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떠나는 여정/靑石 전성훈
봄바람이든 가을바람이든 콧바람이 들면 역마살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온갖 핑계를 꾸며도 억지로 등을 떠밀려 길을 나설 수밖에 없다. 길을 떠난다는 건 돌아올 곳이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 때나 떠났다가 언제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될수록 마음대로 걸을 수 있고 여정을 감내할 만큼 건강이 허락돼야만 할 수 있다. 10월의 첫 주간 연휴를 이용하여 경상도 포항과 경주를 찾아간다. 몇 년 만에 모처럼 아내와 둘이서 오붓한 여정이라 40대 젊은 시절처럼 살짝 마음이 들뜬다.
첫날, 오전 7시 서울역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잠실에서 몇 사람, 신갈에서 나머지 사람을 태운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데도 불구하고 아침 기온이 영상 10도 정도여서 조금 쌀쌀하다. 경부고속도로는 막힘이 없어 자동차가 신나게 달린다. 관광버스가 충청도 옥산휴게소에 멈추니 비가 약간 뿌린다. 우등버스처럼 편안한 좌석에서 한동안 눈을 붙이고 나니, 청송휴게소에서 잠시 쉰다. 비는 오지 않지만 바람이 불고 하늘도 흐리다. 포항으로 들어서자 고속도로 왼쪽으로 검푸른 바다가 보인다. 올해 처음 만나는 동해다. 흰 거품이 몰아치는 바다의 출렁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하다. 얼마 전 태풍으로 피해를 입어 논바닥에 옆으로 누워버린 벼가 너무나 많다. 농부의 마음을 시커멓게 태운 자연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놀랍고 엄청난 자연의 위력 앞에 그저 황망한 마음이 들 뿐이다. 포항에 도착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내연산식당에서 산채정식으로 배고픔을 달랜다. 산나물 맛이 일품이다. 호박과 버섯과 두부를 넣고 끓인 강된장 찌개도 별미다. 달달한 동동주 몇 잔 마셨더니 뱃속까지 얼얼하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서 찾은 곳은 보경사이다. 절 입구 일주문에 쓰여있는 해탈문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언제나 미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삶의 굴레가 떠오른다. 일주문으로 들어서니 예쁜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 옆에는 키가 짧게 골고루 다듬어진 맨드라미가 생명을 다하고 스러져 가고 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내연산보경사(內延山寶境寺), 넓은 경내의 절집 배치는 그다지 특색이 없는 듯하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목에 품위 있게 자란 커다란 소나무가 멋진 위용을 뽐내고 있다. 영화 ‘남부군’과 드라마 ‘대왕의 꿈’을 촬영한 곳이라는 안내문도 눈에 띈다. 산이 높고 계곡과 골짜기가 깊어서 촬영지로는 그만인 것 같다. 대웅전 옆쪽 빈터에서 열심히 제기를 닦고 있는 불자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간에 진솔한 마음으로 신자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햇살이 비치지 않고 간간이 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여행하기에는 좋은 10월 날씨이다.
보경사를 벗어나 호미곶을 찾아간다. 비가 조금씩 뿌리는 바닷가라서 그런지 바람이 세차다. 바닷속에 만들어 놓은 손 모양은 오른손, 육지에 세워놓은 건 왼손이다. 비바람을 피하며 사람들이 재빠르게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몇 해 전 이곳에서 아침부터 과메기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입담 좋게 친구들을 즐겁게 했던 세상을 떠난 친구 생각이 난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황량한 시월의 바다를 바라보니 마음속 응어리가 하나둘 부서져 내리는 듯하다. 바다는 사람의 마음을 천 갈래로 갈라놓으면서도 어느 틈에 하나로 모아서 다독여주는 것 같다. 호미곶을 떠나 구룡포로 향한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일제 침략기 일본인 가옥 거리를 구경한다. 아홉 마리 용 모습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목포와 군산에서 보았던 일본인 거주지역과 별반 다름이 없다. 일본인 가옥 거리를 거닐며 떠오른 생각, 친일분자를 찾는다고 야단법석을 치는 정치판과는 달리, 8.15해방이 되고서도 일본인 가옥과 거리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한 포항 시민들에게 존경심이 든다.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아픈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후손에게 보여주는 지혜는 본받을 만하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구룡포를 뒤로하고 죽도시장에서 회 정식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혼자 소주 반병을 마신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에 술꾼은 나 혼자뿐이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몸이 될 때 마셔두어야 뒷날 아쉬움이 덜할 것 같다. 비즈니스호텔에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하는데 배수 구멍에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 달랑 하룻밤을 지내고 떠날 사람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서 적당히 오르는 술기운을 느끼며 글을 쓰다가 잠자리에 든다.
둘째 날, 비즈니스호텔치고는 아침 식사가 그런대로 괜찮다. 야채를 썰어 끓인 죽을 그릇에 가득 담고 호박 튀김, 메추리 알, 도토리묵을 반찬으로 챙긴다. 과일을 먹기 전에 토스트 한 조각을 구워서 속을 든든히 채운다. 호텔을 나와 하늘을 쳐다보니 언제 비가 왔었는지 모를 정도로 하늘이 맑고 깨끗하다. 오전에 신라 문무왕 수중릉과 경주 일원을 구경한다. 과거에 다녔던 곳이지만, 이 가을에 다시 찾아보는 것도 좋다. 봉길 해변 문무대왕 수중릉 앞바다, 파도가 산더미처럼 솟아오르는데 모래사장에는 갈매기 떼가 한가롭게 놀고 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몽돌이 몰려드는 걸 보니, 훗날 이곳이 멋지고 아름다운 몽돌해변으로 탈바꿈할 것 같다. 바다를 떠나서 상당히 긴 터널을 통과하여 경주로 향한다.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 대릉원을 둘러본다. 솔밭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대신에 오래된 전설이 흐느적거리며 흐른다. 선덕여왕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도, 진성여왕의 요염한 웃음소리도 솔밭 사이에 묻혀버리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는 후대 사람의 밝은 웃음이 흘러넘친다. 세 개의 무덤 사이에 보이는 두 그릇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넘쳐 흐른다. 과실수가 많은 황리단길, 감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딸을 낳으면 시집갈 때 주려고 심었다는 석류나무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있다. 장미 넝쿨로 터널을 만들어 놓은 곳 사이로, 첨성대가 보이는 장면을 찍어 기념으로 간직한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모처럼 나들이에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오늘이 내 삶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명언을 기억하며 매일매일을 기쁜 마음으로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202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