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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은 체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삼상2:12-21)
2024, 1/21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삼상2:12-21절 말씀으로“하나님은 체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요즘 북의 김정은이 전쟁 말을 꺼낸 후 혹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있는 것 같은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절대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한미정보자산은 김정은 동선을 완벽하고 파악하고 있어서 만약 공격하면 그야말로 김정은은 바로 제거되고, 한미의 융단폭격으로 북의 군사시설은 30분 내에 초토화됩니다. 가만있으면 북한의 황제로 모든 걸 지 맘대로 하는데 그걸 포기하고 죽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겠습니까? 많이 가진 자는 목숨을 걸고 도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이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되 체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12절)
둘째로, 하나님은 성도의 헌신에 반드시 보답하십니다.(21절)
셋째로, 믿음으로 하는 기도, 특히 중보기도는 효력이 큽니다.(20절)
사랑하는 여러분!!!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부로 평생을 살면서 서로를 알아 가는데, 어떤 분은 남자를 딱 보면 안답니다. 그렇게 피상적으로 아는 것 말고, 부부가 아는 것처럼 체험적으로 속속들이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상태에서 하는 성도의 헌신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축복을 끌어당기는 통로가 되는데, 하나님도 이런 성도를 기억하시고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또한 이렇게 속속들이 아는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하는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특히나 이웃을 위한 기도, 가난하고 연약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그 능력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되 부부가 체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아주 긴밀하게 알아야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 때 우리에게 어떤 복이 있는지를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되 체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12절)
본문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아멘.
지금까지 한나의 가족사에서 엘리의 가족사로 스토리가 바뀌었는데, 전자가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면 이제부터 시작될 후자는 그야말로 변질되고 타락한 최악의 가식적 종교인의 가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량자가 되었는데, 좋게 말해서 불량자지 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도대체 이들이 어떻게 했길래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바로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여호와를 몰랐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들은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들로 이들도 제사장들로서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는데 여호와를 알지 못하면 제사장직무를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모태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성막에서 먹고 자라면서 제사법은 물론 율법에 대해서도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은 여호와를 몰랐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걸 알기 위해서는 먼저‘알다’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합니다.‘알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 헬라어‘오이다/에이도/호라오’라는 단어는 알긴 알지만 그냥 친하지 않는 옆집의 순이 엄마, 뒷집의 철이 아빠를 알듯이 그냥 겉모습만 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히브리어의 '야다'(ידע)와 헬라어의 '기노스코'(γινώσκω)인데, 이건 부부처럼 속속들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눅1:34절의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니"와 마1:25절에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기노스코) 아니하더니" 이렇게 알다’와‘동침하는 것’을 같은 단어로 사용할 정도로 기노스코의 앎은 부부처럼 모든 것을 속속들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려면 결혼한 부부가 정말 사랑할 때 관심이 가고 모든 것을 알아가는 것처럼 그런 사랑과 열정으로 하나님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기노스코로 안 것이 아니라 오이다/에이도/호라오’와 같이 그냥 지식으로, 추상적으로, 막연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하셨고, 하실 것인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테면 이름은 뭐고, 집은 어디고, 학교는 어딜 나왔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이런 것도 알아야하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처럼 말한 것과 같이 아는 것입니다.(출33:11)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단순히 지식적으로 막연히 알 것이 아니라, 마치 부부가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앎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니 당연히 그분 뜻대로 살 수가 없었으니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알면 안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 교우나 목회자와의 관계는 천국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그냥 인사정도만 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통화도 안 되고, 문자도 그냥 잡수시고, 형식적인 교제마저도 없는 관계가 어떻게 믿음의 형제고,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중보자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사람도 인격적 교감이나 사랑이 없는 관계는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도 그렇게는 안다고 했는데, 약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론적으로 아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며, 철학자들이 추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도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했다는데, 하나님은 나와 뜨거운 체험적인 만남을 통해서 비로써 아는 것입니다.
