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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묵상글 들 ( 대림 제3주일. - 기뻐하여라. 주님 안에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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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뻐하여라. 주님 안에서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
그래서 독서들에 기쁨과 관련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고
자연스레 기쁨에 대한 성찰을 우리도 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는 진정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성찰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요즘 그리고 갈수록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의미보다 재미를 더 추구하고
그래서 재미없으면 아무리 의미 있는 영화도 보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요즘 타령' 할 것 없이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기쁨보다 즐거움을을 더 좋아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인간을 애기할 때 Homo Ludens/놀이의 인간이라고도 하지요.
당연한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둘 다 만족감이고 그래서
우리가 흔히 기쁨과 즐거움을 같이 붙여서 쓰곤 하는데,
그런데 만족감이란 면에서 같지만 시차적 만족감인 기쁨에 비해
즐거움은 행위 동시적인 만족감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고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 동시에 만족감이 오고 그래서 즐겁지만
대학 합격과 취업과 같은 기쁨과 바라고 바라던 집을 살 때의 기쁨은
최소 3년의 공부와 10년, 20년 주택 청약 적금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기쁨은 시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까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고통이지요.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이 고통이고,
즐기고 싶은데 즐기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것이 고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즐거움, 곧 우리가 흔히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당장은 즐겁지만 즐거움 뒤에 허무가 온다던지 실패나 좌절이 오지요.
신나게 놀고 즐기다 대학에 떨어지고 심지어 인생이 실패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움보다 기쁨을 추구하는 편이 낫는데
기쁨 중에서도 성취적인 기쁨보다는 인격적인 기쁨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취적 기쁨이란 일이 내 뜻대로 잘 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 곧 보람이고
인격적 기쁨이란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인데
오늘 독서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기쁨 곧 신앙인의 기쁨은
이 기쁨 중에서도 오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기쁨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기쁨, 특히 대림절의 기쁨은
임박臨迫한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며
그리고 마침내 오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며
오신 주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사는 우리는 이제 두 가지 실천을 하는데 곧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자선의 실천입니다.
복음 선포와 자선의 실천이 우리의 영적 기쁨과 즐거움의 결과라는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기쁨이 넘친다면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워져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자선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오늘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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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입당송을 시작으로 화답송, 독서 그리고 알렐루야와 복음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내용은 기쁨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서에서 주님안에서 늘 거듭해서 기뻐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사도 바오로의 체험처럼 어떤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모든 사랑은 본질적으로 기쁨입니다. 사랑의 생활에 있어서 첫째 열매는 마음속에 샘솟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영혼 깊은 데서 고요하게 샘솟기에 자연히 우리의 눈에, 얼굴에, 태도에, 몸짓으로 즉시 나타나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의 성공에서 기쁨을 얻는 것 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화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맛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데 있음을 삶의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흥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 내는 그곳에 완전한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화를 내고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 가끔 필요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며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찬미할 때 얻는 그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기쁨은 감사입니다. 기쁨은 자선 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란 주는 것이고 나눔이고 사랑입니다. 감사란 기쁨을 돌려주는 행위이며 사랑을 돌려주는 행위입니다.
자선은 친절과 관용, 내적 기쁨을 누리도록 영혼을 정화시켜 줍니다. 이런 선한 행위의 기쁨은 우리의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덕스러운 행동이 가능하고 가치 있으며 그러한 행동을 반대하고 좌절시키는 악덕의 행위보다 더 즐겁고 더 풍부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참된 기쁨이란 깨끗한 열성과 부지런함, 선한일을 기쁘게하기 위한 마음의 재빠름과 내적 외적 마음가짐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기쁨은 변화된 회개 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선 자체에 이르렀을 때에 얻게 됩니다. 기쁨은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얻게 됨으로 영적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지내고 있는 자선주일의 참된 의미는 자선은 먼저 자신이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이들과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 기쁨안에는 감사와 사랑이 함께 흘러 나오기에 그렇습니다.
참된 기쁨을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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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림 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스바 3,15.17)
이처럼, 그가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의 삶 안에, 그들의 현장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곧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생활과 하느님 말씀묵상과 성사거행과 공동체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수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저희의 거부로 상처 입습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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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대림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날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저녁미사를 시작하려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미사가 시작되니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부부가 4살 박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쥐어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먹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여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 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11,25). 받기 위해 준다면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 하고 미사 봉헌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이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벌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신명기 30,11-13)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4). 그런데 마음과 몸이 따로 이고,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앞이 훤하잖아요? 흰머리라도 좋다 빠지지만 말아다오! 어느 분이 머리 염색약을 슬며시 가져 다 놓으셨는데 발라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잖아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지요. 왜 고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는데, 행복해 진데 왜 그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은 것을 확인하고도 그냥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가진 것을 ,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듣고도 왜 그냥 넘어갑니까?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찰떡궁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예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찰떡 궁합이야!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용하게도 알아맞히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번 지적하고 명하지 않아도 그분 뜻을 먼저 알아듣고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들며 무엇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깨우치길 바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임금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다니4,24).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자기 영광을 떨치려고 하다가 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제 정신을 차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진실하고 그 길은 다 공정하니 그분께서는 교만 속에 걷는 자들을 낮추실 수 있는 분이다”(다니4,34).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죄를 벗고 가난한 이를 도우면 허물을 벗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 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시편37,25-26). 그러므로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15,10).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암브로오시오 성인은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도 “자선을 하면 영벌을 면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시니 많고 적음을 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선을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느날 놀부 집에 스님께서 시주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었습니다. 네가 나를 외면 해도 나는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하고 “가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놀부가 질세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주나봐라”하였답니다. 지나가던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잘해봐라 잘해봐라 잘해봐라”했습니다. 마침 고승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하였답니다. @@@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
자비는 두 번 축복을 내린다.
한 번은 자비를 주는 사람에게
또 한 번은 자비를 받는 사람에게
그러나 자비가
정의의 이름으로 둔갑될 때,
세상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처럼 착갈될 때가 있다.
비록 당신이 정의를 갈망할지라도,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볼 수 없음을 늘 기억하라.
