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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2일 주일
[(녹) 연중 제8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입니다. 만물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아버지의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의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을 찾도록 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초대를 전해 준다. 목마른 이들을 물가로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돈이 없는 이들도 술과 젖을 살 수 있으며,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은 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자애로이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을 고백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군중을 보시고 가여운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록 사랑을 베푸셨다(복음).
제1독서
<와서 먹어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2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5.37-39
형제 여러분,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7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을 챙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까닭은 아직 배불리 먹지 못한,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이들까지 모아들이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를 당신 안으로 불러 모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 성경에서 ‘열둘’이라는 숫자는 완전함, 전체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곧 인류 전체를 불러 모으시는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혼자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제자들이 내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많은 이의 풍요로움으로 바뀝니다.
미사 때에도 이 모습은 되풀이됩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소소한 것들이 미사에서 한데 모여 빵과 포도주로서 바쳐지고,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이라는 빵을 내주십니다. 이 빵은 나만을 위한 빵이 아닙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제자들이 내어놓았듯이 우리도 내어놓는 일을 이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봉헌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재능 기부가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는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 같이 풍요로워지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드리는 나의 정성이 다른 이들에게도 향하면 좋겠습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자신의 부족함을 일상적으로 고백하는 사제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공생활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인품, 능력에 매료된 수많은 군중이 식음조차 잊은 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그분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의 장소는 예루살렘이나 카파르나움이 아니었습니다. ‘외딴곳’이었습니다. 한적한 장소, 즉 광야를 떠오르게 합니다. 시야가 확 트인 광활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설교 장소에는 여인들이 곱절은 많습니다. 거기다 따라온 아이들까지, 줄잡아 2만 명 남짓 되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입니다.
그 광경이 마치 출애굽 여정의 모세와 백성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2의 모세로 등장하셔서 광야에 모인 군중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빵을 나눠주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백성들은 그 은혜로운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동반하시고, 양육하시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위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이 동작은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아버지와 내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유다인들은 매 식사 전에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가장들은 기도를 드릴 때, 시선이 손에 들려 있는 빵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감사 기도를 마치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후,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 한적한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의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십니다. 함께 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고, 서빙도 없는 초라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룩한 식사, 하느님 백성과 메시아가 함께 하는 놀라운 식사였습니다.
저는 요즘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정성과 사랑이 잔뜩 들어간 한 끼 식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한 상에 쌓인 피로와 상처, 외로움과 슬픔이 말끔히 치유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위해 친히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 식탁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풍요롭습니다. 비록 소박한 식사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은총의 식사입니다. 오늘 우리의 식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 자세 하나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바처럼, 주님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께 간절히 청할 때, 절대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들은 우리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강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힘만 믿는 사도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은총과 기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임을 파악한 사제들, 주님의 권능을 굳게 믿는 사목자들, 나는 그저 나약한 한 피조물이요, 중재자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겸손한 봉사자의 삶에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이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었습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이 지난 3년 동안의 사목 현황을 보고하였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평균 4명에서 7명으로 많이 늘었다고 했습니다. 세례도 3년 동안 5명이나 받았다고 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큰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보면 그곳에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고타 선교센터는 주일 미사만 봉헌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본당의 미사를 도와주고, 남미에서 사목하는 선교 사제들의 쉼터가 되고,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열린 집이 되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서울 대교구의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와 연계해서 남미의 어려운 교구를 돕는 일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에 30,000불씩, 벌써 6번이나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서는 사목 현황 보고를 들으신 후에 앞으로도 선교센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센터는 남미의 어려운 교구를 돕는 거점이 될 수 있고, 선교 사제들의 쉼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공동체였지만, 그 안에는 복음의 큰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작아 보였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적성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본당 신자 중에서 화재로 집이 전소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본당의 공소회장도 했었고, 가족 모두가 성당의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했었습니다. 