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晉州市) ‘진주 도중에 Ⅰ‘ 한시(漢詩)편 1.> 총13편 中
진주시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서부에 있는 시이다. 1995년 진양군과 통합시를 이루었다. 역사·문화·예술·교육의 도시이자 경상남도 서부의 중심·거점 도시이며, 자연적·역사적 관광자원이 풍부한 관광도시이다. 면적 712.95㎢, 인구 344,426명(2015년)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진주가 정치적·경제적·행정적인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왔다. 진주의 별호는 진강·청주·진산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6년에 경상남도의 진주군이 되어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1925년 이곳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고 부산의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진주는 예전의 지위와 위세를 잃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경상남도 서부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계속하면서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에 진주시가 되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진양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해왔던 진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진주시가 되었다
1) 진양 도중에[晉陽途中] / 신채(申埰 1610∼1672)
江南海北路悠悠 강남 길 바닷길도 하염없는데
歲暮天涯遠客愁 해 저무는 하늘가서 시름겨운 나그네
矗石樓前回首望 촉석루 앞에서 머리 돌려 바라본
咸州今日是幷州 고향 함안인데 오늘은 이곳이 병주(幷州)이리.
[주] 병주(幷州) : 정이 들어서 마치 고향처럼 느껴지는 타향을 말한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에 “병주의 나그네살이 십 년이 지나도록, 밤낮으로 고향 함양에 돌아가고 싶었어라. 무단히 다시금 상건수 물을 건너니, 돌아보매 병주가 바로 고향처럼 느껴지더라.〔客舍幷州已十霜 歸心日夕憶咸陽 無端更渡桑乾水 卻望幷州是故鄕〕” 한 데서 유래하였다.
2) 진양 도중에[晉陽道中] 二首 / 임진부(林眞怤 1586∼1658)
吾東列邑晉陽優 우리나라 여러 고을 중에 진양이 뛰어난데
文物繁華孰比侔 문물의 번화함을 그 누구와 비교하랴
堪歎向來兵燹後 임진 난리 때 전쟁으로 불타 버린 일에 탄식하면서
騰凌惟見盡戈矛 다만 기세등등했던 모든 창칼을 떠올린다네.
屯亨一理自相承 둔형시(屯亨詩)의 그 이치에 따라 절로 계승해나가니
幸見河南道復升 다행이 하남 땅에 도가 회복되어 태평해졌다.
輕重旣知分內外 이미 경중(輕重)을 알진대 일을 안팎으로 분별해야하며
舍魚從此戒春氷 물고기를 버리듯(舍魚), 이로부터 봄철 얼음을 경계해야한다.
[주1] 둔형시(屯亨詩) : 《주역(周易)》 〈둔괘(屯卦)〉에 “둔은 크게 통하고 곧아야 이롭다. 〔屯之亨利貞〕”라는 내용을 읊은 시이다. 진룡(震龍)이 감수(坎水)를 얻어 험난을 극복하고 등룡(登龍)한다는 뜻이다.
[주2] 사어(舍魚) :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 요리도 내가 먹고 싶고,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다. 하지만 한 가지만 택하라면, 나는 물고기를 버리고[舍魚]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나는 살고도 싶고, 의리를 행하고도 싶다. 하지만 한 가지만 택하라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택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3) 진양 도중에 들매화를 읊다[晉陽途中詠野梅] 1611년 봄(辛亥春) / 조임도(趙任道 1585∼1664)
野外梅花草裏開 야외의 매화꽃이 잡초 속에 피었는데
細風吹送暗香來 솔바람이 불어 은은한 향기 풍겨오네.
世人不貴和羹實 세인들은 국에 넣는 열매가 많아 귀함을 모르니
誰肯移渠近地栽 누가 가까운 도랑으로 옮겨 심으려 하랴.
4) 주주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晉州有感]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郡邑隣滄海 고을은 너른 바다 인접하였고
樓譙壯晉陽 성곽도 장엄할손 진양성일레
冥冥瘴雨暗 장기 어린 빗줄기에 날이 어둡고
渾渾暮江長 저물녘의 긴 강물 넘실거리네
戰伐餘天塹 천연 요새 전쟁의 흔적이 남아
經行問國殤 거쳐가며 순국 선열 위문한다오
城陰駐馬久 성 그늘에 한동안 말을 멈추고
感慨欲霑裳 감격에 겨운 눈물 마냥 흘리네
其二
慷慨黃兵馬 기개도 높을시고 황 병사라면
詩書金健齋 시서도 능하였던 김건재로세
孤城多義士 외론 성에 모여든 많은 의사들
百戰蔽江淮 남강 물 뒤덮었던 장렬한 전투
嶺石名兼壯 산마루 바위 함께 이름 장하고
川霓氣不埋 물위의 무지개에 기개 서렸네
時危懷往烈 때 급하면 선열을 그리는 건데
誰與數公偕 이분들 뒤따를 자 누가 있을꼬
[주1] 황 병사(黃兵使) : 황진(黃進)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신분으로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9일 동안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주2] 김건재(金健齋) : 진주성에서 순절한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을 가리킨다.