우리는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비를 가르치기 위해
자비로운 행동을 보여 줘야만 한다.-셰엑스피어-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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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⒈ 전례의 뜻: 믿음으로 행하는 나눔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고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성체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믿는 이들의 자선은 성체성사의 정신에 따라서 물질적인 나눔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의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즉, 가난한 이들의 불쌍한 그 처지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가난해지게 된 것이 세상의 죄악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그 죄악에 일조했던 우리 자신의 죄를 기워 갚는 보속의 마음으로 나눔을 행해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치는 것이 되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선을 위한 나눔에는 믿음이 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는 나눔만이 아니라 선교처럼 더 종교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믿음과 유리됨으로써 불행을 초래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⒉ 과달루페 성모 발현
1531년 12월 12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490년 전 오늘, 인류 역사상 처음이요 교회 역사상으로도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멕시코 시티 인근의 테페약(Tepeyac) 언덕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를 잉태한 원주민 임산부의 모습으로 후안 디에고(Juan Diego, Cuauhtlatoatzin)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성모가 발현하기 10년 전 멕시코를 점령한 스페인 군인들의 야만적 행동에 충격을 받고 그들과 함께 온 선교사들이 전하는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었지만, 후안 디에고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신부들에게서 감화를 받아 세례를 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성모 발현 장소인 테페약 언덕이 공교롭게도 아즈텍 토난친(Aztec Tonantzin) 여신의 신전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성모발현 이후 전 멕시코의 원주민들이 토속신앙을 버리고 세례를 청했고, 여신전에서 인신을 공양하는 우상숭배 풍습에 젖어 있던 죄인들은 회개하여 줄을 지어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허리에 맨 검은 띠는 임신한 여성을 나타내는 원주민들의 전통이었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과달루페(Guadalupe)의 영원하신 동정 마리아’로 불러주길 원하셨습니다. ‘과달루페’는 ‘뱀을 물리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3,15의 말씀을 연상시키지요? 과달루페의 성모님께서는 발현 직후 멕시코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다가 1910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고, 1999년에는 남북 아메리카 대륙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되셨습니다. 2002년에는 발현 목격자인 후안 디에고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⒊ 과달루페 발현의 논리적 귀결인 루르드 발현
지난 12월 8일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만, 이 대축일은 이와 관련된 성모 발현 사건, 즉 1854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 수비르 소녀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께서 직접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알려주셔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원죄 없는 잉태, 즉 무염시태는 창세기 3,15을 확인해 주신 과달루페 성모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뱀의 머리를 바술 정도로 악에 맞서는 여인이라면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밖에 없고, 또 그런 어머니이시라면 잉태될 순간부터 마귀가 부추기는 원죄에 물들지 않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근세 유럽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는 세속적 풍조가 프랑스 혁명 이후 만연해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 소수의 신자들은 공식 교리로 반포되기 전인데도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열심히 믿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 신비는 물론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 사조가 팽배해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야 했던 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최초의 성모 발현인 이 과테말라 발현 역시, 사람들의 죄악 특히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원주민들을 우상숭배자로 몰아 패악을 저질렀던 악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성모 마리아께서는 후안 디에고에게 “너희가 나의 사랑과 자비, 보호를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 성당에 세우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남기셨으며, 이 자리에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 성당이 세워짐으로써 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이래 원주민 8백만 여명을 죽이는 등 스페인 가톨릭 정복자들에 의해 자행되어 온 학살이 당장 멈추었고, 뱀의 여신을 숭배해 오던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원주민 8백만 여명이, 그러니까 당시 멕시코의 전 인구가 그 후 7년 만에 집단으로 개종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행해지던 종교적 행위가, 아무리 선교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성모 마리아께 발현하시어 반대 메시지를 주셔야 했을 만큼 비복음적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⒋ 가톨릭 교회의 나눔
나눔에 믿음을 더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온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방식은 네 가지인데, 긴급구호, 사회복지, 사회개발 그리고 사회운동입니다.
긴급구호는 일시적으로 화재나 수재, 철거나 지진 등 재해를 당하여 어려워진 이웃들에게 긴급하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번만 도움을 주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나, 부양해 줄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 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한 번만 도와주어서는 안 되고 지속적이고도 전문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나 민간 그리고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이들은 가정도 있고 노동력도 있는데 자기 집이 없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어렵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일방적으로 도와주어서는 효과도 없고 반감을 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기 문제를 주장하게 함으로써 공론화의 장으로 끌어내어 정책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회개발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를 공동체 운동이라고도 합니다.
가난이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볼 때, 위의 세 가지 방식은 사후 치료에 해당됩니다. 질병도 사후 치료보다는 사전 예방이 중요하듯이, 가난에 대해서도 미리 예방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계몽 활동이나,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청원 활동 또는 필요할 경우 법률을 만드는 입법활동이 있습니다. 이를 사회운동이라 합니다.