호6: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알자는 ‘야다’도 바로 부부처럼 체험적인 앎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부부처럼 체험적으로 알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것이 됩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나님과 기노스코의 앎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것처럼 사용했습니다. 모세도 그런 케이스이고, 다윗도 솔로몬도 다니엘도 히스기야도 사도바울도 베드로도 성경에 나오는 우리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과 기노스코의 앎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능력을 무시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여호와를 알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 기노스코의 앎으로 여호와를 알 때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고,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과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 부부같이 체험적인 앎을 통해서 삶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성도의 헌신에 반드시 보답하십니다.(21절)
본문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아멘.
여러분!!! 한나가 정말 간절한 기도와 서원 속에서 어렵사리 아들을 낳아 하나님께 바쳤으니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 3남 2녀의 자녀를 더 주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셨다고 하셨는데, 권고(파카드)의 원어적 의미가‘방문하다.’의 뜻으로 우연한 방문이 아니라 계획된 방문을 말합니다.
이걸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한나가 서원한 것 지킨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여 그녀에게 많은 자녀를 주기위해 의도적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녀를 찾아와 자녀의 복을 주셨는데 이게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보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갖은 수모와 멸시를 끝에 느즈막이 얻은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한나의 희생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세상은 분명 젖둥이를 성전에 떼어놓고 돌아서는 한나를 어리석고 비정한 여인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과,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낸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그때 가롯유다와 일부는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막14:4-5)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하나님께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며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희생에 대해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하셨는데, 우리 주님은 이런 희생과 헌신을 반드시 기억하고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온 천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26:13)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에게 바쳐지는 모든 것은, 예를 들어 제자의 이름으로 주는 냉수 한 그릇도 반드시 보상해주십니다.(마10:42)
마19: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한나는 온갖 수모와 멸시 끝에 얻은 목숨보다 귀한 첫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를 악물고 지켰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녀를 보시고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후로 5명의 자녀를 더 두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과 헌신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눅6:38절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사람들 눈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통해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하는 기도, 특히 중보기도는 효력이 큽니다.(20절)
본문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아멘.
여러분!!! 한나가 사무엘 이후로 5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축복이면에 엘리 대제사장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한나가 잉태를 위해 너무도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듣고 축복해준 일이 있었는데,(1:17) 이제 한나의 서원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다시 한 번 한나의 잉태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그런데 엘리의 기도는 제사장으로서 축복의 기도지만 이게 중보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보기도가 뭘까요?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일테면 이스라엘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려 하자 모세가 목숨을 내놓고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과, 느헤미야가 동족들이 큰 환란을 당하고 성전이 훼파되며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한 것이 중보기도이며,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히스기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을 비롯해 수많은 신앙인들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중보기도의 하이라이트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요일2:1)
그런데 이런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는 타락하고 무능한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은 이 엘리를 통해 한나를 축복함으로 한나의 다 출산이 이뤄지는데, 타락하고 무능한 이 엘리의 기도가 응답된 것은 그의 기도가 바로 중보의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엘리가 한나를 위해 해준 기도는 사무엘을 낳기 전과 후 2번인데, 두 번 다 응답되어 사무엘과 그 후 5명을 더 낳게 됩니다. 물론 이 응답이 한나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한편으로 엘리의 중보기도도 한몫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는데, 그만큼 중보기도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약5:14-16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믿음으로 하는 중보기도는 병든 자를 고칠 뿐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함 받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중보기도가 그만큼 능력이 있고, 귀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사실 믿음으로 드리는 중보기도가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은 성경전체가 일관되게 진술합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을 살려냈고, 모세의 중보기도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냈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기도를 통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을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다니엘도 예레미야서를 통해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보면서 하나님께 금식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렇듯 믿음의 중보기도는 큰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 중에 형제와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되는지요? 나를 위한 기도보다는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역사하는 힘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들 주위에 질병으로 고통 받고, 여러 문제로 힘들어하거나, 홀로 외롭거나, 낙심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주길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는 효력이 크기 때문에 부디 2024년에는 이 능력을 활용하여 기도의 사람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