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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없음) | |||||
국가: 조국 스리랑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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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 6°54′N 79°54′E | ||||
공용어 | 신할라어, 타밀어 | ||||
정부 형태 | 대통령제 마힌다 라자팍사 라트나시리 위크레마나야케 | ||||
독립 • 독립 선언 |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8년 2월 4일 | ||||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
65,610㎢ (121위) 1.3% | ||||
인구 • 2005년 어림 • 2001년 조사 • 인구 밀도 |
20,064,776명 (52위) 18,732,255명 316명/㎢ (24위) | ||||
GDP (PPP) • 전체 • 일인당 |
2005년 어림값 $867.2억 (61위) $4,300 (111위) | ||||
HDI • 2006년 조사 |
0.742 (104위) | ||||
통화 | 루피 (ISO 4217:LKR ) | ||||
시간대 • 여름 시간 |
UTC (UTC+5:30) (없음) | ||||
ISO 3166-1 | 144 | ||||
ISO 3166-1 alpha-2 | LK | ||||
ISO 3166-1 alpha-3 | LKA | ||||
인터넷 도메인 | .lk | ||||
국제 전화 | +94 | ||||
1972년까지는 "실론"이라고 불렀으며 영연방 입헌 군주제였다. |
스리랑카(싱할라어: ශ්රී ලංකා ප්රජාතාන්ත්රික සමාජවාදී ජනරජය , 타밀어: இலங்கை சனநாயக சோஷலிசக் குடியரசு 스리랑카 프라자탄트리카 사마자바디 자라나자야)는 남아시아에 있는 섬나라이며 법률상의 수도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이고, 제일 큰 도시는 콜롬보이다.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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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최초 이주자는 검은 피부에 가냘프고 왜소한 체구를 가진 유목민, 베다(Veddahs) 인이다. 전설은 다소 악의적으로, 그들을 기원전 5세기나 6세기 무렵 싱할리 인들에게 정복된 도깨비인, 야차(Yakkhas)로 기술하고 있다. 기원 전 4세기 스리랑카 전역에 걸쳐 몇 개의 싱할리 왕국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서 북부 평원에 자리잡은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가 가장 강력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안 왕조 아쇼카 황제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에 의해 전래되어 급속하게 퍼져 국교가 되었고, 강력하고 적극적인 민족주의의 구심점이 되었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기 힘들었다. 이후 1000년간에 걸쳐 남인도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관련된 각 왕조간에 반복되는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1070년 비쟈야바후(Vijayabahu)왕이 남인도의 촐라(Cholas) 왕조를 몰아내고 폴론나루와(Polonnaruwa)에 새 수도를 세웠을 때 그간 계속되었던 침략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특히 폴론나루와를 아시아에서 가장 영화로운 도시 중의 하나로 변모시켰던 파라카라마바후(Parakramabahu)왕의 통치를 전후하여 2세기 이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인도의 침입은 또 다시 시작되어 1215년 폴론나루와는 함락되고 만다.
