 되어서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머물던 사회주의가 현실적인 사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장 이었습니다.
* 서휘양 : 1) 2장 4절에서 사회주의의 모습은 공상적이고 2%부족해 보였던 이전의 사회주의에 비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고 당시 파리의 하층민들은 인구증가, 농업위기, 가난으로 더더욱 살기 힘들어 지는데 반해 파리의 부유층들은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극단적인 양극화가 나타나서 더욱더 사회주의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고, 사회주의는 훨씬 더 현실에 가까워 질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
수정했습니다.
안수민 학우의 발표문을 보면서 이 세상의 두 가지 힘에 관하여 새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자주 듣는 보수, 두 번째는 진보입니다. 이는 또 다시 귀에 익은 단어로 표현하자면 기능론과 갈등론으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반대하는 세력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력 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1840년대의 프랑스는 인구 증가와 실업문제, 부유층의 과소비와 식량 및 연료폭동 등의 사회적 문제들로 혁명 발발의 전제조건들이 생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총 선거에서 기득권들의 보수적이며 반 사회주의적인 경향에 의해 사회 개혁은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실패의 의의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계급의식을 지닌 유럽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계급투표를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자신의 계급에 맞는 정당에게 유리한 표를 던집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세력이 강합니다.
* 김정섭 : 1) 총선거에서 기득권 세력들을 이루었던 성인 남자 보수적이며 반 사회주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 2) 오늘 날에도 -> 3) 유리한 한표를 던지는 것이지요. ->
수정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도 지역감정에 얽매인 투표입니다. 계급의식이 없는 사회에서 복지란 없으며 평등을 찾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바이틀링은 바뵈프의 '귀중한 평등의 원칙'을 도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바이틀링처럼 사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귀중한 평등의 원칙’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 김정섭 : 4) 바이틀링은 바뵈프의 '혁명지도자는 부자들의 억압적 국가를 압도하고 ‘귀중한 평등의 원칙’을 도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신념을 받아들였습니다. ->> 5) 모두들‘귀중한 평등의 원칙’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겼으면 ->
수정하였습니다.
근본적인 사회변혁이 필요하리라는 신념은 곧 과격한 혁명이나 권력의 장악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사회주의의 사상가들은 빈자들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폭력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가 중에서 블랑키는 혁명적 폭력 없이 선전만을 통해서 근본적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은 활동가들을 심히 경멸했습니다. 따라서 1840년대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추상적인 이론만 내세웠던 사상가들보다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 민경미 : 1) 사회주의의 사상가들을 보더래도 빈자들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폭력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
수정하였습니다.
* 민경미 : 2) 이어졌다. 사회주의의 사상가들은 빈자들의 형편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폭력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혁명적 폭력 없이 선전만을 통해서 근본적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은 활동가들을 심히 경멸했습니다. ->> * 어투가 일관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시대명사인 '그'가 지칭하는 바가 분명치 않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은 살펴보면 사회주의가 아직 하나의 이념으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과 체계성을 갖추지 못한 점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또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기대가 됩니다.
* 민경미 : 3) 그러나 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은 살펴보면서 사회주의가 아직 하나의 이념으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 즉 체계성을 갖추지 못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수정하였습니다.
