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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시편 121:1~8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를 보면 표제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이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게 됨을 노래하는 시라고 합니다. 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하러 가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여러 시편을 읽어 본 결과 첫 번째 주장이 퍽 자연스럽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많은 성도들이 즐겨 읽는 시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시편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면서 어떤 무명 시인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제목을 ‘여행자의 노래’라고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길을 떠나기 전에 이 시편을 읽고 기도 드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옛날 아프리카에 선교를 위해서 나서게 된 데이빗 리빙스턴도 혼자 자기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 저 흑암대륙을 향하여 갈 때 가족과 함께 이 시편을 읽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찬송가 73장에도 이 시편의 내용으로 된 것이 있어서 우리가 자주 부릅니다.
1.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산악이라
날 돕는 구원 어디서 오나 그 어디서
하늘과 땅을 지은 하나님
날 도와 주심 확실하여라
2. 너 가는 곳에 주가 따르사 지키시며
졸지도 않고 깨어 계셔서 지키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쉬지도 않고 살펴 주신다
3. 하나님 너의 보호자시니 지키시며
네 오른편에 그늘 되시어 가려 주사
낮에는 해가 상치 못하며
또 밤에 달이 해치 못한다
4. 하나님 너의 영혼 지키사 돌보시며
네 몸에 화가 없게 하시고 지키신다
이 날로부터 영원 무궁히
주 너의 출입 지켜 주시리 아멘
이 시인은 눈을 들어 산을 봅니다. 산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지으시고 삼라만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실족하는 법이 전혀 없으십니다.
더구나 옛날에는 길을 갈 때 거의가 걸어 다녔기 때문에 실족치 않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항상 택한 백성을 돌봐 주시는 것을 찬송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우리 우편에서 그늘이 되셔서 낮에 해가 아무리 뜨거울지라도 길가는 사람을 좋은 그늘로 덮어 주는 것처럼 그 택한 백성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밤에는 달이 상치 아니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막지대는 건조하기 때문에 낮에 해가 쬐일 때는 말할 수 없이 뜨겁지만 반면에 저녁 때 해가 져서 밤이 되면 너무 추워서 못 견딜 정도가 되므로 이렇게 밤에 추워지는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위험한 지대를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도 주님이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육신만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도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히 지키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희망적이고 승리 적인 말로 이 노래를 마친 것입니다.
여기에 ‘너의 출입’이라고 한 말은 아마 우리 인간 생활의 전부를 말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생활은 아침에 집을 나가서 여러 가지 일을 보고, 그리고 저녁에 집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으로, 장사하시는 분은 장사 터로, 사무원은 사무실로, 기사는 공장으로, 의사는 병원으로, 학생은 학교로 이렇게 나가서 일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는 것도 지켜주십니다. 저녁이 되면 다 집으로 돌아옵니다. 가정에 와서 생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십니다. 밤에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어 평안히 쉴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생활 전부를 지켜주시는 것을 이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우리가 읽어보는 대로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지키시는 자시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로다” 이렇게 아마 여섯 번인가 반복되어서 ‘지키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시편을 읽을 때 우리가 아름다운 시라고 감탄은 하면서도 얼른 수긍이 가지 않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기에 대해서 한두 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밤과 낮으로 우리의 출입을 지켜 주신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지켜 주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그의 백성, 그의 양에 대해서만 특별히 이와 같은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가령 시편 91편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라야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살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극히 높으신 자,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택함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호의 그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시를 읽을 때 한 가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우리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을 밤으로 낮으로 지켜 주신다면 왜 믿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 그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견지와 사람의 견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선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영혼을 보시는데 사람은 그와 반대로 육신을 봅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심지어 믿는 사람까지도 잘 산다는 표준을 육신적인 면에 두기가 쉽습니다. 돈 많아서 좋은 집 쓰고, 큰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값진 음식 먹으면 잘 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보이는 면, 육신적인 면입니다. 혹 어떤 이는 돈도 명예도 자식도 권력도 다 소용없고 그저 건강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돈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답답합니다. 권력이 없으면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건강이 없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그 영혼이 죽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우리의 영혼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육신에 큰 재난이 오게 할 때가 없지 아니합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에게는 육신에 고통을 줄 정도로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가 무엇이었는지는 누구도 확실히 모릅니다. 하여간 그 육신에 고통을 주는 것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육신의 가시, 이 고통을 제거시켜 달라고 세 번,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무엇이었어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했습니다.