1505년 포르투갈 인들은 콜롬보에 도착하여 매우 값비싼 향료와 계피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 1597년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 섬의 주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캔디(Kandy)에 있는 강력한 싱할리 왕국을 격퇴하지는 못했고 1658년 캔디 왕국은 네덜란드 인들의 협력을 얻어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 또한 캔디 왕국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나 영토보다는 무역과 이윤에 더 관심이 많아, 1796년 영국이 왔을 때 네덜란드는 내키지 않는 수동적 저항만을 하였을 뿐이었다. 영국은 1815년 캔디 왕국의 주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후 섬 전체를 지배하는 최초 유럽세력이 되었다. 제국의 경영은, 도로를 건설하고, 커피, 차, 계피, 야자농장(남인도에서 데려온 타밀족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는)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영어가 국어로 도입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실론)는 영연방국가로 남은 범위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최초의 정부는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사회복지를 강화하면서 강력한 경제를 유지하였지만, 80만에 달하는 타밀 농장노동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1959년 싱할리 민족주의자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Bandaranaike)가 당선되자 국회를 통해 싱할리 어를 공용어로, 또 싱할리 인들이 가장 좋은 직장과 가장 권력있는 자리를 효과적으로 얻을수 있도록 하는 '싱할리 제일주의'를 추진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다수의 싱할리족과 영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엘리트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재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타밀족을 화나게 만들어, 타밀족들은 보다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중앙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의 민족적, 종교적 이질성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부와 구직에 대한 경쟁이 심화됨으로써 더 악화되었다.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두 민족을 화해시키려고 할 즈음 한 불교승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자리는 그의 아내 시리마보(Sirimavo; 세계최초의 여성 수상)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71년, 싱할리 마오쪄뚱(毛澤東)주의자들인 JVP에 의해 섣부른 조직반란이 일어나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1년 후 스리랑카는 공화국이 되었고 스리랑카를 정식국호로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 사이,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북부 타밀족 지역에 불안이 고조되었다. 1972년 헌법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의 위치에 올려놓았고, 대학 내에서 타밀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타밀족 지구에서 사회불안이 국가 비상사태로 확대되자, 군기가 문란한, 그리고 싱할리족이 절대다수인 군과 경찰은 젊은 타밀족 청년들에게 적군으로 비춰졌고, 급기야 그들은 타밀 독립을 위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977년 주니우스 리차드 자야와데네(Junius Richard Jayewardene)가 당선되자 타밀족 지역에서는 타밀어가 '국어'로서 위치를 확보했다. 또한 그는 타밀족에게 더많은 지방정부 권력을 부여했지만 타밀 청년들과 보안군 사이의 폭력과 보복은 통제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liberation
1983년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 분리주의자들이 군경을 학살하자 싱할리 폭도들은 이틀동안 수천 명의 타밀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광란극을 벌였다. 이 일은 돌아킬 수 없는 전환점이 되었고 많은 타밀인들이 북부 타밀족 거주지로 이동하고 싱할리인들은 자프나 지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타밀족은 섬의 30%에 해당하는 북부지역과 동부해안에 대해 자치권을 요구했다. 타밀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북부에서는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동부에서는 싱할리인과 이슬람교도와 거의 같은 비율로 살고 있었다. 폭력은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혹한 '인종청소'와 같은 수준으로 쌍방간에 자행되고 있다.
1985년 말까지 5만여명의 스리랑카인들이 난민촌에 수용되어 있었고 10만명의 타밀인들이 인도의 타밀나두(Tamil Nadu) 주 수용소 캠프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관광업은 급하강하였고, 차(Tea)의 가격은 내려갔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폭력으로 인해 외국의 원조는 끊어졌다. 1987년 정부군이 타밀호랑이를 자프나반도로 밀어붙이자 남인도의 불안상태와 인도정부에 대한 국내의 압력이 스리랑카에 대한 인도의 침공 가능성을 높혔다.