5) 진양 옛 전쟁터를 지나가며[過晉陽戰塲] / 이준(李埈 1560∼1635)
隴草蕭蕭隴雨昏 밭두둑의 잡초 쓸쓸하고 비가 내려 어둑한데
忍看殷血尙留痕 아직도 흥건한 피의 자취 남았으니 어이 차마볼꼬
欲將千斛南江水 천 섬 남강의 맑은 물을 퍼부어
洗盡沙塲不盡冤 모래사장에 묻힌 끝없는 원한을 모조리 씻었으면.
<경남 진주시(晉州市) ‘진주 도중 회포Ⅱ‘ 한시(漢詩)편 2.> 총13편 中
경남 진주시는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이 이곳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어 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가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 거타주가 설치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685년(신문왕 5)에 청주로 고쳐졌고,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의 하나인 강주도독부가 되었다. 고려초에 강주(〈대동지지〉에는 진주라고 기록함)로 개칭했으며, 983년(성종 2)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초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고려초에 강주(〈대동지지〉에는 진주라고 기록함)로 개칭했으며,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에는 정해군이라 하고 절도사를 두어 산남도에 속하게 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고쳤다가 1018년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이때 강성군(단성)·하동군을 속군으로, 사주현·악양현·영선현·진해현·곤명현·반성현·의령현을 속현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초인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진주가 정치적·경제적·행정적인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요지임이 확인됨에 따라 1603년(선조 36)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왔다. 진주의 별호는 진강·청주·진산이었다.
6) 진양 도중에[晉陽途中] 二首 / 조임도(趙任道 1585∼1664)
二月將闌三月廻 2월은 장차 다하고 3월이 돌아오니
梅花欲謝杏花開 매화꽃이 지려는데 살구꽃이 피려하네.
不知底事離慈母 무슨 일로 어머니와 이별했는지 알지 못해
遍踏頭流山下來 널리 돌아다니다가 두류산 아래까지 왔다네.
遙思慈母倚閭懷 어렴풋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문에 의지하는데
遊子羈愁不可裁 객지에서 떠도는 나그네 시름에 글을 지을 수도 없구나.
十一平朝辭別後 십일 날 새벽녘 깨끗한 마음으로 고별한 후에
算來今復一旬廻 오늘 다시 헤아려보니 열흘이나 흘러갔구나.
7) 진주 도중에[晉州路中] / 김창집(金昌集 1648∼1722)
千山萬水路茫茫 수많은 산과 여러 갈래의 내, 길마저 아득한데
老病何堪撼頓長 긴 여정에 늙고 병들어 지친 몸을 어찌 감당하리오.
愁見瘴雲迷桂嶺 근심스럽게 바라본 먹구름이 계수나무 고개를 미혹하지만
喜聞賓雁叫衡陽 기쁘게도 기러기가 형양(衡陽)에서 부르짖는 소리 들리네.
蘭芳自信平生節 난초의 향기는 평생의 절조로 굳게 풍기는데
荊棘誰開此路荒 누가 가시나무를 이 거친 길에 늘어놓았나?
莫說島中風土惡 섬 안의 고약한 풍토에 대해 말을 마시게.
甘泉屢閱逐臣嘗 맛 좋은 샘물을 쫓겨난 신하가 여러 번 맛을 보았네.
[주] 형양(衡陽) : 중국 호남성의 형양(衡陽)시는 성도 장사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철새인 기러기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돌아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8) 오대사 주련에 쓰다[題五臺寺柱] 진주에 있다(在晉州) / 조식(曺植 1501~1572)
名字曾羞題月脇 이름자를 산기슭에 쓰기를 일찍이 부끄러워했고
笑把蚊觜下蟬宮 변변찮은 입 갖고서 웃으며 절간에 들었네
人緣舊是三生累 예로부터 사람의 인연은 삼세(三世)에 얽힌 것이니
半日歸來擬赤松 한나절 만에 돌아오며 적송자를 떠올리네.
자신이 살던 진주 인근의 절인 오대사에 들어서 사람의 인연이 전생과 현생, 내생에 걸쳐 있다는 삼세의 세계관을 전제로 하여 신선의 이름까지 언급하고 있는 남명을 통해 우리는 그가 단순한 유자가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과 도가의 세계관을 모두 섭렵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9) 봉명루[鳳鳴樓] 진주에 있다(在晉州) / 조식(曺植 1501~1572)
岐下遺音屬有樓 기산 아래 남은 소리 닿는 곳에 누각 있어
親賢樂利迄悠悠 어진 사람 가까이 하고 이로움을 넉넉하구나.