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이상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온 방식은 예수님께 기원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성령께서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자의식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 시작 무렵부터 이렇게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고 나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금새 퍼져서 병든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의 긴급구호와 사회복지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시어 도움을 주신 가난한 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매우 다양합니다: “눈먼 사람,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묶인 사람,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 군중, 보잘것없는 사람, 가장 작은 이들, 맨 끝자리의 사람, 어린아이, 철부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등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바리사이들은 이들에 대해서 율법도 몰라서 죄를 짓는 저주받을 족속이라고 낮추어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헌금을 많이 낸다고 자랑할 뿐, 그 가난한 이들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들과 대조적으로 믿음으로 나눔을 행한 모범적 사례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신 일도 많았지만,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산상설교에서처럼 간접적으로 하지만 지속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개발이나 사회운동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운동을 벌이면서, 군중에게 정의롭게 나눔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일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믿는 이들이 행하는 나눔이 큰 힘이 됩니다. 이 믿음의 나눔은 우리가 이 대림 시기에 성탄을 준비하면서 행할 수 있는 회개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믿는 이들보다 예수님의 성탄을 더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⒍ 가난한 이들의 권리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가난한 라자로와 인색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루카 16,19-31)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부자와 라자로가 같은 식탁에 앉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굶주린 라자로에게 부자가 빵부스러기조차 나누어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람직한 사회는 부자가 라자로에게 개별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회가 아니라 라자로의 권리로 구조적이고도 제도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6세의 호소는 가난이라는 사회 현상의 정곡을 꿰뚫어본 성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빈곤으로 인한 불편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수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자선에 의지함이 없이 떳떳하게 정책과 법률 등 제도적으로 지원을 받게 해 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부여된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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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대림절의 자색은 보속과 참외 속에 구세주를 기다리는 희망의 색입니다. 대림 3주일과 사순 4주일은 ‘장미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사순 4주일은 ‘즐거워하라(Laetare), 예루살렘아’라는 입당송에 따라 ‘Laetare Sunday’라고 부르고 대림 3주일은 ‘기뻐하라 (Gaudete), 주님 안에서’에 따라 ‘Gaudete Sunday’라고도 합니다. 대림 3주의 전례색깔은 ‘장미주일’에 맞게 장미색입니다. 장미는 화려한 색깔과 짙은 향기로 기쁨을 상징합니다. 참회와 절제의 대림절에 기쁨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대림절에는 무엇보다 사랑의 자비와 정의를 되새기고 생각과 정신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기쁨의 나눔
슬픔은 보통 조용히 혼자 새기고 싶어하지만 기쁨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합니다. 나눔으로서 기쁨도 늘어납니다. 사랑의 자비도 이처럼 나누는 것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쉽지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자선은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선은 내가 쓰고 남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입는 것, 먹는 것을 서로 나누는 것’, ‘쌀 한 톨 조차도 두 개로 나눠 먹는 것’입니다. 자선은 나눔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타인이지만 그들도 나의 형제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나 자신인 것처럼 내게도 꼭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기에 특별한 사람이 아닌 누구라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신 그분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하느님도 우리와 슬픔을 나누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최고의 기쁨, 최고의 행복입니다. 바로오 성인의 말처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내 마음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살아가는 법의 공유
“당신들에게 정해진 것을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라, 누구도 괴롭히지 말고, 사람을 갈취하지도 말고, 자신의 봉급에 안주하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그저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법과 규율을 지키는 것이 정의의 시작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서로 더불어 잘 사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정의로운 삶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룹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억압하지 않고 봉사의 정신으로 살고, 법에 따라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회’ 그것이 정의의 사회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바로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실천은 나와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잘못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는다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자신의 그릇된 생활습관을 버리면 그곳이 바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세상이 유지되려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곳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과 정신, 생각과 말, 그리고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일 뿐입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생각과 마음을 새로이 바꾼다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갈망하였기에 어떻게 하면 주님을 뵐 수 있는 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답을 들은 후 즉시 행동으로 실천하였기에 주님 만남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유다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삶을 자비와 정의로운 삶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나누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불안해하면서도 세상이 바뀌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변화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세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변화의 주체는 자신이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새롭게 바뀐다면 다른 사람이 변화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바뀐다면 세상도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정의롭고 바른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내가 바르게 생활한다면 내 이웃과 세상도 바른 세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세계를 바꾸는 시작입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큰 은혜에 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더 없이 행복합니다. 우리와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주님, “진정 새로워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례자 요한의 나눔의 의미를 되새겨보십시오
2. 더 좋은 세상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내가 해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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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공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 “운이 좋았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그런 상황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만의 힘으로는 성공의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을 바꿔준 상황과 은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자기 모습에서 그런 상황과 은인을 부른 것입니다.
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곁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자기 잘난 척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잘난 체만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은인이 다가가려고 하고, 또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찾아갈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운이 없어요.”
긍정적인 사람, 겸손한 사람, 경청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곁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빨리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는 먼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군인들은 자기들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수도 생활이나 영웅적인 생활을 강요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옳은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나누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세리 역시 정당한 세금만 받는 생활개선을 하라고 합니다. 군사도 왔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에게 온 군사는 이방인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 역시 회개해서 생활개선만 하면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 사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장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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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제임스 오펜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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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 전하기
두 가족이 낚시를 갔습니다. 각 가정의 아버지 모두 낚시를 좋아하지만, 자녀들은 모두 처음 낚시를 하는 것이었지요. 첫째 가족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앉혀 놓고 기초를 제대로 알아야 낚시를 잘 할 수 있다면서 낚시 수업을 합니다. 낚시대 잡는 법, 미끼 끼는 법, 잡은 물고기를 건지는 법 등을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가족의 아버지는 이론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낚시의 설렘, 짜릿한 손맛, 물고기를 건지는 순간의 희열 그리고 직접 잡은 물고기를 회 떠서 먹는 맛까지 실감 나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족의 자녀가 더 낚시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이론보다 실전의 감정을 느꼈던 두 번째 가족이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론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맛을 들였을 때가 먼저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못 해서 이론적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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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저는 손님에게 집을 내어 주고, 옆에 있는 성당의 사제관에서 며칠 지냈습니다. 지난여름에도 한국에서 신부님이 오셨고, 그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손님은 뉴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선물로 책 한권을 주고 갔습니다. 책의 제목은 ‘세분의 어머니’입니다. 저는 방을 내 주었지만, 손님은 제게 마음의 양식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술품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술품의 가치를 이야기해 주었고, 아들은 예술품을 통해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아들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군에서 아들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군에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아드님은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서 전사하였습니다.’ 아들 덕분에 목숨을 건진 병사는 아들의 얼굴을 그려서 아버지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예술 적인 가치는 없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그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술품을 경매에 내 놓았습니다. 상당한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매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그린 초상화를 가장 먼저 경매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추어가 그린 것이고, 예술적인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초상화를 사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9달러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화는 9달러에 팔렸습니다. 이제 남은 예술품을 경매에 올릴 줄 알았는데 그날 경매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유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경매의 물건들은 아들의 초상화를 산 사람에게 모두 주시오.’ 가난했지만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은 단돈 9달러로 많은 예술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술품을 경제적인 가치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경매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더 두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맹자는 우리 사람들에게는 4가지의 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품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역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행을 행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에서는 우리가 자선을 베푸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품성이며, 그런 자선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직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을 못 본척하고 스쳐지나간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빈자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 일에 쏟아 넣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러한 증여에 쏟아 넣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해를 정리하는 12월 달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나의 사랑과 나의 마음을 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기보다는 소유하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항상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그 말을 할 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이 호텔도 아니고 어디 휴양지도 아닌데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은 점점 커져야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철저한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많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은 작다고 하여 미루지 말고, 악한 일이 비록 작다고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선현의 말씀이 귀를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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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 제3주, 주님의 가르침
-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사랑과 겸손 -
오늘은 희망과 기쁨의 절정과도 같은 대림 3주 “기뻐하라”, 장미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 촛불 셋이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의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마침 교황님의 성탄 구유와 성탄 츄리에 대한 강론 말씀이 은혜로워 그 일부를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구유는 구원에의 보편적 부르심이다. 성탄츄리는 재탄생을 뜻한다. 구유와 성탄츄리의 상징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평화와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데 있다. 나무와 구유는 전형적 성탄분위기인 따뜻함, 나눔, 가족적 친밀함으로 인도한다.