그는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약한 데가 없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인간적으로 말하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그 당시의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종교적으로 동년배의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예수를 믿게 되어서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고를 다한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체험으로도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서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모르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내세우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이 그에게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육신의 가시를 주었고, 그에게 고통을 줌으로 자신의 약함을 의식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바울이 되는 데에는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육신의 가시가 준 영향이 아주 크다고 봅니다.
성 프랜시스의 경우도 그가 육신의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새 사람이 되고 인류역사에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파스칼 같은 분도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밀턴 같은 분이 실명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 그의 영혼의 눈이 밝아지고 ‘실낙원’이란 유명한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존 번연이 그의 신앙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 오랜 세월 고생하는 경험이 없었다면 천로역정과 같은 책을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들은 언제든지 육신을 먼저 보고 그 편을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심령의 편을 먼저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에는 로마서 8장 28절에 있는 말씀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재난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우리 심령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축복인 것을 차차 발견하게 됩니다.
과수원을 경영하시는 어느 성도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수원을 처음 할 때는 별로 경험이 없어서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달리는데 너무 소담하고 보기도 좋고 해서 그대로 두었더니 나무는 나무대로 상하고 열매는 상품의 가치가 없이 되는 것을 보고 아무리 아까워도, 손해가 나는 것 같아도 풍성한 과실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미리 따 버려야 한다고 하셔요.
이 진리는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말하자면 전정을 합니다. 나무자체로 볼 때는 가지가 잘라져 나가는 것이 손해요, 아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야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은 육신만 먼저 볼 뿐더러 사람은 언제나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를 같이 보십니다. 사람은 현세만 보고 내세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세와 내세를 같이 보십니다.
전에 꿈의 소년 요셉이 그 형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갈 때 “아,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렇게 지키시는가?” 하고 의심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된 일을 가만히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갈 때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꼭 같이 계시고 그를 지켜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기 모세를 세상에 난 지 석 달만에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변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이란 청년은 양심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다가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지켜 주셨기 때문에 사자가 그를 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다리오 왕이 이 사실을 보고 다니엘을 더 귀하게 여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택하심을 입은 사람도 어려운 일을 당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을 지키십니다. 평안할 때만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곤경에서도 지키십니다.
1.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후렴 :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2.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3.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4.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그런데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글쎄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한 사람, 큰 사람들을 그렇게 지키시는 것이지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까요?” 이런 의문을 품으신 분이 혹시 안 계십니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참새 다섯 마리가 엽전 두 푼에 팔리는 것을 아느냐 그러나 이 참새 한 마리도 내 아버지께서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너희는 이 참새보다 얼마나 귀하냐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털까지도 세시느니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믿습니까? 하나님께는 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 눈에는 그의 자녀이면 누구나 다 귀하고 위대하고 보배롭고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가 택한 자이면 이렇게 지켜 주십니다. 그러면 ‘지킨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키는 사람은 자세히 봅니다. 살핍니다.
그 대상을 언제나 잊어버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택한 백성을 지키십니까?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언제든지 택한 백성을 살피고 잊지 아니하십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고 지키는 것처럼, 어머니가 아기를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고 지키십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수라
우리가 괴로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처했을 때에도, 유혹에 빠졌을 때에도, 고독 속에서 탄식할 때에도, 시험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살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아니 이럴 때일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십니다.
둘째로, 지킨다는 것은 인도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지킬 때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어디로 인도합니까? 푸른 풀밭이 어딘가? 잔잔한 물가가 어딘가? 혹시 어디서 이리가 오지 않나? 어디 위험한 곳이 없나? 모든 것을 살펴서 그 양을 안전한 곳,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때는 캄캄한 골짜기,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으로 지나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하시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갈 때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모세가 나일 강변에 던지울 때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잡혀간 것도 하나님의 인도요,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택한 백성이 갈 길을 항상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금년 일 년, 아니 우리의 평생을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지킨다는 뜻은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보호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수가 올 때 어떻게 하든지 물리칩니다. 이리가 올 때 목자는 생명을 걸고 싸워서 물리칩니다. 지킨다는 것은 이렇게 방비한다는 뜻과 보호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뜻을 여러 가지 상징적인 말씀으로 시편에 기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라, 피난처시라, 반석이시라, 방패시라, 구원의 뿔이시라, 우편의 그늘이 되신다, 여호와의 날개 등 이 모든 표현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여 주신다고 하는 뜻을 가르쳐 준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신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넷째로, 지킨다는 것은 공급해 준다는 뜻도 있습니다.