쟈예와데네는 당시 인도수상 라지브 간디(Rajiv Gandhi)와, 스리랑카군이 주둔지로 철수하고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북부의 질서를 유지하며 반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하는 절충안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협정의 조건에 무관하게 남쪽에 사는 싱할리나 무슬림에게는 망신스러운 일이었고 그들은 인도가 북부지역을 차지하는 것과 동부의 비타밀인들이 팔아넘겨진 상태에 이른 것에 반기를 들었다. 한편 반군들은 싱할리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나가고, 인도평화유지군(IPKF)은 반군들을 분쇄하기 시작하면서 스리랑카는 이제 어느 누구도 명예롭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1989년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북부에서 표면적으로 통제권을 회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와 중부에서는 JVP가 주도한 연이은 파업과 정치적 암살과 같은 싱할리인의 반란이 일어났다. 정국은 당시, 라나싱헤 프레마데사(Ranasinghe Premadasa) 집권 정부가 JVP를 꾀어 정치주류로 끌어들이려 할 때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 책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레마데사는 JVP 혐의자 살해를 전문으로 하는 암살단을 풀어 그들의 시체를 강에 던졌다. 3만~6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공포시대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 때 8만명에 이르렀던 IPKF는 아무런 보답도 없는 임무를 그만두고 1990년 철수했다. 타밀호랑이는 정전에 동의하였지만 타밀분리자들이 일방적으로 독립국을 선포함과 거의 동시에 폭력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이 때부터 스리랑카 정부는 정치적 해결과 군사적 해결책 사이를 왔다갔다하였지만, 어느 쪽도 학살과 테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1991년 라지브간디는 타밀자살폭탄테러로 폭사하였고 1993년 프레마데사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1995년 초 합의된 휴전 협정은 타밀 호랑이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정부는 1995년 말 자프나 반도를 탈환하고 타밀반군과 자프나시의 타밀족들을 격퇴시킨 대규모의 군사작전으로 응답하였다. 타밀족들을 무마해보려는 정부의 시도는 상대적으로 잘 받아들여졌고, 타밀반군들은 확실히 진압당하여 스리랑카에 영구적인 평화가 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반군들은 다시 조직을 재편하여 1996년 무렵 스리랑카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정부군에 큰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으며 콜롬보에서도 테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재개된 폭력은 타밀족과의 평화노력에 반대하는 싱할리족 의견만 더 굳히게 하였다.
한편 스리랑카의 경제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빈약한 경제기반,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지출 중 거의 20%을 국방비로 쓰고 있으며, 국내경제는 해외, 주로 걸프국들에서 일하는 스리랑카인들이 매년 고국으로 송금해오는 US$15억 달러로 유지되고 있다. 분쟁의 해결과 경제성장의 회복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 통일국민당(UNP)의 보수당 정권 출범
- 국정운영을 둘러싼 수상과 대통령간 알력관계 심화로 인해 정국 불안 지속중
- 2002.3.2 A. Blalasingham LTTE 협상대표(런던 거주)는 북부 Wanni에 도착, 기자회견을 실시함.
- LTTE, "분리독립국가 건설" 요구 철회 및 "자치"에 의한 권력이양방식(Devaluation Package) 확인 - 동북부지역 Joint Task Force 설치 합의
- "동북부지역 긴급 인도적 지원 및 재건지원 소위원회(SIHRN)", "정치문제위원회", "분쟁완화 및 정상화 소위원회" 등 3개 위원회 구성 합의
- 동 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것을 구실로 4.21 LTTE측은 평화협상 참가를 당분간 정지(suspension)하고 동경 원조공여국회의에도 불참하겠다고 선언함.
- 이에 대해 5.29 스리랑카 정부측은 LTTE의 제안이 스리랑카 헌법상 위배된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대신 LTTE가 국제사회의 원조 분배과정 및 동북부 재건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절충안을 제시함 - 동 절충안의 주요내용은 최고정책결정기구(Apex Policy Making Body), 행정 또는 집행기구(Administration or Implementing Body)를 설치하고 최고정책결정기구내에는 타밀의 진정한 대표가 참가토록 하는 것임. - 한편 5.30 LTTE측은 상기 정부안이 자신들이 기제시한 임시행정기구 설치안과 너무 차이가 크며, 자신들에게 행정권 및 조직원 구성권이 없을 뿐 아니라, 타밀의 진정한 대표라는 표현에서 자신들의 대표권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거절함.
- 한편, Ranil 수상은 5.9 기조연설에서 LTTE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잠정행정기구(provisional administrative structure) 설치안을 제시하면서 협상테이블에의 복귀를 촉구하였으나 6.11 LTTE측은 Ranil 수상의 동 잠정행정기구 제안이 지난 5.29 제안한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면서 수용을 거부함.
- 그러나 금후 평화회담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협상에서 논의될 의제로서 "동북부지역의 권력분배문제", "국제원조 사용방안" 등 민감한 이슈들이 남아있는 만큼, 단시일내에 순조롭게 타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임.
