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19대 국회의원(철원 화천 양구 인제)을 역임했으며
육군 5군단장을 역임한 한기호 의원의 글입니다.
故 이현부장군 20주기 추도식
오늘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에 모인 전우가 51명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추모식에 한 오십명 모였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군인이 20년전에 헬기 사고로 순직하셨는데 사단장 재직시 함께 근무한 부하들이 머리가 허옇게 늙었고, 이미 대부분 조문을 떠나서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이렇게 모였다는 것은 절대로 흔한 일이 아니며 아마도 근래에는 없었던 일일 것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도 정말 다양하다. 1988년도에 부사단장을 하시던 서태석, 이성근 선배님이 두분 다 참석하셨고 참모장을 하던 김선홍 선배와 여단장을 했던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참석했고, 인사, 정보, 25전 참모, 보좌관들이 참석했으며 당시의 법무참모도 20년동안 변함없이 참석하는 의리의 사나이다.
사단장 공관과 사무실에 근무하던 병사들은 지금도 행사 때 마다 조화 화환을 준비해서 참석하고 있다. 무슨 이유 때문에 병사로부터 장관까지 돌아가신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 추모식이 이어지는지 한번쯤 짚어볼 때가 되었다.
우선 군인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전우(부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좀 다른 정도가 아니라 특이하게 다르다. 대대장(203차량화 보병대대)시절 부하병사가 사단 보급부대에 보급품을 수령하러 갔다가 일을 마치고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현리에 있는 책방에 책을 사러 갔다.
보급부대에서 수령한 보급품이 염화칼륨과 다른 화학품이였는데 책방의 모퉁이에다 놓고 책을 고르는 사이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불이 나고 책방이 완전히 다 타버렸다. 다행이 인명손실은 없었다. 화재로 발생한 손해액이 400여만원 이었는데, 이 병사는 이 돈을 감당할 만한 경제력이 없는 병사였다. 대대장을 하던 이현부 중령은 “그 병사가 방화도 아니고 실화도 아닌데 손해 변상을 못하면 전과자가 된다”며 심히 고민을 하다가 대대장이 사재를 털어서 변상을 했다.
당시가 70년대 중반이니까 대대장 월급이 20만원이 채 되지 않을 때인데 400만원을 대대장이 마련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현부 장군은 그 구분이 되지 않는 분이었다. 공을 위해서 사(私)는 존재하지 않았다.
20년 전인 1992년 2월 14일 09:50 돌아가시고 그 다음날 신문의 기사들을 다시 한 번 찾아봤다.
야전(野戰)서만 32년...“청렴 강직 사령관” 인맥(人脈) “파벌 애써 외면..깔끔한 처신” 순수 무욕(無慾)의 완벽했던 군인(軍人) - 서울 신문 -
야전(野戰)서 일생보낸 참군인 군단장 첫월급 꽃동네 헌금 불이이웃도와 - 조선 일보 -
순수 군인(軍人)외길...기동작전 대가(大家) 육사 20기 선두주자.. 생도 땐 대표 화랑 공사(公私)분별 대쪽 성품(性品) 부하엔 온화한 덕장(德將) - 국민 일보 -
정치색 없는 순수 군인(軍人) 비 하나회..기계화부대 작전통 대표화랑지낸 육사 20기 선두 - 동아 일보 -
기사를 제공한 부대의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고 순직한 장군에 대한 예의도 있겠지만 지금 읽어도 조금도 거부감이 없이 “맞아! 우리 사단장님은 그런분이야”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셨다 평시에 참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본인의 시신을 수기사 부대안에 묻어 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의 묘비는 이은상의 「조국강산」을 새겨달라고 하셨다. 원하셨던 대로 묘비에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의 더운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강산을 노래부르자”라고 새겨 놓았다. 이렇게 평상시에 자주 이야기한 것을 되돌아보면 “일찍 가시려고 하신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으로 「참군인」이라고 모든 언론에서 보도 했듯이 오직 군인으로서 가야할 정도만을 걸었으며, 곁눈한번 돌린적도 없으시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기 위해서 써 놓으신 지휘관(指揮官)의 신조(信條)를 보면 1. 부당(不當)한 지휘관(指揮官)이 있을 뿐 불량(不良)한 부대는 없다. 2. 지휘관(指揮官)이 좋아지면 군생활(軍生活)도 좋아지고, 지휘관(指揮官)이 싫어지면 군생활(軍生活)도 싫어진다. 3. 부하(部下)는 승리(勝利)하는 지휘관(指揮官)을 신뢰(信賴)한다. 4. 용장(勇將)밑에 용병(勇兵)있다. 5. 부대(部隊)는 지휘관(指揮官)의 「거울」이다. 부대 지휘 목표 : 일 기 당 천 (一騎當千)
이렇게 당신의 수첩 첫장에 써 놓고 실천하여 왔으니 부대에 대한 정성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부하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부대에 대한 사랑.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냉혹하리 만큼 엄격했던 모습을 가슴에 담고 있기에 돌아가신지 20년이 지나도 모여서 옛 모습을 그리워하며 오늘의 자신들을 돌아본다.