목자가 무엇 때문에 양을 풀밭으로 인도합니까? 양은 푸른 풀을 뜯어먹어야 살이 찌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무엇 때문에 그 양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합니까? 물을 마셔야 잘 자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이렇게 공급하여 주십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목이 마를 때 반석에서 생수가 솟게 하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어할 때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 로뎀나무 아래서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떡과 물을 주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외로운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걸어 갈 때 어떤 때는 우리의 심령이 굶주리고, 기갈해지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럴 때 그 택한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의 교훈만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성도들의 경험이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옛날 아브라함에게 한번 물어 보세요. “아브라함이여,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생을 지켜 주셨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그분은 분명히 대답할 것입니다. “예, 그렇소. 내가 나의 일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분명히 지켜 주셨소.” 이삭에게 물어 보세요. 야곱에게 물어보세요. 요셉에게 물어보세요. 모세에게 물어보세요. 다윗에게 물어보세요. 엘리야에게 물어보세요. 엘리사에게 물어보세요. 모든 선지자에게 물어보세요. 이구동성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도 똑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야곱에게, 요한에게, 바울에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 뿐 만 아닙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과연 참된 신앙생활을 한 모든 성도에게 물어 보세요. 어거스틴, 루터, 칼뱅, 토마스 아퀴나스, 성 프랜시스 이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과연 내 일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은혜로 지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역사적인 인물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신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이들도 똑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지켜주십니다. 어머니가 어느 때 그 어린 아이를 잘 지키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아이가 위험한 곳에서 놀거나 무슨 병에 걸리게 되면 더 가까이 마음을 쓰면서 지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위험할 때 하나님이 더 가까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택하심을 입은 여러분, 우리는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하나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데 왜 염려합니까?
과연 이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이런 세상에서도 두려움 없이, 염려 없이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위험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에서 지켜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혹시 어떤 분은 “내가 이렇게 아직 젊었으니 하나님이 잘 지켜주시고 또 내가 잘 믿을 수 있지만 이후에 늙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시는 분도 없지 아니합니다. 이사야 46장 4절 말씀을 기억하세요.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백발이 될 때까지 아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켜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자!
(시 121:1-8)
그렇게도 사람들을 요란스럽게 했던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것은 우리들에게 신선함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새롭다는 것과 낡았다는 것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실은 지난 2002년이나 지금 2003년이나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동에서 해뜨고, 서에서 해가 집니다.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역시 저와 여러분은 한국사람이고, 서울시민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어 동해로, 동쪽으로 해를 보러 달려가게 만들었던 2003년 새해!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그대로입니까?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정치권이 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물결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해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지만 시대는 새로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움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결코 시대에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새로운 정신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시대가 변했는데 우리 신앙도 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눅5:38절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고, 엡4: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독수리형, 황소형, 풍선형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독수리형이란 높은 목표를 정하여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인간형입니다. 독수리가 하늘로 치솟기 위해서는 작은 새는 견딜 수 없는 세찬 바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때로 고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독수리같이 주를 앙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고통과 맞서 싸울 때 우리의 신앙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황소형은 인생을 진흙탕에서 싸움을 하듯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용기가 있어 보이지만 높은 이상을 품지 못하며, 열정적인 것 같지만 방향 감각이 없어 무모하기만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하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풍선형의 인간은 더욱 허망합니다. 무게가 없는 풍선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다닙니다. 이처럼 풍선형의 인간은 인생의 확실한 방향도 없고 주체성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이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즉흥적이고 무분별하고 아무런 문제 의식도 갖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성림교회 성도들은 모두 독수리형의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자기만 위해서 사는 황소형이 아니요, 목적 없이 떠다니는 풍선형 인간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제목소개▶
1977년에 우리 나라 등반대원들이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에베레스터산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등반대 대장인 김영도씨는 교회 집사였지만 다른 대원들은 모두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출발 전에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출발하는 저들의 마음속에 이 성경 말씀이 한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김영도 대장의 사모님은 대원들에게 성경책을 한 권씩 나누어주어 그들은 그 성경책을 지니고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등반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28일만에 에베레스터 산을 정복했습니다.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 드디어 고상돈 대원이 산 정상에 태극기와 네팔기를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성경책을 꺼내 서울을 떠날 때 목사님께서 읽어 주셨던 시편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경책을 눈 속에 파묻고 내려왔습니다.