거짓되고 상업적인 성탄을 체험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 모두 하느님의 연민, 부드러운 친밀함에, 또 예술, 음악, 노래, 전통들이 우리 마음에 가져오는 성탄 분위기에 에워 싸이도록 하자.
성탄은 신뢰와 희망의 축제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신뢰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결코 지칠줄 모르는 그분은 희망의 근거가 되는 분이시다. 그분은 높이 계셔서 지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고자 작고 가난한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닮고 섬기기위해 더 낮아지자. 성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오셨고, 우리에게 우리 형제자매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변두리에 버려진 가장 가난한 이들, 가장 약한 이들을 돌보아 주라고 요청하신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오늘 주님은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십니다. 대림 제3주에 앞서 우선 참 보람 가득 했던 어제의 행복했던 개인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 계획대로가 아닌 하느님 계획대로였습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계획에 감동했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습니다. 지체할 수 없다는 예감에 오늘 토요일 오전 시간을 미리 약속드렸고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신심 깊은 루시아 80세 사촌 누님을 미사와 병자성사를 드리러 아침 일찍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급히 불야불야 챙겨 아침 미사후 한 자매의 차량 봉사 도움을 받아 무거운 짐을 들고 화랑대역에 도착했는데 병자성유를 빠트린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다시 반대편 출구를 나오니 마침 고맙게도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 즉시 수도원 제의방 앞까지 간후 병자성유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그 택시를 타고 서대문구 아현동 누님 댁까지 직행했습니다. 평생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인데 택시비 3만원 정도는 문제가 아녔습니다.
병자성유를 잊었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택시로 목적지까지 직행하니 토요일 아침이라 차도 막히지 않아 오전 8:30분 일찍 도착하여 고백성사, 성체성사중 병자성사를 모두 드리고 충분히 누님과 착한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약간의 요기를 나누니 11시였습니다.
마침 중간에 점심 약속이 예상되어 전화하니 도저히 바빠 힘들다는 지인의 연락에 조카차로 수도원에 직행하려 나왔을 때 누님의 서운해 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나를 바래다 주는 조카 차로 수도원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하니 너무 반갑고 기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오히려 점심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음이 정말 잘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고향집 같은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그리워함은 기본적 정서입니다. 성지순례하는 마음으로 아들 차에 동승한 누님은 아이처럼 기뻐하였고 수도원 제 집무실에서 따뜻한 분위기에서 인삼차도 들고 함께 주님의 십자가 고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님과 조카는 잠시 성전에 들려 주님께 인사하고 떠났고 나는 9시경 기도후 네분 자매들의 면담성사를 드리니 하루가 다 갔습니다만 정말 마음 뿌듯한 행복감에 하느님께 참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계획해도 이런 완벽한 일정은 불가능합니다. 전혀 생각지 않게 하느님 시간표에 따라 오전 1시 기상하여 강론쓰기로 시작한 하루 일과가 참 순조롭게 완료됐고 하느님께 많이 감사했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서 대림 제3주일 좋은 깨우침을 주셔서 오늘도 한밤중에 일어나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가톨릭 신문, 말씀 묵상란 “기쁨의 훈련”이란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얼마전 썼던 희망의 훈련이란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예일대 신학부의 “기쁨의 신학과 좋은 삶”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미로슬바브 볼프 교수의 말입니다. 기쁨은 미덕일뿐 아니라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훈련하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쁨의 훈련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또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요 영약靈藥입니다. 하느님 주신 최고의 영약이 기쁨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훈련에 이어 기쁨의 선물, 기쁨의 발견, 기쁨의 선택, 기쁨의 영약인 것입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대림 제3주일 우리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기뻐할 것을 권합니다.
“환성을 올려라, 크게 소리쳐라,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신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대림 축제의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뻐하듯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희망과 기쁨이 됩니다. 대림의 기쁨의 여정은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를 뵈올 기쁨에 날로 기쁨도 더해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방문했을 때 말기암 투병중인 평화로 가득한 사촌 누님의 표정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날로 주님과 가까이 가는 대림의 여정이니 기뻐하라고 간곡히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기쁨과 희망만이 아닙니다. 평화도 감사도 사랑도 미덕이자 훈련입니다. 선물이자 발견이요 선택이자 영약입니다. 그러니 기쁨과 희망에 이어 평화, 감사, 사랑도 만병통치약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고맙고 고무적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감사’와 ‘평화’가 키워드, 열쇠말입니다. 그러니 감사의 훈련, 감사의 선물,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영약입니다. 평화의 훈련, 평화의 선물, 평화의 발견, 평화의 선택, 평화의 영약입니다. 그러니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이 모두가 회개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역시 사랑의 훈련, 사랑의 선물, 사랑의 발견, 사랑의 선택, 사랑의 영약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동사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회개한후 세례를 청하는 이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러합니다. 비상한 사랑 실천이 아니라 본분에 충실한 평범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자선주일에 주는 참 좋은 지침입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고 각자의 눈높이에 맞는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사람마다 그에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는 분별력의 대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의 덕은 함께 갑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대가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분별의 지혜와 겸손의 미덕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 생명의 성령, 주님 사랑의 불로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니 하나 더붙여 겸손의 훈련, 겸손의 선물, 겸손의 발견, 겸손의 선택, 겸손의 영약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희망과 기쁨, 평화와 감사, 사랑과 겸손의 영약을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평생 한결같이 이들의 훈련병이, 수행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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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오늘 복음(루카3,10-18)은 주님의 오심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7-8)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을 듣고 군중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3,11)
'대림 제3주일'인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아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너와 함께 나누는 주일입니다. 나눔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일입니다.
