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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1일 금요일 [(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은 의인이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하니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고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시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아 손을 대는 자가 없다(복음).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자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가르치시는 것을 대하니,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출생부터 이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두 가지로 하십니다. 첫째는, 군중이 아는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군중은 하느님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큰 전향점이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해 왔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만이 하느님을 안다고 하니, 그들은 모욕감을 느낀 것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예수님을 안식일 파괴자 정도로 생각하던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중죄인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했지요. 메시아가 어떤 분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나는 그분께 무엇을 바라는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생활 중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만들고, 나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린 그런 예수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의 모습을 정립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허깨비 같은 몸만 왔다갔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또 다시 판공성사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고백소 앞에 줄지어선 수많은 형제자매님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의 내적인 방황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안타깝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된 하느님을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게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굶주림으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갈증을 채울 길 없어 아쉬워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지 5년, 10년, 20년, 30년 세월은 흘러가는데, 이제 남들이 볼 때 연륜이 지긋한 성숙한 신앙인으로, 봉사 전문가로, 단체장으로 교회 안에서 활약은 대단한데, 뭔가 허전합니다. 아쉽습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면 발길은 자동적으로 성당을 향하는데, 별 의미가 없습니다. 미사에 대한 은혜도 없습니다. 별 감흥도 없습니다. 그저 의무감에서, 안 나가면 죄라고 하니, 남들이 우르르 가니 나도 따라갑니다만, 마음은 다른데 가있고, 그저 허깨비 같은 몸만 왔다 갔다 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무미건조함, 더 나아가서 신앙의 위기가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봅니다. 보다 근원적인 곳에, 보다 근본적인 곳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은 대체로 순식간에 위기를 체험하더군요. 하느님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분을 만나야, 그분과의 내밀한 인격적 만남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의 절절한 사랑에 빠져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그분과의 신앙여정, 정녕 고단하기만 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자주 야단맞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하느님,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확신을 갖고 그분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세례 받은 지 30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하느님 체험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분과의 1대1의 만남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다시 한 번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듭 날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만남,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형제들의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도 자신만만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담담합니다. 참된 영적 예배,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순수한 봉사활동은 빛을 발합니다. 하느님과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제대로 알아야 ‘진한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아낌없이 자신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체험해야 그분께 투신할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사순절 동안 어렵겠지만 깊은 내적침묵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깊이 몰입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체 앞에 오래 머물러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두려움은 내가 만든 껍데기 안에 산다 >
저는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곧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2학기가 되면서부터 성적이 곤두박질 쳤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대학에 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성적이 더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이런 두려움 때문에 경련을 일으켜 엠뷸런스에 실려 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고3병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제 시험지만 받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귀에서 쇠 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집중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만 고민을 할 뿐 누구에게 상담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대입시험 2달을 남겨놓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에이, 바보. 진작 내 말대로 정신병원에 가보지.”
저는 정신병원이라 하면 미친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도 제가 이것을 그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시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난 3학년 시작 할 때부터 다니고 있어.”
이 친구가 말한 것은 신경정신과였습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신경안정제와 같은 것을 복용하며 공부를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2달 동안 의사에게 상담하고 약을 받아먹었습니다. 심리적인 이유인지 약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2달은 성적이 더 이상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에게 나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친구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면 저의 성적은 더 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내 처지를 인정하고 솔직해 지는 것, 이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해 지면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 감추고 있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솔직해 지려는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정신과에서 약을 먹으면서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다녔는데 어떤 분이 이렇게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 사람들에게 하지 마.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거든. 취직하기도 힘들고 결혼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
그러나 저는 계속 하고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배우지 못한 분들이고, 집이 가난했다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합니다. 솔직하지 못하면 아무 두려움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계속 나에게 껍데기를 씌워 결국 나를 가두고 죽이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아예 두려워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면 결코 부끄러운 것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도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겁도 없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합니다. 사람들은 그 용기에 신기해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숨길 것이 없으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다가 잡혀갈까봐 두려워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져서 움츠려 들고 솔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 모든 것을 대놓고 이야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바시 152회에 권율이라는 사람이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권율은 미국 태생 한국인으로 한국말도 잘 못하고 천성적으로 혀가 짧아 발음도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다 그가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 굉장한 차별을 받을 때였고 학교에서는 화장실에서 아이들에게 맞을까봐 오줌이 마려워도 결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화관도 가지 못했고, 백인들과 여자들 앞에서는 온 몸에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긴장을 해서 아예 사람과 만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자신이 알았던 어떤 형도 그런 어려움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그렇게 계속 나가면 정말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움츠려들지 않기로 결심했고 학교에서 질문을 하나 이상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스피치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운동모임에도 가입하여 친구를 사귀었고 친구들과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늦기 전에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하라고 충고합니다.
지금은 성공한 회사의 리더가 되어 있습니다. 미국 TV쇼에도 출연할 정도입니다. 이 분이 이렇게까지 되기 위해서 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겸손한 진실함’이었습니다.
감추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거짓된 내가 만들어 놓은 내 자신 안에 갇히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곳엔 온통 두려움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십시오. 사실 나의 단점을 당당하게 말할 때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솔직함의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숨기고 싶어서 껍데기를 씌워놓은 그 집에서 거처합니다. 따라서 솔직해질 때 껍데기는 벗겨지고 두려움은 살 집을 잃게 됩니다. 부끄러운 것이 내 안에서 곪아서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빨리 터뜨려버리십시오. 자유는 솔직함에서 시작되고 솔직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거처할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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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라삐 어디 묵고 계십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