이곳도 2004년 12월 29일에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큰 피해를 보았다. 그리고 해일로 인해 사망자가 속출했다. 2007년 1월 22일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나 40명이 사망했다.
인도의 남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다. 과거에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인도의 눈물'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국토의 생김새가 꼭 눈물 혹은 진주처럼 생겼는데 지리적으로도 인도의 꼬리 쪽과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국토의 면적은 6만 5610㎢로, 남한의 약 2/3 정도 된다고 한다. 정글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스리랑카의 산물은 보석과 홍차이다. 사파이어와 알렉산드라이트 등의 보석이 유명하며 홍차는 영국의 식민 시대에 스리랑카에 들어온 이후 온 나라에 널리 퍼졌다. 당시 스리랑카의 나라 이름은 아직 실론이었고, 거기에서 유래한 실론티라는 이름은 홍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 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싱할라어와 타밀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싱할라어는 스리랑카인 대다수가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이며, 타밀어은 근대 이후 영국인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본격 유입된 인도의 타밀 지방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타밀 사람들의 많은 수가 싱할라어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 문제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영국 식민 시대의 영향으로 영어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인종은 신할라인이 85%, 타밀인이 15%를 차지한다. 인종 구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원래 스리랑카에서 살아 오던 사람들은 싱할리족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인도에서 건너온 왕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인도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인도 남부에 살고 있던 타밀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어 스리랑카 민족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이 타밀 사람들의 유입은 영국의 스리랑카 식민 지배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캔디 인근의 고산지대가 홍차 재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인들이 인도의 타밀인들을 노동자로 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가 독립한 이후에도 타밀인들은 스리랑카에 남았다.
싱할리인 대부분이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비해 타밀인들은 주로 힌두교를 믿으며 인종적, 문화적인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영국 식민 시대에 유입된 타밀인들이 주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싱할리인들과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여러 차이로 인해 싱할리인들과 타밀인들 사이는 좀처럼 융합하지 못했으며 결국 폭력을 불러왔다. 1976년 결국 북부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약 30여년에 걸쳐 타밀 호랑이 조직과 스리랑카 정부 사이의 분쟁이 계속되었다. 2001년에 노르웨이의 중재로 일단 심각한 폭력적 분쟁은 사그라들었으나 2005년 현재까지도 아직 그 갈등의 불씨는 완벽하게 꺼지지 않은 상태다.
스리랑카는 소승 불교를 믿는 불교신자들이 대다수(69.1%)이며, 힌두교(15%), 이슬람교(7.6%), 기독교(6.2%) 신자도 존재한다. 스리랑카의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신앙을 갖고 있으며, 영국과 네덜란드의 영향으로 성공회와 개신교신자들도 있다.힌두교신자는 주로 인디아출신의 노동자들이다.
스리랑카는 불교문화권이기 때문에, 마을에 보리수나무등 불교의 상징물들이 있다.
스리랑카의 비극은 종족의 편협성과 종교철학의 호전적 해석에서 비롯된다. 싱할리족은 불교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타밀족은 대다수가 힌두교도이며 또 적지않은 수의 이슬람교와 기독교 버거(네덜란드식민통치자의 후손들)가 있다. 싱할리족은 싱할리어를, 타밀족은 타밀어를 쓰며 버거족은 영어를 쓰기도 한다. 이슬람교도는 섬 전역에 산재해있는데 초기 아랍이나 인도상인들의 후손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대부분 내전에 휘말리진 않았지만 동부에서 이슬람교도와 타밀간에 충돌이 있어왔다. 고원지대에 거주하는 타밀족은 차농장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영국인이 데려온 하층 카스트민이다. 그들은 스리랑카에서 1000년이상 거주해온 북부 타밀족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고원지대의 타밀족은 대체적으로 현재의 민족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해왔다.
