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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 제2강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 / 베드로전서 5:1-11
요절 / 베드로전서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Happy new year! 주님의 은혜 안에서 복된 새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베드로전서 1장부터 4장까지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진 나그네들, 즉 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오늘 말씀인 베드로전서 5장은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 성도들 중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방점을 두는 말씀입니다. 특히 고난을 내외적으로 겪고 있는 리더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고난의 때에 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굳게 서고, 특히 교회 리더들이 고난 앞에서 굳게 서서 자신들 뿐만 아니라 고난받는 성도들을 돕고 믿음에 굳게 서도록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내외적으로 주어진 고난들을 성도들이 어떻게 감당하고 극복해 가야 하는지, 고난 중에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장로는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연장자를 가리키는데 상대적으로 연륜도 있고 신앙 경력도 길어 다른 성도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데 가장 많이 수고한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지도자로서 권위를 지니게 된 사람입니다. 교회의 어른이면서 존경의 대상입니다. 당시 장로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고 영적 방향을 잡아 나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도 함께 장로된 자라고 말함으로 장로들의 영적 권위를 세워줍니다.
동시에 장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라는 말도 되겠지만 지금도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삶으로 생생히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지금 고난의 삶을 즐거워하며 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 든 장로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 나이 먹도록 계속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됐거든요. 지금까지 받은 고난으로도 충분해요. 뭘 더 받으라고요?” 이런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동료 장로이지만 지금도 어느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겁게 감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베드로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자기를 소개합니다. 곧 나타나고야 말 영광에 동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말씀처럼 영원하고 참된 하나님의 나라 산 소망이 생생하게 베드로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짧은 자기소개이지만 고난에 대해 어둡고 회피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고 오히려 미래의 영광을 지금 확신 있게 누리고 있는 사도의 기백이 풍겨납니다.
이런 사도 베드로가 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a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것은 장로들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사랑하면 내 양을 치라(요21:15-17)”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 즉 주님의 양들, 하나님의 양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며 말씀으로 일대일 성경공부, 때로는 그룹공부도 해주며 양들을 섬겼습니다. 어떤 양들은 잘 성장하여 기쁨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양들을 섬기면서 절망이 되고 낙심이 될 때도 많았습니다. 양들의 모습 속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을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양들을 섬기면서 양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죄인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또 그런 자신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섬기셨는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또 자신에게 두신 예수님의 큰 소망들을 알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양을 섬기는 삶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순종을 배우게 되었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양을 치는 생활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그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은혜 안에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 이렇게 권면합니다. 세상에 고귀한 많은 일들이 있지만 한 생명을 구원하고 돌보는 것만큼 값지고 고귀한 일이 있을까요? 단지 예수님께 부탁 받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큰 은혜이고 그 은혜의 풍성함 때문에 장로들에게 또 우리 목자님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를 섬기는 데 있어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처음부터 하나님의 양 무리를 억지로 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땠습니까? 은혜가 차고 넘쳐서 주님이 원하시면 심장이라도 식기 전에 바치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양들과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로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고 하나를 시키면 둘 이상을 감당했습니다. 그게 좋고 행복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이 한두 명씩 모이고 조직이 체계화되고 규모와 영향력이 조금씩 생기면 수면 아래 있던 교회가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시스템과 행정이 필요하고 효과와 효율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교회는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장로는 뒷짐 지지 않고 앞장서는 사람들인데 갈수록 힘에 부칩니다. 이것도 버거운 것 같은데 초대교회에 외부적인 핍박까지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흩어진 나그네로서 먹고사는 생계도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웠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장로들이 앞장서서 총대를 메야 하기에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성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위성과 사명감은 다릅니다. 당위성으로 일하는데 자신은 사명감으로 일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의무감만 남습니다. 의무감으로 가정생활하고 의무감으로 교회 생활하고 의무감으로 직장 생활하다 보면 반드시 ‘번 아웃’이 찾아옵니다. 우울증도 찾아옵니다. 신자들 중에도 중증 우울증이 많다고 합니다. 일중독일 정도로 교회, 가정, 직장 등 열심히 일하는데 행복감이 없습니다. 장로가 될수록, 교회 지도자가 될수록, 교회 중역이 될수록 그게 심해집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별로 이런 태를 안 낼 수 있습니다. 자신은 태를 안 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본인은 압니다. 물론 다른 사람도 눈치를 챕니다. 내가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 억지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자원해서 하는지 말입니다.