'자선의 원조'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판공성사를 봅니다.
판공성사는 주님의 큰 축일을 앞두고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 어떤 죄를 고백하셨습니까?
'주일미사 빠졌다고?'
아니면 '기도를 게을리 했다고?'
그것보다 더 큰 죄가 바로 믿음이 약한 죄이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 아닐까요?
사랑 실천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선'입니다.
오늘도 기쁘게 나의 것을 내어 놓읍시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4,4-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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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한줄기 빛으로라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는 끝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에서 생겨납니다”(「복음의 기쁨」, 6항).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기쁨을 전합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오십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천사들이 전하는 기쁨의 이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기’(필리 4,5 참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는 더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실수록, 우리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신 분께서는 당신 안에 갇혀 있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내주십니다.
당신을 벗어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당신의 사랑과 현존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쁨은,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합니다. 곧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이에게 다가가 그를 기쁘게 해 줍니다.
자신을 내주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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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므로 ‘기쁨의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항구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즉 오시는 분은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16절)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손에 키를 드시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4-7: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 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6절)아뢸 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7절)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의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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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해야 합니까?"(루카 3, 10)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길을 낸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시는
길을 낸다.
광야의 외침은
죄를 씻어주는
세례의
길이 된다.
길을 가르쳐 준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길은 소식인데
소식을 끝내
듣지 않는
완고한
우리들이다.
듣지 않으면
영혼 없는
시간만이
밀려오고
밀려갈 뿐이다.
이 대림시기는
길을 보수하듯
경청을 보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방향을
보수(補修)하는
것이 기다림의
핵심이다.
들으려는
사랑이 끝내
길을 낸다.
복음은
경청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보수 공사가
필요한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모든
기쁜 소식은
끝까지 듣는
경청을 통하여
전달된다.
경청(傾聽)이
대림이고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
성탄은
제대로 듣는
들음에서
시작한다.
자선(慈善)또한
소식을 듣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도움이다.
도움도 듣지
않으면
독(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경청이며
자선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다림의 실천은
다름아닌
경청이다.
듣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경청하는
사랑의 길이다.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묻는
경청의 주일이다.
고집 센
자아가
작아져야
들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듣는 때가
사랑할 때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기다리고
들을 수 있는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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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대림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날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기회를 갖습니다. 이 시간 자선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저녁미사를 시작하려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미사가 시작되니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부부가 4살 박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사업에 실패하여 큰아이는 보육원에 맡기고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는 것이었습니다. 4살 된 아이도 맡길 수만 있다면 맡기고 싶다고 하면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이리저리 알아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금일봉을 주고 보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을 취할 것을 부탁하고는 점퍼와 목도리를 둘러 주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음날 옆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제가 만난 분이 틀림없었습니다. 밥을 사주고 여관에서 잠을 재우고 돈을 얼마 쥐어 보냈지만, 이대로 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신부를 속이는 것인지, 신부들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지? 어찌되었든,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나진 못하더라도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선의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신부가 이럴 때 곤란함을 느낍니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고, 이래 속고, 저래 속고. 그래도 때가 되면 깨우칠 날이 오겠지? 나를 속여먹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여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4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 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그렇습니다. ‘축복해 주는 이는 자기도 흡족해지고, 마실 물을 주는 이는 자신도 흠뻑 마시게 됩니다’(잠언11,25). 받기 위해 준다면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지혜롭게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13절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 하고 미사 봉헌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당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이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오늘 복음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3,8)고 한 요한에게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3,10). 세리도, 군인들도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옷을 두벌가진 이는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다른 이와 나눠야’ 하며, 세리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군인들도 ‘갈취하지 말고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되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을 잘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계명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신명기 30,11-13)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4). 그런데 마음과 몸이 따로 이고,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당에 오시면서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오늘뿐 아니라 수시로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이 묻거나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칩니다. 저도 거울을 자주 봅니다. 앞이 훤하잖아요? 흰머리라도 좋다 빠지지만 말아다오! 어느 분이 머리 염색약을 슬며시 가져 다 놓으셨는데 발라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더 빠지잖아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어찌 되었든 아마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디에 비춰봅니까? 거울에 비춰보면 보입니까? 우리 영혼의 상태를 거울에 비춰보면 그 상태를 낱낱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를 비춰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야고보서 1장21절 이하에 보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잘못되었으면 바로 고쳐야지요. 왜 고치지 않습니까?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그 답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하면 축복이 주어지는데, 행복해 진데 왜 그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은 것을 확인하고도 그냥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가진 것을 ,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하는 말씀을 듣고도 왜 그냥 넘어갑니까?
오늘 2독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4,6-7).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찰떡궁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너무 예뻐!”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옳아! 그러니까 우리는 찰떡 궁합이야!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용하게도 알아맞히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과 찰떡궁합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매번 지적하고 명하지 않아도 그분 뜻을 먼저 알아듣고 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들며 무엇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깨우치길 바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임금에게 직언을 했습니다. “저의 조언이 임금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다니4,24).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자기 영광을 떨치려고 하다가 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제 정신을 차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진실하고 그 길은 다 공정하니 그분께서는 교만 속에 걷는 자들을 낮추실 수 있는 분이다”(다니4,34).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면 죄를 벗고 가난한 이를 도우면 허물을 벗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 됩니다. ‘인정이 많고 동정 어려 남에게 꾸어주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겠고 영원히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되리라’(시편37,25-26). 그러므로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15,10).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암브로오시오 성인은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그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도 “자선을 하면 영벌을 면하게 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시니 많고 적음을 떠나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선을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선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돕는 행위이지만 내 자신의 영생을 보장 받는 것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클리솔로그). 그러므로 이웃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시고 동시에 영생의 복을 오늘로부터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느날 놀부 집에 스님께서 시주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코웃음을 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었습니다. 네가 나를 외면 해도 나는 너에게 복을 빌어주마 하고 “가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이 소리를 듣고 있던 놀부가 질세라 “주나봐라, 주나봐라. 주나봐라”하였답니다. 지나가던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잘해봐라 잘해봐라 잘해봐라”했습니다. 마침 고승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왠만하면 주지그래” 하였답니다. @@@
“자비는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부터 저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릴 뿐이다.