스리랑카의 고전건축, 조각, 회화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불탑은 전원지대에 산재해 있으며, 엄청나게 큰 불교조각들은 아카나(Aukana)와 부두루바갈라(Buduruvagala)에 특히 많다.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와 폴로나루와(Polonnaruwa)는 가장 인상적인 고고학 유물지역이나 현재는, 캔디(Kandy)가 가장 번성하는 문화중심지로 되었다. 식민지시절의 유산으로는, 네덜란드 요새와 운하, 교회, 그리고 영국주택, 클럽, 법원등이 있다. 갈레(Galle)는 섬에서 가장 식민지적 요소가 짙게 남아있는 도시이다.
싱할리 춤은 인도춤과 유사하지만 곡예, 민첩함, 대사전개의 상징성에 의존함이 인도춤과 구별된다. 캔디는 '현지춤'을 보기에 좋은 지역이고, 콜롬보나 암발랑고다에서는 '악마춤'의 액막이 의식를 볼수 있다. 민속연극은, 춤, 가면극, 북치기, 액막이의식을 결합하여 생동감있게 스리랑카의 민속을 재창조하고 있다. 목각, 자수, 도기, 금속공예는 모두 고도로 발달한 수공업이며, 특히 스리랑카는 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발랑고다는 스리랑카 가면을 구경하기에 가장 좋고, 라트나푸라(Ratnapura)는 스리랑카 보석교역의 중심지이다.
카레라이스 -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매운 -가 주식이며 보통 채소와 고기, 생선반찬이 여기에 곁들여진다. 채식주의자용 탈리(thali)같은 인도카레, 비리야니(biriyani), 그리고 삶고 튀겨 햇볕에 말린 야채 콤보 쿨(kool)도 맛 볼수 있다.
호퍼스(hoppers)는 유일한 스리랑카 스낵으로, 계란이나 꿀, 요거트를 곁들여 먹는 팬케잌의 일종이다. 해안도시에는 휼륭한 생선요리가 풍성하며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싱싱한 그 지방 참치를 맛보며 행복감을 느낀다. 선택의 폭이 넓은 열대과일이 무궁무진하며, 스리랑카 차는 세계적으로 알아주지만 맥주는 먹을만한 정도.
스리랑카에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인들의 거창한 축제가 연이어 있다. 7월, 8월에 있는 캔디 에살라 페라헤라(Kandy Esala Perahera)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하고 볼만한 행사로, 10일동안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댄서, 북치는 사람, 채찍을 든 사람, 거대한 생일케잌같이 불밝힌 코끼리등을 볼 수 있다. 이 행사의 절정은 캔디의 성스러운 불치(佛齒)를 공양하는 장중한 행렬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축제는, 부다의 스리랑카 방문을 경축하는 두루투 페라헤라(1월)로 콜롬보에서 열린다. 이 외, 퍼레이드와 춤, 민속경기를 볼 수 있는 국경일(2월), 코끼리경주, 야자게임, 베개싸움으로 거행되는 신년(3월/4월), 부다의 탄생, 열반, 성도를 기념하는 성스러운 정월축제 베사크(5월), 전쟁의 신 스칸다(Skanda)의 의식용 전차가 두 사원간에 당겨지는 콜롬보의 벨(Vel)축제(7월/8월), 주로 힌두교신자들이 갖가지 자기학대 의식을 행하는 카타라가마의 카타라가마축제(7월/8월)등이 있다.
스리랑카는 사회 민주주의 대통령은 6년 임기로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 수반일 뿐 아니라 국가의 수반이며 군통수권자이다. 의무로서, 대통령은 225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 대해 책임진다. 대통령은 의원들 가운데 지명하여 선택된 장관들로 내각을 구성 수반이 된다. 수상은 대통령의 대리자로 의회에서 여권을 이끌며 주로 국내 사안들에서 많은 행정 책임들을 나누어 짊어진다.