마침, 성당에 비어 있는 숙소가 있었습니다. 본당 교우들은 집을 새로 지을 때까지 그 가족이 성당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제게 청하였습니다. 저는 신자들의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4개월 동안 본당의 빈 숙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성당 숙소에 머무는 동안 관리인처럼 성당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나중에 집을 새로 지어 입주한 후에는 감사헌금도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단순히 숙소를 빌려준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에게 공동체가 마음을 열어 준 일이었습니다. 성당의 빈방 하나가 한 가정에는 위로가 되었고, 공동체에는 복음의 실천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당황하며 말합니다. “저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오천 명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많이 가진 뒤에 나누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먼저 내어놓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셨지만, 그 시작은 제자들이 가진 작은 것을 내어놓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기적이 아니라, 작은 나눔이 주님의 손에 들렸을 때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없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보십니다. 작은 시간, 작은 정성, 작은 친절, 작은 기도, 작은 봉헌을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그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이 됩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의 작은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성당의 빈 숙소를 내어준 적성 본당의 교우들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숫자와 큰 능력만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 작은 나눔, 작은 사랑을 통해서도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이 마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중풍 병자가 치유되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과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가상현실도 아니고, 증강현실도 아니며, 혼합현실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믿고 따를 때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작은 것을 기꺼이 나눌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때, 하느님 나라는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 바오로 사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고난, 감옥과 매질,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현실로 체험한 사람의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은 부담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적의 동반자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모두 바꾸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주님께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 작은 나눔, 작은 친절, 작은 용서, 작은 봉헌이 주님의 손에 들릴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보고타 선교센터의 작은 공동체처럼, 적성 본당 교우들의 따뜻한 배려처럼, 오늘 복음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작은 것을 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작은 것을 축복하시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내어놓고, 이웃과 나누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밥이 밥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내가
먹이는
나의
벗이여
내가
밥이듯
그대가
밥이니
내가
먹이듯
그대가
먹이게나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er Faber)
활동년도 : 1506–1546년
신분 : 신부
지역 :
같은 이름 : 베드루스, 파버, 파베르, 페드로, 페이버,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파브르 사제 교황 프란치스코는 지난해 12월 17일, 성 이냐시오의 첫 번째 동지였던 복자 베드로 파브르를 성인품에 올렸다.
베드로 파브르는 1506년 4월 13일 사부아 지방의 촌락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적에는 양치기를 하였는데 1516년에 시골의 본당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머리가 총명하여 금방 기초 과정을 마치고 다음 해에는 라 로쉬에 있는 학교로 전학하여, 1525년에 명문 파리대학에 입학하기까지 거기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파리의 기숙사에서 평생 동지이자 예수회의 공동 창립자가 되는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만났다. 파브르는 15세 연상이었던 이냐시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개인 교수하였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이냐시오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게 되었다. 마음의 갈등과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번민하던 파브르는 이냐시오의 지도를 받으면서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굳히게 된다.
파브르는 1534년 5월 30일, 사제서품을 받기 한 달 전에 이냐시오로부터 영신수련을 받았다. 1534년은 이냐시오와 6명의 동지들이 파리 몽마르트의 성당에서 개인적인 서원을 한 해이기도 한데(8월 15일) 그때 파브르는 사제로서 동지들을 위해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 서원의 하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일생을 봉헌한다는 것이었다.
1536년 이냐시오는 자신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스페인으로 잠시 귀국하게 되는데, 그때 자신을 대신해서 파브르에게 동지들을 통솔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들은 다음 해 1월에 베니스에서 이냐시오와 재회하였다. 다시 모인 동지들은 성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교황의 특별한 축복을 받기 위해 파브르를 대표로 로마에 파견하였다. 교황은 축복을 하면서 터키인들의 방해가 심해 예루살렘까지 도착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예고를 하였다. 결국 교황의 예고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자 그들은 예루살렘 대신에 로마로 향하였다. 교황의 원의에 자신들을 온전히 복종시키기 위해서였다.
로마에서 파브르는 사피엔치아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539년에는 라이네스 신부와 함께 파르마로 파견되어 사제들의 양성에 힘썼다. 1540년 여름에는 독일의 보름스에서 개최되고 있던 종교회의에 파견되었다. 루터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보름스에서 파브르는 설교와 토론 등을 통해 가톨릭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또한 보름스의 주교, 사제, 왕족들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하여 그들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루터파와의 종교회의가 결렬되자 파브르는 스페인으로 가서 새로 창설된 예수회의 설립기반을 다졌다. 1542년에는 독일의 스파이어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 참가하여 가톨릭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그 지역의 성직자들이나 귀족들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하였다. 베드로 카니시오가 파브르로부터 영신수련을 받은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1544년 7월, 파브르는 죠안 3세의 요청을 받고 포르투갈로 파견되었다. 1546년 봄에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학 고문으로써 트리엔트로 파견받았다. 도중에 로마에 들러 7년 만에 이냐시오와 재회하였다. 그런데 로마에서 지병이던 열병이 도져 8월 1일 그곳에서 선종하였으니 그의 나이 40세였다. 파브르의 유해는 길 위의 성모 성당(현 제수 성당)에 안장되었다.