자비는 두 번 축복을 내린다.
한 번은 자비를 주는 사람에게
또 한 번은 자비를 받는 사람에게
그러나 자비가
정의의 이름으로 둔갑될 때,
세상의 권능이 하느님의 권능처럼 착갈될 때가 있다.
비록 당신이 정의를 갈망할지라도,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볼 수 없음을 늘 기억하라.
우리는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비를 가르치기 위해
자비로운 행동을 보여 줘야만 한다.-셰엑스피어-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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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스바 3,14-18ㄱ)는 주님께서 요시아와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선대 임금들이 무죄한 이들의 피로 예루살렘을 채웠고, 자기들뿐만 아니라 백성까지 우상을 섬기도록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재앙을 선포하셨습니다(2열왕 21장). 예루살렘은 시리아의 침략에 시달렸고, 바빌론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요시아(기원전 640-609)가 시작한 개혁을 독려하려고(2열왕 22,1-23,30) 스바니아는 예루살렘을 “하느님의 딸”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승리의 용사이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계신다는 강력한 희망을 불어넣어줍니다. 마치 가브리엘 천사가 시온의 딸인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면 대단한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이 짓밟히는 날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두려움으로 잔뜩 움츠리고 있는 이들에게 스파니아의 예언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승리의 용사(구세주)께서 오실 것이고,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이 새롭게 펼쳐질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뭉치고 당당하게 외세에 맞서라고 합니다. 승리의 용사가 백성 가운데 계시는 날에는 거만한 자들이 사라지고, 백성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축제의 날처럼 대우를 받으면서 편히 쉬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합니다(3,11-13). 그날에는 새로워진 예루살렘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기꺼이 받아주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아들보다 더 기쁨이 넘치시어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루카 15,20-24)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복음(루카 3,10-18)은 하느님의 구원을 보기 위한 행동 지침을 제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백성이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지만, 열매가 없으면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3,6-9). 세례자 요한 뒤에 오실 구세주께서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의로움으로 인도하시고, 원수들은 쇠 지팡이로 분쇄할 분이시기(시편 2,9; 묵시 2,27) 때문입니다. 그러자 군중, 세리, 그리고 군인들이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팠는지(사도 2,37) 요한에게 다가와 똑같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세 부류가 했던 똑같은 질문은 초기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전에 예비신자가 회개의 표징을 보여주면서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군중의 질문에 생활필수품이 없어서 궁핍하게 사는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면서 회개의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실천이 있기 때문에 죽은 믿음이 아님을 드러내면서(야고 2,15-17) 구세주를 맞이하라고 합니다. 세리들이 “스승님”이라 부르면서 묻자,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더 징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세리들은 통행세와 간접세 명목으로 정해진 것 이상으로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악독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군사들도 와서 묻자,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십니다. 직접세(인두세, 토지세)를 걷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탈과 협박을 일삼았던 군사들은 아마도 페레아 지역에 주둔한 헤로데 안티파스의 군대들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점령군의 용병들로서 세리들을 보호해주면서 뇌물이나 탈세로 부정축재를 자행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죄의 용서와 심판의 설교를 통해 주님의 길을 마련하려는(3,3-9)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들은 백성은 그가 혹시 “구세주가 아닐까?” 하고 기대에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자신은 아니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예식을 통하여 자신과 예수님의 차이를 말하고, 오실 구세주께서는 자기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분의 종노릇을 할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 또 구세주를 믿는 이들의 신랑 자격을 그분으로부터 빼앗을(신발끈: 신명 25,5-10) 능력도 권리도 없다고 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물에 잠기게 하는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구세주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사도 2,38) 베푸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작마당의 비유를 통하여 이제는 정말 회개해야 하는 심판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세례자 요한을 신약시대의 인물로서 복음 선포자로 인정하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16,16).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썩을 대로 썩어 있는 당시 사회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을 기꺼이 나누어 주고, 힘없는 이들에게 부당한 것을 더 요구하지 않고, 권력과 폭력으로 남을 짓누르지 않는 사랑이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 때 구세주께서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고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중들, 세리들, 군인들까지 모두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기쁨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이 원하는 이런 세상을 만들지 못해서 늘 안타깝고, 마음 아프고, 때로는 사람이 두렵고,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 오시는 날, 종말이 오면 이런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필리 4,4-7)는 필리피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가 무척 아끼는 필리피 공동체가 사랑의 실천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져서 분별력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몹시 기뻐했습니다(1,4-11). 그런데 여성들이 많았던 필리피 공동체(사도 16,11-15) 안에서 바오로를 열심히 돕던 에우오디아와 신디케 사이에 일치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4,2-3). 그래서 바오로는 다른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라고 네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 화해와 평화를 위해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셋째, 걱정거리 앞에서 조바심을 갖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들이 칭송하는 덕들을 쌓고, 그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오로에게 배운 대로 산다면(4,8-9) 곧 오실 주님의 날에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루카 21,28) 그분을 만날 수 있을 테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오로는 필리피 공동체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갈라 5,22-23)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11)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진실한 협조자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봉사자들이 너그럽게 산다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협조자들을 지켜줄 것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작별인사를 하면서 늘 그랬듯이, 바오로는 “하느님의 평화”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복음을 전해줄 때 말한 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안다면(4,11-12)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공동체라면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충분히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리의 용사가 함께하실 수 있는 세상(스파니아), 이웃의 기대에 부응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세상(세례자 요한), 그리고 너그러운 마음과 덕들이 넘치는 세상(바오로 사도)이 바로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께서 만드실 세상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구세주께서 오실 길을 곧게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언덕을 깎아내린다면(이사 40,3-5) 세상은 사랑이 넘치고, 늘 평화롭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아서 이런 세상을 만들고자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절 셋째 주간을 회개와 기쁨의 주간이라 부릅니다. 네 개의 대림초들 가운데 기쁨을 뜻하는 장미색 초에 불을 밝히고, 장밋빛 색깔의 제의를 입고, 구유를 꾸미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아갈 나눔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불로 구원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새롭게 다가오시는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평화를 추구합시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시편 12장)처럼 기쁨의 원천이신 구세주께서 곧 오실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니 기뻐하며 찬미하여라.”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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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과 정의 실천으로 얻는 기쁨 ♣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4)
대림 3주일의 말씀들은 하나같이 기쁨을 노래합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를 당하여 식민 통치 아래서 온갖 핍박과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하는 서러움 속에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4,14)