의회 의원들은 6년 임기로 지역구별 수정 비례 대표제에 기반한 보통(성인) 선거로 선출된다. 수정 사항이란 각 선거구마다 최다 득표 정당이 단 하나의 "보너스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의회 회기를 시작, 유보, 종결지을 수 있으며 의회 시작 후 1년이 지나면 의회를 해산시킬 수도 있다. 의회는 모든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1960년 7월 1일 스리랑카 국민은 최초의 여성 수상으로 스리마보 반다라다이케를 뽑았다. 그녀의 딸 챤드리카 카마라퉁가는 여러 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으며,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현재 대통령은 마힌다 라자팍세로 2005년 11월 21일 임기를 시작했고 같은 날 라트나시리 비크레마나야케 또한 수상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대법원은 대통령 라자팍세가 이끄는 좌파인 SLFP(Sri Lanka Freedom Party)와 전 수상 라닐 비크레머싱허가 이끄는 상대적으로 우파인 UNP(United National Party)의 경쟁 정당간 연합으로 통제되고 있다. 또한 이보다는 작은 정당들로는 불교, 사회주의, 무슬림 정당들과 LTTE의 분리주의에 반대하지만 타밀의 자치권과 증진된 시민권을 요구하는 TNA(Tamil nationalist alliance)가 있다. 1948년 이후, 스리랑카는 영연방과 UN의 일원이었다. 또한, 비동맹 세력, 콜롬보 플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와 남아시아 지역협력기구의 일원이다. 냉전 기간, 스리랑카는 비동맹 외교 정책을 추구했지만 미국과 서유럽과 가깝게 지냈다. 스리랑카 군대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국방장관이 관리한다. 1980년대 이후, 군대는 JVP의 마르크스주의 전사들과 현재 LTTE 군사력에 맞서는 정부를 주도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인도, 미국, 그리고 유럽 나라들에서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받고 있다.
9개 주와 25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각 주는 직접 선출된 주 지사가 관리한다.
현재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직과 무려 104개의 장관직 가운데 5개 장관직을 겸임하고 있으며 정부 총지출액의 60%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 족벌주의와 부정부패, 뇌물, 남용들은 어쩌면 2004년 급격한 역전 이후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는 LTTE와 말뿐인 휴전 속에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거의 전면전을 치르고 있다. 타밀의 54%가 북쪽 자프나 반도 쪽에 모여 살고 있고 나머지는 남쪽에 대부분 모여 살고 있다. 타밀의 독립국 건설을 목표로 1983년부터 무장투쟁에 돌입한 LTTE는 그 후 정부군과 계속된 전투로 양측이 모두 지금까지 63000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2002년 휴정협정 이후 잠시 평화로왔으나 2004년 이후 산발적이던 갈등이 심해져서 2005년 1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15개월 동안 4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현 스리랑카 정부는 LTTE와 오랜 내전을 치르면서 군대가 주도하는 강력한 비상체제를 확립하고 있다. 2007년 1월 국회에서 통과된 비상 조치법에 따라 타밀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며칠 몇주 몇달씩 LTTE로 의심되는 또는 협력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조건 억류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상황 또한 합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으며, 예를 들면, 타밀 사업자들을 납치한 뒤 몸값을 받고 나서 스리랑카를 떠나라는 협박을 한다고 한다.