그 후에 김영도 대장께서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에베레스터 산을 정복한 것은 우리의 의지나 기술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요, 말씀의 힘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삽니다. 남을 도와주기도 싫고, 남에게 도움을 받기도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의존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선배와 형제, 친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남편의 도움, 혹은 아내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았고, 현재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를 개혁하려고 나셨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쳐서 낙심하고 절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마음에 평안함과 위로를 얻어 그 어려운 종교개혁을 이뤄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돕고 계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지금도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어렸을 때, 한 번은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깊은 곳으로 밀려가서 익사 직전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정원사의 아들이 용감하게 강물에 뛰어들어 처칠을 구해 주었는데, 처칠의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너는 내 아들의 은인이다. 네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모두 부담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원사의 아들은 처칠의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서 열심히 공부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처칠도 장성해서 정치가가 되어 영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처칠이 어느 날 그만 급성폐렴에 걸려서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한 사람이 폐렴치료의 최고 권위자 한 사람을 소개해 주어 그 의사는 의식불명의 처칠을 말끔히 치료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사는 바로 어렸을 때 강물에서 자기를 구해주었던 정원사의 아들 '알렉산더 플래밍'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플래밍은 처칠의 아버지가 은혜를 갚기 위해 지원해 준 학비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는데, 그는 백신 연구에 종사하여 페니실린을 발견해서 많은 사람에게 치료의 효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다시 한 번 처칠이 생명을 구해주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도움을 주기는 하면서도,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로서 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중에 우리의 모든 사업에 참여하시는 '조용한 동업자'이십니다.
시46: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시146:3-5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오직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쓴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 시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이 시가 불려졌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짐승의 공격이나, 강도의 습격이나, 질병이나,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바라며 이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현재 가고 있는 목적지까지 무사히 함께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나그네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 길이 험하고, 짐승이나 강도의 공격이 있고, 온갖 어려움과 위험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도움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산은 ①고난과 역경일 수도 있고, ②낙심과 절망일 수도 있고, ③ 좌절과 패배일 수도 있고, ④인생의 문제, 즉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도 '절망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성숙은 인생의 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인생은 성숙해 지고 신앙도 뜨겁게 됩니다.
진정한 감사,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은, ①건강을 잃은 환자만이 건강의 행복을 알고, ②가난과 추위 속에 떨어본 사람만이 한 칸 방의 고마움을 알고, ③죽음의 선고를 받았던 사람만이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고 은혜가 되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만나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인생의 산을 만나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사람이 역경 중에서는 누구나 도움을 찾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 권세에서 도움을 찾으려고 정치적 빽을 찾아 나섭니다. 얼른 보면 그것이 제일 해결할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인 듯 합니다.
지금은 누구나 해외 여행을 마음만 먹으면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권을 가지려면 반드시 신원조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신원조회가 떨어져야 여권 수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신원조회를 담당했던 부서가 중앙정보부 이었습니다. 중정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신원조회가 나오지 않아 난관에 부딛혀 있을 때, 거기서 한번 전화만 한통화 해 주면 당장에 해결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인 권세를 의지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처럼 무상한 것도 없습니다. 권좌에 있던 사람들의 물러난 후에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아침에 그런 줄은 썩은 동아줄 같이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또 사람들은 힘들 때 때로는 재물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물론 재물의 힘은 놀라운 힘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인생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인생의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의 얘기를 은유적(隱喩的)으로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보이면서 "이 중 아흡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에만 독약이 들어있는데 열 개중 하나를 마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돈 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아 드디어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 딱 한번만 하는 거야, 이번 한번이면 평생을 고생 안 해도 될 테니까"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진땀을 흘리며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아찔했습니다. 곧 청년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내가 살았구나!..."
사탄은 청년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언제라도 남은 9개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곱으로 주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면서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청년은 오랜 방탕생활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다시 반복하여 사탄을 불러내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고민을 했으나, 나중에는 어느 병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덧 청년은 백발이 되었습니다. 이제 딱 두 병이 남았습니다.