사도 바오로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필리피 신자들에게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4,4-5)라고 권고합니다. 스바니야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 모두 온갖 악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외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루카 3,3),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3,8) 하고 권고합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눔, 공평, 정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요한의 답은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참 기쁨을 얻기 위해 매우 중요한 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군중에게 그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3,11) 하고 답합니다. 삶에 필수적인 것 가운데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가 음식물 쓰레기로 골치를 앓지만 지구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갑니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그에 따라 신앙생활에서마저 소외현상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신명 15,4) 비로소 정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고 답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않는 ‘공평’을 지키는 것이요, 그렇게 하려면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공평이 깨지면 부의 균형만 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불공정과 착취가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와 ‘흙수저’로 갈리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사회진출, 부의 획득, 기본권의 실현 등에서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썩어 비인간화를 자초할 것입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고,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 예외와 특권을 보장받는 사회는 인간을 도구화 하고 게토화 하는 비극을 초래할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군사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하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지닌 힘을 이용하여 힘없는 이들에게 강제로 부당하게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정의’를 언급한 것입니다. 나아가 탐욕을 부리지 말고 사회적 약자들을 자비롭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기쁨이요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 참 기쁨을 얻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마저도 못 가진 이들에게 건네고,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공평을 되찾으며, 자신의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힘없는 이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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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언젠가 회의차 지방에 내려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역 주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노숙인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 신자들의 무료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 동안 바짝 다가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불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 아마도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과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어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번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쇠고기국밥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그릇 받아먹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번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노숙인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을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커피를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하고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거기 서 있어 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 깊은 축제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미사였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던 백성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지니셨던 측은지심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지녀야 할 주일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행위이자 구원을 직접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가난의 악순환을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더욱 근본적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자선행위, 몸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시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시작하면 그 '맛'이 대단합니다. 내 호주머니에서 뭔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은 잠시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느새 빠져나간 그 이상의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자선은 우리에게 뿌듯한 마음, 넉넉한 가슴을 축복의 선물로 베풀어주십니다.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자선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도구입니다.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무거운 등짐 하나를 내려놓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자선과 더불어 우리는 오랜 상처와 아픈 기억들이 조금씩 치유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누려고 해도 나눌 거리가 있어야 나누지?’ 라는 분들, 조금만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건네는 작은 미소 한번 역시 큰 자선입니다.
실의에 빠져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힘내라'는 표시로 어깨 한번 두드려줄 때, 우리는 큰 자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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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청하세요
오늘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 나누어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한을 메시아로 아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소위 ‘사랑실천’을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실천법은 세례자 요한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새로 태어나게’,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요한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CCC, 460)라는 말씀을 인용해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실천법을 알려주는 수준은 세례자 요한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사랑실천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오십니다.
그 능력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믿느냐가 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허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감기를 빨리 낫는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허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물어도 될 것을 예수님께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 내용입니다. 최보나는 광고회사에서 5년째 조감독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녀를 여자로 봐주기는커녕 무시하고 구박하고 이용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대우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변 촬영지에서 이승재를 만납니다.
이승재는 과거에 최보나가 감독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했었는데 지금은 온갖 허세와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보나는 해변에 외로이 혼자 남아있다가 모래사장 위에서 잠이 듭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추워서 일어난 보나는 주변을 돌아보던 중 잡화 물건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발견합니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 트럭으로 향했는데 그 트럭에서는 누구든 따라 하기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수많은 비디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 꾸러미를 삽니다.
우연히 보고 잠든 내용을 다음 날 아침부터 우연히 써먹으니 이상하게 정말 먹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까칠하게만 살아왔는데, 필요에 따라 사과하고 웃어주고 거리를 좁히는 등의 절차를 따라 하면서 여러 위기를 모면합니다.
회사와 남자와 세상의 인정을 받아갑니다.
이렇게 남자사용설명서를 완벽하게 익혀가면서 그는 승재의 사랑도 얻습니다.
하지만 이승재는 보나의 집에서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자신에게 그대로 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용당한 느낌에 그녀를 떠납니다.
그녀는 승재에게 진심을 말해보려 했지만 실제로 정말 비디오의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기에
승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디오의 마지막은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쳐주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실천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자신에게 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소중함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전에 오랜 시간의 행동 실천법이 나왔던 것일까요? 이는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나는 마음을 다잡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일도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되자 승재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다시 끌립니다.
보나가 승재를 향해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승재는 보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인기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만인 앞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닌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입니다.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디오에 비유하기는 차마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 행동을 지정해주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자존감을 주는 방법 면에서는 보나가 배운 비디오와 같은 역할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고를 때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길어주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로 그 여인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존감도 지니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종은 여인을 이사악에게 보내고 이사악은 그녀와 하나가 됩니다. 이사악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상징하는 레베카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임을 알아 그 실천에 노력하는 이미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지정해주는 사랑의 실천만을 가지고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랑 자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인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는 이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에게 키워지면 늑대라고 믿고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아닌 늑대의 본성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이 나오게 하려고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믿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사랑의 실천만 묻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요한을 메시아로 여긴 사람들처럼 메시아를 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기껏 예수님께 와서 새로 태어날 생각은 안 하고 사랑의 실천방법만을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당신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수준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할 수 있어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나의 자존감을 주는 정체성을 확고히 믿게 할 믿음을 청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합당하고 기쁘게 받아주실 청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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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대림 제 3 주일-묵상과 기도
대림 제 3 주일은 자선주 주일입니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며,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주님의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고 사랑합니다. 자선의,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합니다.
