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피아노 경연대회 중 하나인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라는 것이 있습니다. 2015년 제17회 폴란드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피아니스트 조성진 씨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결선 채점표가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총 17명의 심사 위원중 한 명이 조성진 씨에게 10점 만점에 단 1점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조성진 씨는 심사위원중 한 명에게 최저 점수인 1점을 받고도 총점 1등이 되어 우승을 차지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뜨고 나서 사람들은 해당 심사위원이 조성진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했고 어떤 신문 기자는 조성진에게 최저의 점수를 준 이유로 이 심사위원이 조성진 씨의 스승인 미셸 베로프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이 있어 사적 감정으로 이런 점수를 줬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점수를 받고도 정말 대단한 결과로 우승하게 된 조성진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 지 마태복음 기자인 마태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진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중 “놀랐다”라는 단어가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태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진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기록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에 대해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기서 ‘놀란다’는 것은 ‘외부의 다른 물체에 의해서 충격받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받을 때 충격을 받을 정도로 생각과 마음에 변화가 있는 기회가 없으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대일이기 때문에 남편 따라 아내 따라 부모님을 따라 교회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사람들은 시큰둥 들을 수 도 있고 딴 생각을 하면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내 신앙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 생활수준을 기준으로 말씀을 편견을 가지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짜 제자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놀라고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산상수훈 말씀을 들은 후 반응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 본문과 같은 반응이 항상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산상수훈 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반응, 첫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산상수훈의 말씀이 시작되기 전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놀랐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문자적인 해석을 살펴보면 “경악했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경악하다’라는 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경험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은 상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말씀을 들었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반응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랍다.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권위가 느껴지는 말씀이다”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산상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에 중요한 본질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르침 내용은 제자들의 마음과 공감대를 이루는 가르침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동안 듣고 배우고 생각했던 것들과는 반대 내용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스라엘 땅은 이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의식주 문제도 해결하기 힘들었고 자유도 가질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종교적인 부분은 로마의 어용 종교인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종교인들로부터 지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종교에 대해서는 자유로움을 줬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횡포를 저지르며 종교지도자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종교적 지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종교지도자들은 관습과 관례, 전통적인 종교행위를 지켜야만 참 신앙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 올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은 이런 가르침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 27절까지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귀한 가르침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그 동안 서기관들에게 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동안 사람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가품’ 말씀을 들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이제야 ‘진품’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들었던 말씀은 항상 ‘모세의 율법’이라는 틀 안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중 분명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전체에 비하면 일부분일 뿐인데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모세’가 최고의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거의 신적인 위치에 놓여서 이스라엘의 종교의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세오경을 포함한 모든 성경은 모세의 작품, 어느 인간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모세, 사무엘, 선지자, 심지어 신약의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성경의 기록자들이 성경의 저자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지키는 율법의 권위도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니 ‘경악할’ 정도의 충격적인 말씀을 듣고 이제 제대로 말씀을 이해하게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진품’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진품’일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존재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신데 이것이야말로 ‘진품중의 진품’ ‘완전한 원조’ 아니겠습니까? 모세도, 사무엘도, 다윗도, 여러 선지자들도 심지어 신약의 성경 기록자 제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고 말씀이신 예수님의 주권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드러났기 때문에 영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심판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말씀이었습니다.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한 좁은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삶을 온전히 다 드러내게 하셨고 사람의 마음까지 다 들통나게 만드셨습니다. 내 마음에 감추고 싶었던 것, 사실 내 속에 있었던 다른 마음, 사실 내 속에 있었던 음흉한 생각, 다른 의도와 모략, 미움과 정죄하는 마음, 비판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을 다 들켜버렸습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으니 그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앞에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고향 마을 나사렛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마가복음 6장 2,3절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말 깜짝 놀라며 ‘어떻게 이런 통찰력으로 말씀과 세상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대안을 제시하며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딱 맞아 떨어지는 말씀의 해석을 해줄 수 있는거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놀라움에도 그들은 어떤 결단을 합니까? “그 아버지는 목수고 그 엄마는 마리아고 그 형제와 자매를 우리가 다 아는데 그 집에서 뭐가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깜짝 놀라고, 경외할 만한 대단한 지혜를 보여줘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두 따르게 되지는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주시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각각 반응이 달랐을 것입니다. 정말 감탄하고 충격적인 말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고 떠나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 말씀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 엄청난 헌신에 대한 부담감, 그 천국에 대한 엄청난 기대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인생,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에 대해 그들은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요한복음 6장 67~69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이시고 그대로 믿고 따르기로 다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살 길을 가르쳐주신 것을 확신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확신하며 정말 예수님의 말씀에 매일매일 감동하고 매일매일 신기해하고 매일매일 깜짝깜짝 놀라며 그 말씀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해 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산상수훈 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반응, 둘째는 서기관 같지 아니한 권위에 놀랐습니다.
