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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을 무를 자 보아스
룻 2:17-23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룻 2:17-23 / 룻은 밭에서 저녁때까지 이삭을 주웠다. 주운 이삭을 떨어 보니 보리가 한 말이나 되었다. 18) 그것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겨 온 것도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19) 시어머니가 물었다. `얘야, 오늘 어디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서 일했어? 너에게 이토록 잘해 주신 분이 있다니, 여호와께 복받았으면 좋겠다.' 룻이 어느 집 밭에서 일하였는지를 시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오늘 제가 이삭을 주운 밭의 주인이 보아스라고 하더군요' 20) 그러자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여호와께서 그분께 복을 듬뿍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분이 돌아가신 남편과 자식들에게 그렇게 잘해 주시더니 이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들에게도 이토록 잘해 주시는구나. 그분은 우리 집안과 가까운 분이라 우리를 떠맡아 주셔야 할 사람 가운데 한 분이야' 하고 말하였다. 21) 모압 여인 룻이 `또 그분이 자기 집 곡식 거두기가 다 끝날 때까지 자기 집 일꾼들과 꼭 같이 다니라고도 하시더군요' 하고 말하자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그래, 얘야, 다른 밭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그 집 아낙네들과 꼭 붙어 다녔으면 좋겠다.' 하고 일렀다. 23) 그래서 룻은 보리와 밀 거두기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집안의 아낙네들을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우며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보아스의 배려로 많은 보리를 수확하게 된 룻은 집으로 돌아와서 밭에서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고합니다.
룻이 주운 보리의 양(17)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여러 가지 구제 풍습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삭줍기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밭 면적의 1/60에 해당하는 지역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확하지 않았으며, 땅에 떨어진 이삭은 다시 돌이켜 줍지 않았습니다(레 19:9-10; 23:22).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범위 안에서 곡식이나 이삭을 주워 식량을 보충할 수 있지만, 주인의 밭 곡식을 낫으로 절취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신 23:25). 그러나 룻은 보아스의 특별한 배려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곡식을 거두어 한 에바 정도 되었습니다. 한 에바(열 오멜)는 약 22리터로 당시 열 사람의 하루 식량에 해당되는 꽤 많은 분량으로, 룻이 주운 곡식은 나오미와 그녀가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보고하는 룻(18-19) 하루 종일 이삭을 줍느라 피곤한 룻이지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린 시어머니를 위해 피곤함을 잊고 오늘 하루 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시어머니에게 자세하게 보고합니다.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서, 룻이 시어머니를 위해서 행한 것처럼, 배려는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며 마음 써 주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반응(20-23) 나오미는 보아스가 우리의 근족이며 기업 무를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제도는 종족 보존(신 25:5-10)과 토지가 다른 족속에게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여호수아에게 분배받은 토지를 영영토록 그 족속이 계승하도록 마련된 법입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 대속자라고 하며 그 제도를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고엘은 잃은 것을 회복 시켜 주는 자, 친족, 구속자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룻에게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오직 보아스의 밭에서만 이삭을 줍도록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의 주님을 만난 이상 다른 이를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요 6:68)
적 용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했습니다. 나오미를 향한 룻의 행적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나요?
기인지우(杞人之憂)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이것저것 사서 걱정할 때 이르는 말입니다. 걱정과 근심에 빠지다 보면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사서하는 걱정은 백해무익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 할까요? 걱정 근심대신 마음을 굳게 잡고 직접 부딪쳐 몰아내야합니다. 시험을 잘보고 싶으면 시험공부를 하고, 몸이 약하면 당장 운동을 시작하는 것 입니다. 마음이 강건하고 굳으면 긍정적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긍정의 에너지가 발생할 것 입니다. 강건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일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만하여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불행할 것 같은 나오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만하였기에 보아스와 룻의 스치듯 한 만남에 큰 소망을 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 설 교 >
기업 무름
믿음은 믿음이 있는 자의 마음을 든든하게 합니다. 흔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을 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일에 있어서 걱정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보다는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에 더 신뢰가 갈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절대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는 나약한 미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의 대상은 나약한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분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단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허락하에 되어지고 있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보여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된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과연 어떻습니까? 참으로 조그만 일에서도 믿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낙심하고 흔들리는 모습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신앙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대해서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하면 행복도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 역시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어디서도 행복의 조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들이라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나해도 남편, 아들과 함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시각이지만 나오미와 룻에게는 그러한 조건까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 무엇도 의지할 것이 없는 약자로 전락합니다.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나오미와 룻이 어떻게 살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 힘든 일이지만 분명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이것을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맛을 아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룻이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밭으로 갔을 때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해서 '이방인이 자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는가?'라고 하면서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자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섭섭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것은 은혜의 양으로 보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자체로 본다면 룻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자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즉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은혜의 양에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다는 것에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신자의 마음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은혜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타인과 비교하면서 은혜의 양을 생각하고 많다 적다는 판단을 하면서 섭섭함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양을 생각한다는 것은 은혜를 세상의 것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에게서 은혜는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자체였습니다. 