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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 김상윤 개인전 Fricative |
전시일자 : 2009. 2. 20 - 3. 11 |
전시장소 : 송은갤러리 |
전시작가 : 김상윤 |
기하학적으로 새로운 건반 소리 내기
글 : 강철(시각이미지전달자)
오늘날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음악과 미술 중에 어느 것이 우월하냐는 우문(愚問)을 제기할 필요는 없지만, 둘 중 어느 것이 사람을 재빠르게 감동시킬 수 있느냐는 쉽게 답이 나온다. 수분이 채 되지도 않은 멜로디와 노랫말 속에서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회화나 사진과 같은 시각 예술을 보고 나서 금세 몸에서 화학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의 과학적인 이유는 짐작컨대 태아 때부터 발달하는 오감(五感)의 순서가 청각(聽覺)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시각(視覺)이 오감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근원적이고 깊은 내면의 감각은 청각이지 않나 싶다.
music eye 프린트된 인화지, 캔버스에 락카페인트(설치작)360x200cm 2008
김상윤quartet 캔버스에 락카페인트163x130cm 2006
따라서 미술이라는 장르를 통해 음악적 감동을 전달하려는 예술가의 남다른 노력에 박수를 보낼 만하나 그 성과는 확률적으로 낮은 것이 사실이다. 즉 미술은 색과 형태로, 음악은 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음악적 요소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은 이미 20세기 초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쿠프카(Frantisěk Kupka),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들로네(Robert Delaunay), 클레(Paul Klee) 등 캔버스 내에서 ‘리듬’을 창조해내고자 많은 색과 음악적 형태를 캔버스에 한꺼번에 쏟아내 새로운 미술 장르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김상윤 작가는 이들 추상미술의 선배 작가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답습하는 것인가?
김상윤volume up캔버스에 락카페인트 120x70cm 2005
김상윤 fricative006 326x130cm 캔버스에 락카페인트 2009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추상미술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추상미술은 구상미술보다 소통 면에서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제대로 전달만 되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이유는 기억이나 경험 보다는 직관이나 무의식 따르는 회화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나 경험이 수반된 작품은 이해 범위는 넓지만 깊이는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직관이나 무의식을 다루는 작품은 접점(接點)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통’하게 되면 사람을 매우 깊게 감동시킨다. 예를 들면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나 고호(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 작품 앞에서 오늘도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기뻐하는 다수(多數)가 있는 반면, 마크 로드코(Mark Rothko) 작품 앞에서 조용히 울음을 터트리는 소수(小數)가 있다. 추상미술은 구상미술보다 개인의 내면(內面)에 훨씬 깊게 다가갈 수 있는 매력적인 미술 장르이다. 추상미술의 탄생 자체가 ‘순수’나 ‘본질’을 좇아 생겨난 장르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소통의 극단적 결과로 추상미술 작가는 거장(巨匠)이 되거나 아예 무명(無名)인 경우가 많다.
김상윤 fricative008 120x120cm 캔버스에 락카페인트 2009
김상윤a rhythm0708캔버스에 락카페인트 163x130cm 2007
김상윤 작가는 어쩌면 매우 어려운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추상 작업을 선보여 오해와 무관심 속에서 존재감 없는 작가가 될 수도 있거나, 한국 추상 미술사의 계보를 잇는 독보적인 작가도 될 수 있다. ‘모 아니면 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구상적 형태를 섞어 그려내면 관객과 이해와 교감에 어느 정도 성공하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처럼 손쉽게 일단 자신의 작업 세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의 길을 가고 있다. 절대 추상의 세계에 당당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작품을 그리는 김상윤 작가의 작품은 황금 비율의 안정감보다는 그의 음감(音感)을 간접적으로 보임으로써 그만의 ‘마찰음’을 표현하고 있다. 역동적인 표현에 적합한 곡선 대신 건반과 현(絃)의 튜닝 소리를 위해 수많은 직선(直線)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직선이란 작가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어려운 형태 요소이다. 왜냐하면 작가가 아무리 독창적인 직선을 만들어도 줄무늬(stripes) 형태는 그다지 ‘새로운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렵게 창조해낸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어디서 본 듯한’ 무미건조함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곡선을 활용했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작품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보다 독창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누구나 그을 수 있는 ‘객관적 직선’이 아닌 그의 손으로만 그릴 수 있었던 ‘주관적 곡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상윤 작가는 ‘색’과 ‘면 구성’ 그리고 ‘소재 선택’에서 더더욱 독창적인 방법을 고안해야 할 지 모르겠다.
music eye (측면)프린트된 인화지, 캔버스에 락카페인트(설치작)360x200cm 2008
음악이 미술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미술이 음악과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심오한 영혼을 고양할 수 있을까? 김상윤 작가의 작품이 추상미술의 뻔한 답습이 아니라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확실히 구축하려면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주적 관계를 정확히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몬드리안처럼 극도의 단순한 형태로 ‘보편적’인 방향으로 갈 지, 아니면 김상윤만의 다른 방향으로 갈 지 알 수 없지만, 최근 주류(主流) 미술에서 동떨어져 아무도 나서지 않는 추상 미술의 기근 현상 속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매력의 절대 추상미술의 세계를 김상윤 작가에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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