라틴어 Adventus는 곧 그분이 '도착'하신다. 뜻입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전례력의 새해인 대림 시기는 주님 성탄 대축일 전 4 주간 동안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성찰과 회개, 믿음과 희망으로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립니다. 미사와 성사 참여, 그리고 선과 자선을 행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스바 3,14-18ㄱ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 4,4-7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루카3,10-18
실천
대림 제 3 주일은 메시지는 '기쁨'입니다. 스바니아 예언자는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신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유럽의 첫 복음지인 필리피인들에게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 걱정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소원을 하느님께 말하십시오.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구원의 기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자 없다. 그분께서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해주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고대하며 기쁨을 흘러 넘치게 합니다. 기쁨의 준비로 회개와 보속, 믿음과 따름, 선과 사랑, 그 자선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립니다. 기쁨은 자선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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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대림 제3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 제3주일 제1독서(스바3,14~18ㄱ)
주님께서 보호하셨다'는 이름 뜻을 지닌 '스바니야'서의 작중 연대를 1장의 머리글을 보면, 요시야 임금 통치 시절(B.C.640-609년)로 제시한다.
한 세기 이상 고대 근동 전체를 호령하던 아시리아 대제국이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유다 임금 요시야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를 근절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열왕23,4-14).
이런 상황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의 권능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을 선포한다.
스바니야서는 니네베의 파괴를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임금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계시한다. 스바니야서의 대부분은 요시야 임금의 통치 시절과 부합하지만, 일부 대목은 유배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오늘 독서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하는 마지막 대목 3장 14-20절은 이 책의 다른 대목보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늦게 곧 6세기 말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바니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부분(1,2-2,3)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신탁이다. 그들은 야훼 종교와 주변의 다른 다신교를 혼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의 주권과 권능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에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둘째부분(2,4-15)은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을 거슬러 선포한 신탁이다. 주님의 주권은 사방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모든 신들에게까지도 미친다.
마지막 세째부분(3장)은 다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먼저 예루살렘 주민을 대표하는 지도자, 통치자, 예언자, 사제들의 잘못을 고발함으로써 그 곳을 단죄한다(3,1-4). 대신과 판관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사제들은 종교 혼합주의로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
이런 예루살렘의 불의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시는 공정한 분이시다(3,5). 그분은 당신의 도읍인 예루살렘만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받들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빗나갔다(3,7). 그래서 그분은 뭇 민족과 더불어 당신의 백성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3,8-9).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적은 수의 겸손한 이들을 살아남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3,12-13)
주님께서 친히 보살피시고 다스리시는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도성 시온은 회복되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온 세상 민족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3,16-20).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4)
여기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딸'은 모두 동격이다. '환성을 올려라'와 '크게 소리쳐라'와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점층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 기쁨을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환성을 올려라'에 해당하는 '란니'(ranni)의 기본형 '라난'(rannan)은 '소리내어 노래하다'는 의미를 가지며,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내어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크게 소리쳐라'에 해당하는 '하리우'(hariu)의 기본형 '루아으'(ruah)는 '부르짖다', '외치다', '즐거이 부르다'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부르짖듯 큰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란 표현에서 사용된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웨알레지'(wealezi)의 원형 '알라즈'(allaz)는 '기뻐 날뛰다','몹시 기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의 승리와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기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ing', 'shout out', 'Be glad and rejoice' 라는 점층적 표현을 쓸 수 있겠다.
본절에 사용된 이러한 점층적 표현은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선민의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선민의 이러한 기쁨에 대한 세 단문처럼,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세 단문이 3장 17절 하반부에 점층적 표현으로 교차 대구를 이루며 나온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 하시리라." (17)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려 기뻐하시리라'는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하느님의 분노가 진노의 대상이었던 선민들이 완전히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은 '그가 베푸는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조용히 그 사랑을 향유하실 것이다.' 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그 사랑에 스스로 빠져서, 만족과 기쁨으로 잠잠히 안식하실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보다 더욱 절실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용사의 강한 이미지(17절 전반부)가, 그가 구원을 베푸신 그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으로 놀랍게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17절 후반부).
이러한 선민에 대한 하느님의 그쁨을 묘사하는 표현은,결국 하느님의 선민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차 선민들이 하느님께로부터 흠없이 거룩하게 성화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rest(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그리고 3장 16절 상반부에 선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날, 결정적인 '그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날을 바라보고, 주어진 현실 가운데에서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굳게 설 것을 권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선민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란 표현은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나타낸다. 여기서 '거두시고'로 번역된 '헤씨르'(hesir)는 '제하다','제거하다'란 뜻의 동사 '쑤르'(sur)의 사역형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행하신 하느님의 주권적 역사를 '쑤르'란 동사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워 버리리라'(11절)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기까지 하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신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만이 진정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 위협마저 철저히 제거하신다. 즉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판결'(형벌)은 주님께서 판결하여 내리시기로 결정하신 심판을 의미하며, '원수'란 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주님께서 모으셨던, 이방의 여러나라와 민족들(8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남은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이다.
'힘 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6)
'두려워하지 마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이어,'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는 간접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손을 늘어뜨린다'고 하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묘사하는 히브리적 관용구이다(2사무4,1; 이사13,7; 예레6,24).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그들의 왕으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할 것도 그리고 낙심하거나 좌절할 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즉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그들 앞에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적과 어떤 전쟁에서도 그들은 패하지 않으며, 어떤 원수도 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하니,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17)
'승리의 용사'에 해당하는 '낍보르'(gibor)는 전투의 문맥에서는 '용사','전사'를 언급하고 있다(여호1,14; 6,2; 판관5,13; 2사무1,19 등).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께 적용될 경우에는 단순히 '용사'를 언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개념을 내포하게 된다.
즉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용사이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이사10,21).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 안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18)
새 성경의 번역이 좀 잘못된 것 같다. 여기서 선민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이것은, 이방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신분의 제약으로 '축제'(절기)때마다
그 '축제'(절기)를 지켜야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임을 전제한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들은 '축제'(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불행'이요,'모욕'으로 표현), 본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 날에,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마음껏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축제(절기)를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의 회복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모욕(치욕)의 짐은 벗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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