교회 장로들에게 나이의 한계, 체력의 한계, 그리고 고난이라는 현실의 한계가 있지만 베드로는 자신도 장로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금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억지로 신앙 생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의무감만으로 어쩔 수 없이 양 무리를 치는 일을 멈추라고 합니다. 대신 자발적으로 하라고 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면 몸은 피곤할 수 있어도 마음에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행복하십니까? 이게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양들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되 자발적으로 섬기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신앙 생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계산하지 말라고 합니다.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더러운 이득을 위해 양을 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냥 이득이라고 해도 되는데 더러운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열심도 중요하고 많은 일을 섬기는 것도 좋지만 그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더러운 이득’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욕, 자기만족이나 사람들의 인정, 영향력 확장 등과 같은 개인적인 이익을 의미합니다. 이득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 이렇게 계산하게 될까요? 억지로 양 무리를 치는데 보상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로부터 섬김과 존경과 대접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로부터 인정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억지로 양을 치다 보면 양이 아니라 보이는 성과와 자기 업적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내가 이를 통해 얻을 이득과 영광과 인정에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잘 섬겨온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선이 아니라 잘못된 길을 향해 가고 있는 목회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양 무리를 섬기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모임을 위해, 모임의 규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양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우러 나오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양들을 섬기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순수하게 양들이 잘되도록 기도하고 섬길 때 양들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고 더 나아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형성됩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셋째, 주장하지 말고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여기 ‘맡은 자들’은 원어로 ‘할당된 나의 몫, 유산’이라는 의미입니다. NASB 영어성경에 보면 ‘내가 책임지도록 내게 할당된 사람들’이라고 나옵니다. 맡겨진 양 무리를 의미합니다. 또 바로 뒤에 나오는 교회 젊은 자들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교회 장로들이 돌보고 섬겨서 장로들의 영광의 면류관이 된 일단의 양 무리임은 확실합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어린 양들을 학창 시절부터 돌보고 섬겨서 그들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결혼도 하고 교회 리더까지 되었다면 기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맡은 자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이 리더로서 섬기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장로로서, 리더요, 지도자로서 섬기고 있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보이게 될까요? 기쁨과 영광의 면류관인 양들과 성도들이 어느 사이엔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큰 기대가 한없는 실망으로 바뀝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세우고 지금껏 섬겨왔는데 하는 행동들이 마음에 안 듭니다. 내 맘에 안 들고 내가 생각하기에 양이 차지 않습니다. 특히나 초대교회 때는 박해와 비방 속에서도 온갖 치욕과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교회를 지키고 섬겨왔는데 하는 행동들을 보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언을 합니다. 조언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가 간섭이 되고 간섭이 푸시가 되고 푸시가 주장이 됩니다.
본문에서 주장한다는 말은 그들의 주인 노릇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샌가 양 무리들, 성도들 위에 군림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목자도 사실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양 무리를 섬기면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배우자는 의미에서 목자라는 직분을 주지만 진정한 목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4절에서 특별히 예수님에게 ‘목자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너도 양을 섬기는 목자이고 나도 양을 섬기는 목자이고 하니까 좀 구별해서 쓴 표현입니다. 장로들이 교회를 위하고 견고하게 세우고자 했던 열심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맡겨진 성도들에게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겉으로는 맡은 자들, 성도들, 양 무리들에 대한 신뢰가 없어 그런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핍박에서도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 현재 베드로가 거하고 있는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가지 않고 디아스포라들을 통해 세워진 로마 교회가 1세기 안디옥 교회와 함께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역사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장로들을 쓰신 것처럼 앞으로 젊은 목자들을, 또 다음 세대들을, 우리 2세들을 쓰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고 섬기는 방식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하던 방식, 내 맘에 드는 방식, 내가 성과를 경험했던 방식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을 섬기신 하나님의 방법은 획일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일하신 방법은 똑같지 않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 장로들에게 교회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조바심 내고 간절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주장하지는 말라고 말합니다. 그 안타깝고 조바심 내고 교회를 향한 간절한 애정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양들과 성도들에게 주장하려는 에너지를 본 보이고자 하는 에너지로 바꿔 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섬기라고 윽박지르지 말고 내가 먼저 섬기는 것입니다. 전도하라고 다그치지 말고 내가 먼저 전도하는 것입니다. 요구하지 말고 내가 먼저 그 요구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기 주장과 본은 같은 것입니다. 목적은 좋은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고 교회를 위하기 때문에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지향하는 지점이 상대방을 향하면 주장하는 것이 되고 지향하는 지점이 나를 향하면 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우리에게 말씀만 하지 않으시고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낮아져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며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으뜸이 되시는 분이지만 친히 낮아져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내가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요13:14,15). 