自從矗石新開宇 촉석루 따라 새 집 짓고 나니
六六鳴隨上下流 봉황새 울며 따르며 위 아래로 흘러간다.
10) 진주의 여사에서 홍춘사, 박춘포와 함께하다[晉州旅舍 同洪春史 朴春圃] / 황현(黃玹 1855∼1910)
剝啄聲高旅夢醒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그네 꿈을 깨고 보니
故人衣笠轉寒星 친구의 옷과 삿갓에 차가운 별빛 어리었네
名區剩有登樓賦 명승지엔 충분히 〈등루부〉가 있으려니와
弊店因爲擇勝亭 낡은 여관은 그대로 택승정이 되었구려
顔駟耐官頭欲白 안사는 요직 감당할 만하나 머리만 희어졌고
韓康逃世眼終靑 한강은 세상을 피하여 눈이 끝내 푸려졌네
淸狂不及山陰興 천진스러운 흥취가 산음의 흥엔 미치지 못해
今夜扁舟爲汝停 오늘 밤 일엽편주를 그대 위해 정박했노라
[주1] 경인고(庚寅稿) : 1890년(고종27), 매천의 나이 36세 때 지은 시고이다.
[주2] 등루부(登樓賦) :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일찍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적에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면서 진퇴 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를 지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후세에는 문인(文人)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또는 재능을 갖추고도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고사로 흔히 쓰인다.
[주3] 택승정(擇勝亭) : 소식(蘇軾)이 일찍이 여음(汝陰)의 수재(守宰)로 있을 때 유막(帷幕)만으로 정자(亭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곧 어디든지 가고 싶은 승경(勝景)이 있기만 하면 그곳에 가서 바로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곧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낡은 여관을 소식의 택승정에 빗대서 한 말이다.
[주4] 안사(顔駟)는 …… 희어졌고 : 《한무고사(漢武故事)》에 의하면, 안사라는 사람이 한 문제(漢文帝) 때에 낭관(郎官)이 되었는데,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무제가 한번은 낭서(郎署)를 지나다가 큰 눈썹에 하얀 머리털〔龐眉皓髮〕의 안사를 보고 묻기를 “늙은이는 어느 때 낭관이 되었는가, 어찌하여 그리도 늙었는가?〔叟何時爲郞 何其老也〕” 하자, 안사가 대답하기를 “신이 문제 때에 낭관이 되었으나, 문제는 문을 좋아했는데 신은 무를 좋아하였고,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경제는 미모를 좋아했는데 신의 얼굴은 추했고, 폐하께서 즉위하셔서는 젊은이를 좋아하시는데 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이 때문에 삼세를 불우하여 낭서에서 늙었습니다.〔臣文帝時爲郞 文帝好文而臣好武 至景帝 好美而臣貌醜 陛下卽位 好少而臣以老 是以三世不遇 故老於郞署〕”라고 하므로, 무제가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아 그를 회계 도위(會稽都尉)로 탁배(擢拜)시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5] 한강(韓康)은 …… 푸려졌네 : 한강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자는 백휴(伯休)이며 경조(京兆) 패릉(霸陵)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명산(名山)을 유람하면서 약(藥)을 캐다가 장안(長安)의 시중(市中)에 가져다 팔았는데, 30여 년 동안 값을 두 가지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한번은 한 여자가 한강에게 약을 사러 왔다가 약값을 깎아 주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공이 바로 한백휴입니까, 그래서 값을 두 가지로 하지 않습니까?〔公是韓伯休邪 乃不二價乎〕” 하였다. 한강이 속으로 탄식하기를 “나는 이름을 피하려고 했는데, 지금 하찮은 여인들까지 내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약을 팔아서 무엇하랴.〔我欲避名 今區區女子皆知有我 何用藥爲〕” 하고는, 마침내 패릉의 산중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조정에서 연달아 징소(徵召)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눈이 푸르다는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도사(道士)나 청춘소년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주6] 천진스러운 …… 정박했노라 : 진(晉)나라 때 산음(山陰)에 살던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날 밤에 큰 눈이 막 개고 달빛이 휘영청 밝은 것을 보고는 홀로 술을 마시면서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그는 즉시 거룻배를 명하여 타고 밤새도록 가서 다음 날 아침에야 대규의 집 문 앞에 당도해서는 그 집을 들어가지 않고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왕휘지가 대답하기를 “내가 본래 흥겨워서 왔다가 흥이 다해서 되돌아가는 것이다. 굳이 대안도를 만날 것 있겠는가.〔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何必見戴安道耶〕” 하고는 그대로 되돌아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안도(安道)는 대규의 자이다. 여기서 매천은 천진스러운 흥취가 왕휘지만 못한 탓으로 배를 돌려 그냥 되돌아가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붙들려 놀게 되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