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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4), 오래 참음(갈 5:22,23,약 5:7-11)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내안에 계신 증거라고 했습니다. 내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품이 나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첫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모든 열매의 근원이자 시작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실재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엄청난 하나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둘째열매는 기쁨입니다. 사랑의 열매와 함께 맺히는 열매가 바로 기쁨의 열매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행복의 증거입니다.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열매가 화평입니다. 화평은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없으면 화평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역시 십자가의 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화평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볼 네 번째 열매는 바로 오래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의 한자어가 ‘인내’입니다. 그런데 ‘참을 인(忍)’자를 보면 의미심장합니다. 칼도(刀)자 밑에 마음 심(心)를 쓰고 있습니다. 인내는 “칼로 마음을 베는 것처럼 아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래 참음은 고통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먼저 사람에 대해서 참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손해를 끼친다든지 비난하고 모욕하는 자들에 대해서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하여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한번 숨을 쉬고 참아내야 합니다. 더더구나 성령의 사람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화를 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앞에 복종시키는 것이 산 믿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분한 일을 당할 때, 그것을 참는 것은 정말 쉬운일이 아닙니다. 특히 ‘빨리 빨리’를 외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오래 참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에게는 참는 것은 곧 죽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남을 욕하고, 폭력을 행하다가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 때문에 싸우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주차문제로 시비를 걸다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공중전화가 있을 때는 앞사람이 전화를 오랫동안한다고 화를 내며 싸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인데 참지 못하고 다툼과 싸움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참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히 12:2절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참음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시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범할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징계하지 아니하시고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참으심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길이 참으라'라는 말이 세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8절에도, '너희도 길이 참고' 이 길이 참으라는 단어는 화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인내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막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인내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인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1. 농부처럼 오래참으라고 했습니다(7-9절).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오래동안 참고 기다립니다. 왜 참고 기다립니까? 가을에 주어질 풍성한 열매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확신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씨에서 싹이 나고 그 싹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기에 오늘 주의 말씀에 잘듣고 믿고 순종하며 기다립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에 환경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빌 2:13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롬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을 기대하지 않고 자꾸 조급해서 하나님보다 앞서니까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블레셋과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제사장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자기가 제사를 드려 버립니다. 이 일로 인해 사울왕은 하나남의 종 사무엘로부터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왕권이 그 가문으로부터 다윗 가로 넘어갑니다. 사울의 행위가 그렇게 큰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한 일인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없이도 왕이기에 자기 자신이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입니다. 결국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써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얻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커다란 불씨가 되어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의 갈등의 씨가 된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에게 장자의 복을 줄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꾀를 써서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또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 후에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형의 칼을 피해 멀리 외갓집으로 도망가 살게 되는데 20년동안이나 외삼촌에게 속아 종살이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조차 보지 못하고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자기를 죽이려 쫓아다니는 사울왕을 여러 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결국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인내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내를 통해 연단을 받고 연단을 통해 온전한 성도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 영혼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인내, 오래참음의 열매입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약 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를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의 재림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양이 떠오를 때가 가장 어두운 것처럼 지금이 가장 어두울 때입니다. (사 60: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들이 추수 때를 기다림같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충성되이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이 성숙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서로 뭐하지 말라?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래참음의 실재는 원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바라보고 참고 참고 또 참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심판의 날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더 인내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탄이 온갖 방법으로 성도들 시험합니다. 흔들어 봅니다.
정말 믿음을 지키고 오래참고 있는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막 화를 내며 자기를 절제하지 못하는지 지켜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십자가의 도를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왔을 때,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서 가기 위해서 지나야 할 과정은 바로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이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10번이나 원망했습니다. 그 원망 때문에 광야의 행진이 늦추어지고 연합이 깨지고 그들의 광야의 여행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여행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가나안의 축복된 비전을 바라보고 광야의 여정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갔다면 그들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도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 농사라 하지 않습니까? 꿈을 심고 기도를 심고 거두는 것도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신앙이 자라고 성숙한 것도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너무 쉽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남편, 내 자식 신앙이 더디 자라는 것 같다고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는 것,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부의 심정으로 참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내가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인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자기를 처서 복종하는 것이 바로 오래참음의 열매입니다.
2. 선지자들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10절).
10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선지자들의 무엇을 본받으라고 했습니까? 고난과 오래참음입니다. 왜 선지자들에게 고난과 오래참음이 필요합니까?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듣기에 거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붙잡혀가서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이 많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의 삶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고난과 오래참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고난중에 오래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런 믿음의 선진들의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노아가 방주를 짓습니다. 아직 비가 온다는 징후나 어떤 싸인도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닷가 근처가 아니라 산꼭대기에다 부지런히 방주를 짓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비난과 조롱과 핍박을 했겠습니까? 남이 뭐라고 그래도 그것 때문에 그 사람들과 싸우거나 다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만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참음이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모세를 보십시오.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그렇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가나안을 향해서 나갑니다. 그가 백성을 인도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이 백성들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우리를 죽일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홍해앞에서 우리를 매장하려고 하느냐?" 그러나 모세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힘들 때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가 수많은 난관 앞에 장애물에 부딪칠 때마다 그는 단순히 그 상황, 그 환경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해서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여전히 나를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도를 믿고 신뢰하고 모세는 참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이런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핍박과 역경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보여준 오래참음이었습니다.
(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고난이 올 때 나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뒤틀릴 때도 여전히 주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오래 참음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11).
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잘 아시는 대로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있는 소중한 것들을 하루아침에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열명의 자식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아내도 멀어졌습니다. 친구도 멀어졌습니다. 그런데다 고난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욥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내했습니다. 왜 인내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욥은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억울한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욥이 고난받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게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처럼 주 앞에 나올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욥은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대한 축복된 마지막 결론을 믿은 것입니다. 지금은 고통이지만, 지금은 아픔이지만, 지금은 어둠의 시간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마치 바울의 고백처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무엇을 이룹니까?
선을 이룹니다. 지금은 고통이지만, 지금은 역경이지만, 지금은 내가 오해받고 있지만, 지금은 시련의 한복판 속에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내 인생에 플러스를, 내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내 인생에 유익을 가져오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 축복된 결말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욥이. 그것 때문에 인내한 것이에요.
이 결론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선을 믿는 사람,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욥은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승리자로 우뚝 섰습니다. 우리가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을 비판했던 친구들을 하나님이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너희들의 말은 정당하지 못하다. 욥은 정당하다.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고 그의 모든 축복이 회복되는 모습을 볼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지금 이 사건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래참음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고 따르는 자는 결코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때가 ㅎ바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인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앞에 엎드릴 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바로 오래참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오래참습니다. 하나님께 주권을 맡깁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으로 사람으로 오래참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