19, 20 세기에, 스리랑카는, 아직도 국가를 대표하는 수출품인, 시나몬(계피나무), 고무, 실론티의 생산과 수출로 유명한 플랜테이션 경제가 되었다. 영국 통치 아래 근대 항구들의 발달은 무역의 중심으로서 섬의 중요성을 높였다. 2차 대전 동안, 섬에는 군사시설들이 설치되고 연합군들이 머물렀다. 한편, 플랜테이션 경제는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1948년에서 1977년까지 사회주의는 정부 경제 정책들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식민지 농장들은 해체되고, 산업들은 국유화되고 복지국가체제를 확립했다. 국민들의 생활 수준과 읽고 쓰는 능력은 현저하게 개선되었지만, 국가 경제는 비능률과 저성장 그리고 외국투자의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1977년부터 UNP 정부는 사유화 작업과 규제철폐, 사기업 장려를 시작했다. 차, 고무, 커피, 설탕 그리고 다른 농산품의 생산과 수출 아직도 중요하지만, 농산물 가공, 직물, 전신과 금융이 발달한 산업화된 경제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다. 1996년 플랜테이션 작물이 수출의 20%를 차지했지만 (1973년에는 93%였다) 점차 감소해 2005년 16.7%에 이르른 반면, 직물과 의류는 63%에 이르렀다. 1990년대 초반 GDP는 1996년 가뭄과 치안 상태의 악화로 3.8%로 떨어지기 전까지 연평균 5.5%로 성장했다. 1997-2000에서 평균 5.3%로 회복되었다. 2001년에는, 전력 부족, 예산 문제, 세계적 경기 하강, 그리고 계속되는 내전으로 역사상 최초로 위축되었다. 회복의 신호는 2002년 휴전 후에 나타났다. 콜롬보 주식 거래는 2003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을 보였다.
2004년 4월, 자유인민연합동맹(United People's Freedom AllianceAlliance)이라 불리는 좌파 민족주의 정당인 JVP(Janatha Vimukthi Peramuna)와 SLFP의 연립으로 UNP의 라닐 비크레머싱허가 이끄는 정부가 패배하면서 경제 정책은 급격히 역전되었다. 신정부는 국영기업의 사유화를 중지하고 전력과 석유와 같은 공익 사업들을 개혁하고, 라타 페르타 경제 프로그램이라 불린 보조금 지급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의 주목적은 농촌과 교외의 중소기업들(SMEs)을 지원, 오일 가격, 세계 은행과 IMF와 같은 외부 영향들로부터 국내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연료, 비료 그리고 밀과 같은 수입 물품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러한 정책은 바로 국고를 푸는 일이다. 2004년에만 스리랑카는 약 1억 8천만 달러를 연료 가격 안정 공약에 따라 사용했다. 보조금 지급과 공공부문 채용확대로 발생한 팽창된 예산 적자를 조달하기 위해, 정부는 결국 650억 루피(6억 5천만 달러), GDP의 약 3%를 찍어냈다. 느슨한 통화 정책과 짝을 이룬 재정 팽창 정책은 결국 2005년 1월까지 18%의 인플레이션을 야기시켰다. 이것은 스리랑카 소비자 가격 지수에 따른 수치다. 2007년 1월에도 콜롬보 인덱스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20.5%, 1월까지 1년 평균 인플레이션은 14.8%였다. 2007년 2월 23일,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12%로 올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 예를 들면, 플랜테이션 차 노동자들의 경우, 2006년 말 임금협상에서 하루 260루피로 인상협상을 마무리했지만, 이마저도 20여일 이상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를 포함한 하루 임금이고 노동일수가 그 이하일 경우, 비가 자주 오면 모든 노동자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그 경우, 통상 190루피 정도이다. 이는 하루 약 2달러로 한 가구가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도시 노동자 하루 평균 수입은 500루피(4.6달러), 2002년 평균 임금은 한달 14000루피(145달러)였다.
2006년 기준으로 휘발유는 리터당 90루피(2007,1월 95루피)다. 스리랑카는 아직 광회선이 연결되지 않은 까닭에 싱가포르와 전화선으로 인터넷망에 연결되는데 스리랑카 텔레콤이 독점하는 ADSL home Express(다운로드 540Kbit)는 한달 사용 요금이 2500루피, ADSL Office Express의 경우(다운로드 속도는 2Mbit) 한달 사용 요금이 6700루피이다(여기에 15% 세금이 덧붙는다).