마태복음 7장 29절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당시 종교지도자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준 사람들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함부로 접할 수 없었던 그 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은 서기관을 비롯한 몇 몇 종교지도자들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어주는 것, 그들이 성경을 해석해 주는 것, 그들이 성경을 적용하며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그들이 말씀의 본질은 모르고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니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정의, 사회체제개선을 생각하며 엄정한 법 집행만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면 공의로운 사회가 될 줄 알았으나 인간의 기준과 능력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몰랐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사랑이 원수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했지만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와 경건이 하나님과 관계없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권위라는 단어의 원 헬라어는 ἐξουσία (exousía,에코우시아)입니다. 이 단어는 ‘왕권’, ‘통치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라틴어로 권위라는 뜻을 가진 단어 ‘auctoritas(아욱토리타스)’는 원래 “원제작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최초로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서기관에게 종교적 권위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서기관’이라는 사람들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문서를 쓰거나 기록된 문서를 필사했던 사람인데 복음서에서 “율법학자”라고 번역되어지는 경우에도 대체로 서기관을 뜻한다고 합니다. 종교분파로 따지면 바리새파, 혹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렇게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말씀으로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가르쳐주었던 바리새인들, 서기관의 가르침에 대해 확신했던 사람들이 그 가르침이 가짜였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들으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신데 육신으로 오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셨는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을 발견합니다. 원래는 창조주이시며 이 땅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완전하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문제 해결자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역경도 담대히 헤쳐 나갈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를 고쳐 주셨고 천국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사역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공생애는 당시의 제사장, 율법학자, 서기관들과는 너무나 확연히 차이나는 권위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예수님의 가르침, 더 본질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정말 무섭게 주님이 말씀을 적용하는 이유? 정말 지키기 어려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으로 배우며 자랐던 제자들에게 율법보다 더 무거운 내용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인간의 힘으로 완전한 참된 인생을 완성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나 법이 녹아버리는 하나님 사랑만이 예수의 십자가로 증거되어 생명의 영원성을 부여하시는 예수만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로마서 1절 16절에 ‘능력’이라는 표현과 17절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설명은 인간이 가지는 ‘의’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범위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것’으로 ‘사랑’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일단 능력으로 소개됩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의로움이라고 묘사하는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입니다. 옳은 것을 알 수 있지만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궁극적 죄인이기에 절대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 붙잡혀 죄의 행위만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며 은혜와 사랑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죄의 반대말이 은혜, 죄의 반대말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벗어나면 우리가 만나게는 되는 것은 선이라는 위치이기도 하지만 결국 은혜와 사랑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구원을 위하여 왜 은혜가 필요할까요? 우리 인간은 절대 죄를 벗어날 실력과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와서 죄인을 구해줘야 합니다. 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구의 은혜, 누구의 용서, 누구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우리 힘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 일 “은혜, 용서, 해방”을 예수님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흡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시고 걸을 수 있고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힘도 주셔야 이 땅의 삶도 살아갈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안 되는 속에서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실력으로 윤리적일 수 없고 법을 지킬 수 없는 이 현실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여 우리 모두가 동일한 형편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실천해야 할 것은 신앙인으로써의 자기 실천과 이웃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나, 너나, 우리나 세상 어느 누구나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존재, 오로지 예수님만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다 죄의 종, 죽음의 어둠의 자식, 결국 멸망에 떨어질 영혼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나 불쌍한 세상 사람들에게 참 생명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 또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로 불렸던 사람들의 가르침과 너무나 다른 권위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에 사실은 성경 전체에 드러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깊은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디모데후서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율법으로 치우치지 말고 그리스도의 피, 은혜 쪽으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향하길 소망합니다. 자기 중심, 썩어질 것, 헛된 것에 관심 갖고 살면 나중에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이해되지 않아도 그 말씀대로 따라 살아갈 때 최후의 승리를 경험하고 여호와 닛시 삶의 깃발되는 하나님을 체험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평생 소원은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한다고 고백하며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의 남는 생애 오직 그리스도로 결론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주의 복음만 있으면 모든 문제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권위, 복음의 권위에 순종하며 모든 문제의 답을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 오늘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이전에 생각했던 보편적인 종교적 생활이 아닌 진정한 말씀으로 충격받고 경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마다 저와 여러분의 눈에 빛이 번쩍이길 소망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나를 잘 아실까? 말씀이 어떻게 이렇게 나에게 와닿을까? 놀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바짝 들어서 다시 말씀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을 가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권세 있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더 큰 권위, 더 큰 권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배울 때 말씀의 권위와 권세에 굴복하는 마음과 삶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귀에 들리는 것,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마음과 영을 깨우고 마음과 영에 새겨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무리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 우리의 삶에도 말씀의 놀라움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며 감동하고 놀라며 신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찾아와 “놀라운 권위로 우리를 지배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