노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노인은 마침내 마지막 잔을 마셨습니다. 노인은 끝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노인은 순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탄은 남은 마지막 잔을 훅 하고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독약이란 없었다.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나의 독약에 이미 죽어가고 있어. 나는 너의 청춘을 망가뜨렸지.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돈만 아는 최고의 바보로 만들었지. 너는 이제 영원히 죽게 될 거야" 이렇게 말하고 사탄은 유유히 웃으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우리로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까? 세상의 모든 의지하는 줄은 끊어질 줄들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튼튼한 것 같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뿐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의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는 뜻인데,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도움의 종류는 적군의 손에서 구해주는 군사적인 도움과 고아나 과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곤경에서 구해주는 비군사적인 도움이 있습니다.
이런 도움은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어야 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3-4절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실족'은 히브리어 '모트'로 '비틀거리다, 흔들거리다, 미끄러지다'는 뜻인데,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발을 잘못 디디거나 행동을 잘못하여 재앙이나 혼란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 길을 가다보면 구덩이가 있기도 하고, 낭떠러지가 있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는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는, 구덩이나 위험한 곳에 미끄러져서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족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또한 시험과 유혹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신32:10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신경구조로 되어 있는 눈동자는 신체 중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입니다. 이물질이 들어가면 금방 반응을 하기 때문에 눈동자에 위험한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눈썹과 눈꺼풀과 눈물샘이 주위에서 보호해 줍니다.
눈썹과 눈꺼풀과 눈물샘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눈동자를 보호하듯이, 하나님은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시40:2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우리로 견고하게하여 넘어지거나 실패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진리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머뭇머뭇해서는 안 된다. 곁길을 조심하고, 게으른 걸음을 경계하며, 똑바른 걸음으로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어딘가 가야 할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①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②길을 안내하는 안내자가 있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의 모든 과정을 잘 인도해 줄 좋은 안내자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③보호자가 필요합니다. 길을 갈 때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보호해 줄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길이 험하고, 마음이 지쳐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지고, 병에 걸리고,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전쟁터에서 한참 교전 중일 때, 앞장섰던 한 병사가 적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서 부상당한 병사는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누구든지 뛰어가서 저 병사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지만, 모두 무서워서 아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시계를 보더니 "소대장님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참호에서 뛰쳐나가 부상당한 병사를 업고 달려왔습니다.
교전이 끝나고 소대장이 "자네는 어떻게 담대하게 뛰어나갔는가?" 하고 묻자, 이 병사는 "제가 뛰어나간 그 시간은 바로 제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호해 주시는데 무엇을 무서워 하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기도가 자녀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백성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되 가족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나라가 민족이 실족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5-6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해'와 '달'의 해(害)를 받았습니다.
해는 그 빛이 아주 강하게 내려 비치기 때문에 샘의 근원을 마르게 하고, 사람의 머리에 쬐어서 일사병에 걸리게 합니다. 일사병에 걸리면 열이 나고, 숨이 막혀서 즉사하거나 속히 죽기 때문에 사막의 여행자들은 일사병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또 달빛 아래서 잠을 자다가 해(害)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낮의 열기가 밤에는 극도로 추운 냉기로 변해서 달빛을 받고 잠을 잔 사람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는데, 좀더 심하면 정신이상이나 간질, 열병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월사병(月斜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낮의 해와 밤의 달을 피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낮이나 밤이나 우리의 그늘이 되어주셔서 이러한 피해를 당하지 않게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13:21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하시니"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 서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뒤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 아래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멈추시면 우리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시23:4절에서 다윗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 죽음 가운데에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중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많은 범죄와 사고와 위험이 있습니다. 매일 메스컴에서 전해지는 소식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건과 사고, 위험과 재난이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면 불안 속에서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의 해가 상치 아니하고, 밤의 달도 해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7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재앙, 기근, 질병, 슬픔, 악한 일' 등 인간이 당하는 여러 종류의 고통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우리는 재앙이나, 기근이나, 질병과 가난, 슬픔, 불행한 일들을 당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난을 면케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해악과 고통들로부터 보존해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시27:5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草幕)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시138:7절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出入)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출입'은 밖으로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데, 한 사람의 전 생활 영역에서의 모든 삶과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출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영원히 지키고 보호하시며 복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면, 가정에 들어와도 화목하고 평안하고 나가서 일하는 직장과 사업장에서도 형통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축복과 은총을 주십니다.
신28:3-6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모든 복이 임하는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삶을 다 주장하고 계시며, 우리가 어떠하든지 은총과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되 갑절의 축복을 주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실족지 않게 하시고, 낮의 해가 상치 아니하고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보호하시고, 모든 환난을 면케하여 영혼을 지켜주시고, 우리의 출입을 영원까지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고난과 환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여 승리하고 축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