스리랑카의 2007년 국방비 지출액은 약 139.66 million 루피, 미화로 약 14억 달러로 2006년에 비해 46% 증가한 액수이며 정부 총 수입의 23.28%, 정부 총 지출의 16.72%에 이른다. 그리고 이 액수는 GDP(국내총생산)의 4.3%로 미국의 3.7%, 중화인민공화국의 3.9%보다 높으며, GDP 대비 비율로는 세계 30위권에 속한다. 1인당 국방비 지출액은 파키스탄(약 $30.62)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71.19이다. 그리고 병사 수 또한 124명당 1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586명 당 1명), 파키스탄(244명 당 1명), 미국(213명 당 1명)에 비해 그 비율이 매우 높다.
2007년 2월 현재, LTTE에 대한 제거를 목표로 삼았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 또한 같은 목표로 군사적 공세를 강화해 동부 지역을 점령 확보하고 북쪽으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LTTE의 대응은 정부 주요 인사에 대한 테러, 외국인이 주로 찾는 여행지 버스에 대한 자살폭탄테러, 수도 콜롬보 항에 대한 공격 시도 등 상징적이고 실효적, 시의적절하게 자행되는 테러이다. 결과적으로 갈등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오히려 스리랑카 정부가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LTTE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타밀족들로부터 매년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아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비난받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돈으로 10만원에서 25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인도 타밀나두 주 불가촉 천민들 가족에게서 여자 아이들을 사서 훈련시켜 자살폭탄 테러에 투입하는 일이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자금 모집 과정에서 폭력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들린다. LTTE에서 이탈해서 정부 측에서 LTTE와 싸우는 Kruna 그룹의 소년병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어린이 납치유괴를 정부 측이 눈감았다는 국제 기구의 조사 또한 진행되고 있다. LTTE의 인권침해는 상대적 약자인 저항적 투쟁체들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LTTE는 자신들의 지역에서 사실상 하나의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다. 세금을 걷고 정부 조직에 준하는 조직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LTTE에 대한 온정적 태도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테러에 대응한 정부의 조치들은 통행하는 모든 차량과 사람들에 대한 엄격한 검문과 LTTE로 의심되는 타밀인에 대한 억류 등등이 행해진다. 수도 콜롬보의 경우 20-30m마다 한두 명씩 군인들과 보안요원들이 수시로 검문검색을 행한다.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여권이 없으면 경찰서까지 가야한다고 한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납치, 살해, 실종, 유괴, 등등은 인종간 갈등을 너머 사적 이득을 챙기는 일로 야기되는 경우들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인권침해와 폭력이 증가 일로에 있지만,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 비판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해야할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
양측간의 갈등 해결의 출발은 정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그것은 평화적 문제 해결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모아내겠다는 의지에서 체결한 UNP와 MOU에 대해 스리랑카 지식인들은 최선의 해결책으로 보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북아일랜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하는 집단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들의 자치권을 최대한 부여하고 양측의 평화적 세력이 협력 공존을 증진시킬 때 무장투쟁 집단 또한 그 흐름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과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을 위해 현정부와 야당인 UNP 사이 체결된 MOU는 현 대통령의 탈당한 20명의 UNP 의원들에 각기 장관직을 부여함으로써 2007년 2월 현재 휴지가 된 상황이다.
2009년 5월 17일에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LTTE가 결국 패배를 시인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서, 1983년에 시작되어 26년간 이어져온 내전이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1]
2005년 현재 많은 스리랑카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상당한 수의 한국인들 역시 스리랑카에서 살며 일하고 있다. 수도인 콜롬보에 한국 대사관과 KOICA 사무소가 있다. 한국과는 1977년에 수교하였으며 1972년 통상대표부가 설치되었다가 1977년 한국 - 스리랑카 수교와 함께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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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부 영토가 유럽에도 속함. 2.지리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역사적, 문화적 이유로 종종 유럽으로 분류. 3.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일부 영토가 아시아에 속함. 4.오세아니아에 속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음. 5.중동 지역 이슬람 국가들의 조약 또는 합의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지역. 6.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 7. 나라 목록 245개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나라.8. 영국령 인도양 지역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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