2장 4절은 앞에 나왔던 초기의 사회주의자들보다 다소 개선된 사회주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2% 부족한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블랑키는 시청을 점령하였으면서도 대중의 동의를 끌어내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블랑키주의’는 대중의 지지가 없는 혁명적 소규모 폭동주의와 동의어가 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 김이환 : 1) 조금 더 개선된 ->> 다소 개선된 2) 그러나 조금 더 개선되었을 뿐이지, 아직도 2% 부족한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 그러나 여전히 2% 부족한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3) 점령했지만, 대중의 동의를 끌어내지 ->> 점령하였으면서도 대중의 동의를 끌어내진
수정하였습니다.^^
그는 정권에 대한 불만이 아주 높았던 노동계급지역에서마저도 외면당했습니다. 블랑키의 모반 실패는 단지 상징적인 건물이나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여러 시도는 실패로 끝나지만 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4)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여러 시도와 그로 말미암은 실패는 ->>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여러 시도는 실패로 끝나지만 5) 남겨주었습니다. -> 6)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사회주의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 * 蛇足(사족)입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 박종일 : 1) 이 1848년 2월 혁명의 중요한 의의는 노동시간 하루 10시간으로 단축(예 들면 am8:00-pm6:00), 보통선거 실시로 국회의원 선출 등이 있다. ->> 2) 노동자들의 조직을 ->> 노동자의 조직을
1848년 혁명은 노동계급이 노동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2월혁명이전의 운동은 수동적인 양상을 띱니다. 하지만, 2월혁명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이런 2월 혁명을 계기로 노동계급의 탄생합니다. 더불어 노동계급은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노동계급자의 요구가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이 혁명은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수인 : 1) 노동계급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개선시키려는 기대로 1848년 혁명이 일어 났습니다. ->> 2) 이전까지의 수동적인 모습이었다면 2월혁명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이런 2월 혁명을 계기로 노동계급의 탄생합니다. ->> 3) 더불어 그들이 주체성을 가지며 선거권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그동안의 요구가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성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수정하였습니다. ^^
1848년의 혁명이 비록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혁명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주의가 뿌리 내릴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불안전한 사상과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요구, 경험을 기초로 유럽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서수인 : 4) 1848년의 혁명이 비록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혁명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이제까지의 불안전한 사상과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요구 그리고 지금까지 격어 왔던 경험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기반위에서 전 유럽사회로 사회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 * less is more를 생각하세요.
수정하였습니다.^^ㅠㅠㅠ
수민 학우의 발표를 제대로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다음 발표를 기대하겠습니다.^ ^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계급 의식의 융합으로 인하여 사회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이루어집니다. 1848년에 혁명이 이루어져 부분적으로는 성과를 이루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당시 대중들은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을 하나로 묶을 체계성을 갖추지도 못했고 정돈되지 못한 이념이었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한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이념을 체계화시키고 종합시킨 마르크스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유주민 : 1) 1848년 혁명이 이루어지지만 부분적으로 성과를 이룬 점도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 2) 이러한 점을 통해서 당시 대중들이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3) 이제 사회주의의 이념을 체계화시키고 종합시킬 인물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겠지요. ->>
수정하였습니다.
2장 '최초의 사회주의자'의 마지막 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1848년의 혁명'입니다. 앞 절에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식'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계급의식이 어떻게 융합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4절이 2장의 마지막에 오게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사회주의가 드디어 ‘구체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1840년대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은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역사적인 사건이 1848년의 2월혁명입니다. 군중은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들어 붉은 깃발을
* 김수진 : 1) 2장 최초의 사회주의자의 마지막 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1848년의 혁명입니다. ->> 2장 '최초의 사회주의자'의 마지막 절,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1848년의 혁명'입니다. 2) 공상적 사회주의자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식과 사회주의의 융합을 지나 4절로 오게 되었습니다. ->> 앞 절에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19세기 초의 노동계급의식'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계급의식이 어떻게 융합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3) 이 절이 왜 2장의 마지막에 오게 되었을까요? ->> 왜 4절이 2장의 마지막에 오게 되었을까요?
* 김수진 : 3) 1840년대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사상은 추상적인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 1840년대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은 일반 노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그리고 그것이 드러난 역사적인 사건이 1848년의 2월 혁명입니다. ->> 그렇게 드러난 역사적인 사건이 1848년의 2월혁명입니다.
수정하였습니다.
흔들었고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과 ‘노동권’, ‘새로운 코뮌’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체계성을 갖추지 못했는데요, 이것은 사회주의가 지도이념으로 아직 자리잡지 못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즉 아직도 조금은 부족한 사회주의였다는 거죠. 그러나 1848년 2월의 여러 사건은 사람들이 조직적인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깨우치게 하였고 사회주의 체계화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조금씩은 미흡했던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발전의 발판을 만들어 놓고 물러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겠죠. 수민 학우! 발표, 수고하셨어요.^^
* 김수진 : 5)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직 하나의 이념으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 이것은 사회주의가 지도이념으로 아직 자리잡지 못하였음을 의미합니다. 6) 계획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 조직적인 사회주의운동에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