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흩날리는 어느 날
자신을 변화시킨 만남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만남은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믿었다. 농장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소극적이던 한 소년이 검은 여우를 만나면서 그 여우의 배경이 된 농장의 스산한 바람, 심지어 검은 들판까지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소년의 마음속에 여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똑부러지고 야무진 학생이었다. 내가 낸 의견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별론데, 그 정도밖에 생각 못 해?”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나는 소심해졌다. 그 친구는 평소대로 말했지만 내향적이던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더 좋은 생각을 떠올리다가 나는 말할 순간을 놓치고는 했다. 중학생이 되고서는 더욱 내 심장이 언제까지 머뭇거리고 쿵쾅거리고만 있을지 두려웠다.
그런 내게 수가 다가왔다. 그 아이는 비같은 아이였다. 비가 내리면 탁했던 공기가 맑아지며 상쾌해진다. 황사처럼 가라앉아있는 내게 먼저 말을 걸고 웃어주었다. 존재가 불분명했던 나는 마치 소나기가 지나간 나뭇가지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걱정이었던 발표 때도 내 편이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덜 했고, 수가 응원하는 눈으로 바라봐 주면 용기가 났다. 수는 진심으로 들어주고 격려했다. 새로울 것 없는 의견에도 “ 어머, 좋은 생각이다.”를 먼저 말하는 수, 나는 다시 초등학교 3학년 때의 해맑은 나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수는 지지와 격려뿐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만들어줬다. 나는 어렸을 때 성묘하러 갔다가 벌에 쏘인 후로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쁜 꽃 주위에는 벌레가 많고, 그것을 노리는 거미줄이며, 벌이 있어서 가까이 가지 않는다. 난 꽃이 아니라 벌이 싫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꽃과 벌, 싫어했던 두 가지를 좋아하도록 만든 것도 수다.
우리 학교에는 봄 사진 명당자리가 있다. 바로 정문계단인데 양 옆으로 벚꽃나무가 줄줄이 서 있어 꽃피는 3월이면 대성여중 학생들은 누구랄 것 없이 여왕처럼 꽃들의 에스코트를 받는다. 물론 친구들이 벚꽃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난 멀찍이 떨어져 배경으로 찍곤 했다. 그런데 수가 이끄는 손에 끌려 벚꽃 나무 아래 처음으로 섰다. 그 때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왔다. 사실 벚꽃가지와 흩날리는 꽃송이 사이에서 날아다니는 벌들을 구별해내기란 어려웠다. 원래 같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겠지만 기겁하고 도망다니는 수를 보며 나는 보호본능을 느꼈다. 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기분이랄까. 나는 언니처럼 의젓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잔뜩 웅크리고 찡그린 채 안겨있는 수의 모습은 내 핸드폰에 고이 간직되어 수시로 내 호출을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의젓하고 여유롭게 웃고 있다.
수는 그렇게 나를 변화시켰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꿔놓았다. 우리는 수 없는 만남 속에 살아간다. 나는 먼 훗날 그 친구를 잊을 수도 있다. 그 친구 또한 나를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벚꽃 피는 봄, 그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을 볼 때면 나도 친구도 봄날 어느 하루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그 시간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