무시받고 천대받아 마땅한 자신에게 다가오고 호의를 베푸는 것, 이것이 룻에게 은혜로 여겨졌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들을 위해서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에게는 은혜의 양이란 없습니다. 다만 받을 수 없는 자가 받았다는 감격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7,18절에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주은 이삭을 떨자 한 에바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 에바란 지금의 단위로 계산하면 약 12되쯤 됩니다. 밭에서 주은 이삭이 12되 되었다면 보아스가 룻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주워온 이삭으로 떤 보리의 양을 보자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룻이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답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호의를 베푼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나오미 역시 룻이 주워온 이삭에서 호의를 베푼 자의 은혜를 발견했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는 인생으로 전락한 사람입니다. 우린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거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 가서 남의 일해서 얻은 것의 부스러기를 주워서 먹고산다는 것은 가장 낮은 위치가 되어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주운 것을 바라본다면 아마 눈물이 흐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고 살아가는 신세가 된 것에 대해서 한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운 이삭을 보면서 그 밭의 주인에게 복을 빈다면 그것은 주워먹는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어떤 신세에 처했든 어떤 입장이 되었든 자신의 신세나 입장을 바라본다면 베풀어진 것에 대해 절대로 감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신세 한탄만 있을 것입니다.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는 원망만 여러분의 가슴을 칠 뿐입니다.
신자로서 참으로 낮아진 마음은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마음이 곧 평안이며 천국이며 참된 만족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베풀어진 것을 보지 않고 베풀어지기만 바라고 살았기 때문에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을 거두심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요즘 우리나라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은총을 은총으로 알고 살았습니까? 몇 달 비가 오지 않음으로서 전국이 난리입니다. 겨우 몇 달 비 오지 않음으로서 이 정도인데 1년, 아니 아합 왕의 시대처럼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비참한 현상들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번 가뭄으로 해서 신자된 우리는 한 방울의 물도 곧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 심정도 농사꾼이 아니라면 절실하게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보여지는 물을 기뻐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과 같은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십니까? 낮아진 마음은 높은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곧 베풀어진 은혜를 은혜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낮아진 마음인 것입니다.
신명기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사십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그들을 실패의 길로 인도하셨고, 이제 오늘 우리들 역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험한 광야의 길로 실패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오미는 어떤 말을 합니까? 20절에 보면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베푼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생존한 자에게 베풀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 즉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지 않습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지 사실 죽은 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사망한 자에게 베푼 은혜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에 나오는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업 무를 자'란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말합니다. 고엘이라는 것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고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엘에 해당된 사람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가난한 혈족의 땅을 되찾아 주는 일이고(레 25:25.26),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서 복수를 책임져야 하고(민35:12,19,21), 친족의 홀로된 여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민 5:8)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엘로서의 자격은 가까운 혈족으로서 자원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을 무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무르는 고엘된 자는 타인의 기업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미는 보아스를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음으로서 끊어져 버린 가문의 기업을 되찾아 주고 갚아줄 자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한 자에게 베푼 은혜인 것입니다. 이미 사망한 자가 어떻게 기업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업이 보아스로 인해서 되찾아지고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가 보아스에게서 본 것은 이삭을 줍도록 한 은혜만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는 은혜를 보았던 것입니다. 산 자이면서도 죽은 자에게까지 베풀어지는 은혜를 보는 그 마음이 낮아진 나오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와 같은 룻과 같은 낮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신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 마음을 가꿀 수가 없습니다. 우린 항상 높은 것을 기대하고 높은 것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고, 산자에게만 베푼 것이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란 다만 지금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기업의 끊어짐을 뜻합니다. 기업을 이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와 룻은 기업 없는 자로 전락해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끊어질 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한 위기에 보아스가 개입됩니다. 그리고 사망으로 끊어진 기업을 되찾고 갚아줍니다. 과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창세기를 보면 처음의 인간에게는 생명나무가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생명에서 끊어진 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의 등장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서 끊어진 생명이 되찾아지고 생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은 산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모두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고엘이십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하게 된 우리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시고 생명에 참여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엘의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우리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산자에게나 사망한 자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신자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기업이 끊어진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보아스를 자신의 기업을 무를 자로 보면서 은혜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처한 처지가 무엇입니까? 비록 세상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신자인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때로 한탄하고 섭섭해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정작 세상의 처지는 생명에서 끊어져 있습니다. 그 처지를 보는 자가 참된 신자의 눈을 가진 자이며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세상에 있는 것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이 아닌 든든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외침으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 진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은혜의 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히 은혜 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로 감사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하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