사단장때의 전속부관이던 노태룡 중위는 이제 대령이 되었고, 금년에는 장군심사에 대상이 되었으니 20년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軍이 국민으로 사랑 받으려면 국민의 자제로 이루어진 부대의 구성원인 부하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여야 하며 그 사랑이 무한 할 때 국민들은 군에 신뢰를 보내고 군을 사랑한다. 또한 부하를 거느린 간부는 높은 도덕심을 갖고 이를 실천하여야 한다. 어떠한 경우도 허위로 사실을 왜곡했을 때는 다른 행위들 마저도 의심받게 된다.
일례로 군에서는 장군들의 일탈 행위가 크든 작든 자주 언론에 보도되는데 장군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신에서 사회의 흔히 일어나는 일마저도 용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가족(부인, 자녀)들도 구설수에 올라서는 안된다. 이현부 장군님은 사단장시절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 않고 주말이면 부인과 딸이 찾아왔는데 철저하게 부하의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외식을 하러 출타를 해도 손수 개인의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여 허름한 시골 식당을 찾으셨다. 그러다보니 20년이 흐른 지금도 사모님을 접촉하고 있는 부하의 가족이 없으며 외롭게 사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남편의 그 아내로 장례식때 각지에서 보내온 조의금도 모두 함께 순직한 부하의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한푼도 가져가지 않으셨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가혹하리 만큼 가정에 소홀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고인의 뜻이라는 사모님의 간곡한 의지에 의해서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부하들에게 돌린 것은 우리 군인가족들도 마음에 새겨야할 귀감이다.
이현부장군의 딸도 미국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풍문과 이제는 혼자를 치룰 나이가 되었다는 부하들의 염려가 올해는 더 많이 입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20년이 지나서 모두들 백발이 된 부하들 앞에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데 함께 자리를 같이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오찬을 하면서 이런저런 자신들의 근황과 전우들의 안부를 묻고 함께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년에는 나오도록 연락하자며 악수들을 나누고 헤어지는 모습들이 우리는 전우였었던 인연이 아직도 식지 않았음을 역설하고 있다. 내년에는 올해 함께하지 못한 전우들이 모두 나와서 사모님을 모시고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잔설이 남은 현충원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생활터전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1992년 2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경북 선산군 장천면 상림리 산동산(해발 450m) 중턱에 육군 3183부대 204 항공대 소속 UH1H 헬리콥터 1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사고 헬리콥터는 꼬리쪽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가면서 산동산 8부 능선 250m 지점에 추락했죠. 