예수님의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는 그분의 삶이 예수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리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양들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신앙의 모범을 찾아갈 것입니다. 일부러 양들에게 본이 되겠다고 너무 의식하며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본인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하면 됩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에 잘 서있고 말씀대로 살면 양들도 그래야 하는 줄 알고 그게 좋아 보이면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그게 쉽지 않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사도 베드로는 본 보이면서 양들이 따라오게 돕도록 교회 지도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목자가 은혜가 넘치면 양들도 기쁨이 가득합니다. 목자가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면 양들도 즐겁게 따라갑니다. 목자가 경건에 힘쓰면 양들도 배워 경건에 힘쓰고자 합니다. 목자가 고난을 즐거움으로 감당하면 양들도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감당합니다. 목자가 먼저 예수님을 본받으며 앞서 나갈 때 양에게도 유익이지만 먼저는 목자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고 서로 함께 믿음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함께 자라가게 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말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공부하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섬기는 모습, 말씀을 묵상하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하는 모습을 본 보이는 것이 자녀 교육이고 제자 훈련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교회에 대해서, 교회 동역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본을 보인다는 것이 힘들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자세의 열정을 바꾸어 본을 보이는 열정으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연수와 나이와 경험과 열매로 주장하기 쉬운 교회 장로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우리가 주님께서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아픔이 있고 힘들 수 있지만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삶으로 계속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장로들만 너무 몰아세운 것 같은데 5절에서 짧게 젊은 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어 주로 듣고 따르는 이들을 말합니다. 교회에 리더요 지도자들이 있다면 이를 따라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젊은이들이 볼 때 장로들은 생각이 굳어 있고 권위주의적이고 답답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선배 성도들의 많은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장로들을 선배로서는 인정하지만 순종하기는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장로가 부족하고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장로들, 리더들,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또 그들을 통해 영적인 은혜를 공급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들을 통해 주어집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장로들도 근본적으로 사람입니다. 연약함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생각이 틀리고 장로들의 생각이 다 옳기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의 결정을 할 때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온갖 고민을 하고 기도하면서 신중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해 결정하고 권면합니다. 결론은 단순하고 간단하더라도 온갖 마음의 번민과 기도와 지혜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 안 맞다고 잘못된 생각인 것 같다고 판단하면서 맞서면 상처가 되고 마음이 힘들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교회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을 보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합심하여 성령의 그릇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존중하며 사랑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서로의 허물을 들춰내기보다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장로들, 교회 지도자들이 부족함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때로는 지혜의 말로 조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의 부족함을 함께 메워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기까지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합니다(5).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장로들의 연륜과 지혜와 믿음을 존중하고 장로들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순수함을 존중해야 합니다. 마음에 안 차는 부분이 있더라도 질서를 존중하고 겸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자기 생각만 옳다고 느껴지고 거기에만 꽂히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 성도들이나 지도자들이나, 장로들이나 젊은이들이나 다 허물과 부족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교회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 하나님 앞에 자기 생각과 계산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적인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그 너머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동역하며 섬길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겸손한 자들을 반드시 높여주실 줄 믿습니다.
사실 고난 중에는 근심하고 염려할 만한 일들이 많습니다. 또 겸손과 순종함으로 살고자 할 때 염려가 듭니다. 그런 모습이 호구 취급 당하는 것 같고 바보스러워 보이고 나만 희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권면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심으로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주님께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 마귀는 이런 근심하고 염려하는 자들을 찾아가 더더욱 두려움을 심고 믿음을 흔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성도들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다툼과 분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흔들고 깨뜨리려 합니다. 장로들은 젊은이들을, 젊은이들은 장로들을 탓하기 쉽습니다. 성도들 서로 간에 뜨겁게 사랑하기보다 요구만 하기 쉽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 내외적으로 여러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근신하며 깨어 기도하므로 사탄 마귀들과 싸울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4번에 걸쳐 이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고난들을 통해 우리와 우리 교회를 굳세고 견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장차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위치입니까? 우리 가운데 장로이신 목자님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주니어 목자님들이나 양들, 2세들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지도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목자님들을 존중하고 순종하며 따르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견고한 띠, 즉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좋은 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근신하고 깨어 있으므로 염려와 두려움을 심고 교회를 흔들고 균열을 일으키는 마귀를 대적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