1872년 9월 5일 교황 비오 9세는 그의 고향인 사부아에서 파브르를 복자품에 올렸다. 그리고 2013년 12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회 총장인 니콜라스 신부는 성 파브르를 ‘조용한 성자’로 칭송하였다. 또한 성 이냐시오는 파브르를 칭하여 ‘자신보다 영신수련을 더 잘 지도할 수 있는 영적지도자’라고 칭송하였다. 기념일은 8월 2일.
[이냐시오의 벗들, 2014년 2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일본 상지대학교 교수)]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Saint Peter Julian Eymard)
활동년도 : 1811-1868년
신분 : 신부,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베드루스, 에마르, 율리아노, 율리아누스, 줄리앙,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율리아누스 예마르(Petrus Julianus Eymard)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의 라 뮈르 디제르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칼 장수였으므로 18세 때까지 부친의 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라틴어를 배웠기에 1831년에 그르노블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4년 7월 20일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동안 샤트와 몽테나르 본당 사목자로 일하던 중 마리스타가 되기 위하여 주교의 허락을 청하였다.
1839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은 후 그는 벨리 소신학교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는 리옹(Lyon) 수도원의 관구장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주님의 성체 축일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나의 영혼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나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분의 현존을 전하겠습니다.”
1851년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노트르담 드 푸르비에르를 순례한 후 ‘성체 사제회’ 설립을 구체화시켰다.
1856년 마리스타 총장의 승인을 받은 그는 12일 동안이나 파리(Paris)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1857년 1월 6일 이 위대한 수도회가 빛을 보게 되었다.
1858년 그는 또 ‘성체 시녀회’를 설립하였고, 1895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Maria Vianney, 8월 4일) 신부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성인이었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2년 12월 9일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사제의 글에서(La Presence reelle, vol. I, Paris, 1950, pp. 270-271 et 307-308)
성체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성체는 온 인류의 생명입니다.
성체는 바로 생명의 원리입니다. 모든 이는 어떤 국적이든 언어든 아무런 장애 없이 교회가 거행하는 거룩한 축제에 함께 모일 수 있습니다.
성체는 그들에게 생명의 법, 곧 사랑의 법을 줍니다.
성체 성사는 사랑의 샘입니다. 이러한 이유와 방식으로 성체는 그들을 공동 유대로 묶어 주고 그리스도인의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줍니다.
모두 같은 빵을 먹습니다. 초자연적으로 서로 화목한 형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유다인들이 개종하고 이교인들이 세례를 받아, 여러 지역에서 모여 온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한마음 한뜻을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듣고 빵을 떼어 나누는 데에 전념하였던 것입니다.
태양이 우리 육신과 지구의 생명인 것처럼, 참으로 성체는 영혼의 생명이며 인간 사회의 생명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땅은 황무지가 됩니다. 태양이 땅을 기름지고 풍요롭게 하며 아름답게 가꿉니다.
태양이 육신에게 생기와 힘과 아름다움을 줍니다.
이 경이로운 일 앞에서 이교인들이 태양을 세상의 신으로 경배하였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낮의 태양도 진정한 태양, 곧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을 비추시고, 성체를 통하여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생명의 성사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가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참으로 복되고도 복된 신자는 숨겨진 이 보물을 발견하여, 생명의 샘에서 목마름을 풀고, 자주 이 생명의 빵을 먹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가족입니다.
그 가족을 묶어 주는 끈은 성체이신 예수님입니다.
가족의 식탁을 마련해 주는 이는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는 만찬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성애와 함께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을 자식처럼 곧 ‘내 아이들’이라 부르시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거룩한 식탁에 앉는 모든 이는 같은 음식을 먹는 아이들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여기에서 그들이 가족을 이루고 같은 몸을 이룬다고 단언합니다.
모든 이가 나누는 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성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존경과 사랑의 법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는 힘을 나누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형제들에게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형제들이 되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거룩한 영성체를 통하여 당신을 내어 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