이 헬리콥터에는 부대 순시를 위해 경기도의 군단사령부를 떠나 포항으로 향하던 육군 제 7군단장 이현부 중장과 군단참모들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이현부 (50) 중장을 비롯하여 작전참모 허정봉 (49) 대령, 군수참모 이원일 (39) 대령, 감찰참모 노영건 (40) 중령, 비서실장 한광진 (32) 소령, 부관 서상권 (25) 중위, 헬리콥터 승무원 조규성 (22) 상병 등 7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조종사 이지성(35) 대위를 비롯한 3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고순간을 지켜본 목격자들은 “북쪽에서 날아오던 헬기가 비틀거리면서 방향감각을 잃고 5백m가량 비행하다가 산중턱에 추락했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군 당국은 사고원인을 기상불량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지만, 정비불량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순직한 이현부 중장은 1964년에 육사 20기로 임관, 졸업생중 학업성적과 리더쉽이 가장 뛰어난 생도에게 주는 ‘대표화랑’ 상을 받았고, 28년간의 군생활 동안 군의 기계화·기동화·화력화를 통한 전력증강과 전술개발에 몰두해온 전형적 야전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특히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에서 대대장, 제1기갑여단장, 사단장을 역임하여 기동부대 전술 및 작전지휘에 정통했던 군인이었죠. 이 장군은 동기생들 중 최선두로 군단장으로 진급한지 두 달 만에 사고로 유명을 달리해 주변의 안타까움이 더했습니다. 순직한 7명의 군인들의 유해는 2월 16일, 3군 사령부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
|
첫댓글 사무실에 나와 창문을 엽니다.
태풍도 가고 더위와 학생들이 좋아하는 하기방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맹호.
제가 근무할 때는 함께 근무한 장군은 아니지만, 맹호부대에서만 12년을 복무한 특이한 장군 이었습니다.79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대대장(26여단 차보대대장)90 수도기게화보병사단장
* 1964년 육사 20기 임관.26연대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첫 근무
* 1966년 파월맹호1연대 작전장교
* 1968년 파월맹호 1연대 5중대장
* 1977
* 1981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참모장
* 1981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제1기갑여단장
* 1988
* 1973년 결혼한 부인은 허약체질로 아들 둘(74년 76년)을 낳았는데,
돌이 되기전에 죽었으며, 1992년 당시 딸은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저는 사병으로 (수송대대) 수색대대 옆 수기사에 80년 근무를 했습니다.
당시 기갑여단장 시절 군 수송트럭 ATT 훈련 참가한 일 들이 아직도 생생 합니다.
다시 한 번 장군님 명복을 빕니다.맹호!
@진일도 반갑습니다. 진일도님1
이 청춘방에서 처음 뵙습니다. 저는 정비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자주 방문을 부탁드리며,
하시는 일에도 형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맹호
이곳은 이번주에 모든 학생들이 방학을 시작하네요.울 아들도 어제 방학식을 했지만 4주간의 방학기간중 오늘부터 3주동안 등교합니다. 고딩들은 방학이 방학이 아니네요.ㅎㅎ
날이 따뜻합니다 더위 조심하세요~~^^
예. 코알라야님 하세요
고등학생들의 방학은 방학도 아니고 학원 강사는 더 바쁘답니다.
이거 되겠습니까
따뜻한 것이 지나쳐 옥수수도 쪄집니다.^^^
감사합니다. 맹호
@음악과 대화 아웅~~~
따끈한 옥수수 먹고싶어요~~~
시장가서 사와야겠네요.
호호 불어 한줄한줄 뜯어먹을래요.
@코알라야 마침 강원도 정선에 주문했던 옥수수가
도착하여 막 쪄서 계곡으로 갖고 나와
맛나게 먹는답니다.
아무 재료도 안넣고 그냥. 어구적 어구적
감사합니다.
@음악과 대화 맛있겠당~~ 쩝""
시장갔다가 옥수수는 빼먹고 왔어요~~
이럴수는 없는거야 !!!
저녁식사후 간식 싸가지고 산책나가서 드시는 옥수수의 맛은 옛날 원두막에서 또는 마당에 멍석깔고 벌러덩 누워 하늘보며 먹는 그 맛일까요?? 그 맛에 이번엔 제가 K.O 패!!
@코알라야 한참 계곡에 있다 집에 오니 밤 10시가 되었죠. 감사합니다.
힐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