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은 숫자가 아니다
이진희
1. 묻다(ask)
"동생이 실종됐어요. 기도 부탁드립니다.” 날벼락 같은 톡이 울린다. 급한 마음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인지를 묻는다. 동생이 경비행기 회사의 조종사인데 비행 중 교신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동생을 위해서 기도하자” 그렇게 전화를 끊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비행기의 실종은 추락을 의미하고 동생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임이 그제야 인지한다.
두 주간의 구조작업에도 결국 동생을 찾지 못했다. 시신이라도 돌아오기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이 자원하여 구조작업에 매진했지만 망망대해 그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르는 동생을 찾는 것은 ‘모래에서 바늘 찾기’ 만큼이나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형은 동생을 찾기 위해 학업을 뒤로하고 두 주를 그 바다에 머물렀고, 한국 어느 시골교회 목사님은 아내에게 둘째의 소식을 전하지 못해 전전긍긍이었다.
얼마 후 비행기 잔해는 발견되었지만,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탑승자의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공식적인 모든 구조를 마무리했다. 교회 한 자매는 “하나님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요.”라고 투덜대며 형제의 아픔에 동참한다.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그것이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2. 묻다(bury)
1,021,345명. 코로나 사망자가 백만이 넘었다. 백만이라는 숫자가 무색할 만큼 내가 있는 미국의 일상은 평온하고 사람들은 방역을 무시한다. 학교와 비지니스는 이미 열리고 있고 그 범위는 점차 확대될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에 걸렸으니 조금 달라질 것 같기도 하나 그 반대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니 코로나가 별것 아니라고 허장성세로 떠벌릴지도 모른다. 또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당면 과제인 경제를 위해 이번에는 무슨 선포를 할지 예상조차 안 된다. 미국은 확실히 경제 논리가 우선인 동네라 코로나보다 돈벌이가 중요하다. 그것이 이들의 '대의'이고 비슷한 논리로 지금 그도 대통령이 되었었다.
그나마 한국은 다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분들을 통해 한국의 방역 수준을 들었는데 거의 미드에서나 볼법한 수준이었다. 은근히 자랑스럽다. 그런데 교회가 말썽이다. 개천절에 집회하겠다고 난리고, “코로나 걸리면 걸리는 거지”라며 이번 주부터 교회를 열겠다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곳도 많다. 자신과 타인의 삶도, 자신과 타인의 죽음도 믿음 앞에 무의미하다.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싸운다고 하나 미국의 경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누군가의 안위에 ‘위해’를 가하는 모습이 철없는 어린이 같다. 스크린 너머의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일까. 의미는 묻힌다.
3. 읽다
가슴 아픈 소식을 접어두고 표지부터 진한 사람 향기를 풍기는 책이 펴들었다. 김수정 작가의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이다. 저자는 방송작가 일을 뒤로하고 영국에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우연이 알게 된 ‘리빙 라이브러리를 통해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 이야기를 책에 기록하고 있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대신 ‘사람’을 빌리는 것이다. 대출 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목록(사람들 목록)을 훑어보며 읽고 싶은 책(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마주 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이다.”
도서 목록이 인상적이다. 싱글맘, 예순 살에 가출한 사람, 레즈비언, 우울증 환자, 여성 소방관, 무신론자 휴머니스트, 혼혈, 완전 채식주의자, 트랜스젠더 등. 이들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심지어 우리는 그들을 향한 불편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만나본 적이 없던 ‘환상 속의 그대’이다. 어쩌면 그들은 편견을 넘어 실체적 폭력 앞에 억지로 몸을 낮춘, 우리에게 묻힌 또 다른 존재일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들을 읽어주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일까. 읽혀지는 그들 뿐 아니라 읽는 나에게도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울림이 된다. 이 울림이 편견 속에 묻혀진 스크린 너머의 숫자 ‘1’을 존재로 읽게 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자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수 있다.” 누군가를 선입견으로 난도질하기 전 책을 읽듯 조용히 그를 읽어보면 어떨까. 한 사람의 죽음도 그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사람은 의미 없는 숫자가 아니다. 사람보다 귀한 가치는 없다.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었으니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만큼의 가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리와 죄인 속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울고 웃으시던 그분의 미소가 그립다.
4. 있다
지난 금요일 저녁, 그 동생의 장례예배가 있었다. 너무 먼 곳이라 함께 가지는 못했지만, 코로나가 준 유익인 온라인 예배를 통해 형제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영정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예배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삶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신실했고 성실했고 친절했던 그의 삶의 아름다운 만큼 내 속의 '왜'도 짙어간다.
그러나 꽃다운 청춘의 죽음은 ‘왜’라는 질문뿐 아니라 어떤 ‘의미’를 나에게 전한다. 한 발짝 떨어진 그의 죽음의 무게도 이리 시린데 함께 했던 그들은 어떨까.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숫자 뒤에 가려졌던 타인의 죽음의 크기가 어렴풋이 읽힌다. 죽음의 크기가 읽히는 만큼 삶의 귀중함도 되새긴다. 스크린을 통해 요약된 그 청년의 삶처럼 내 삶도 정리 될 때가 있겠구나.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보며 감동하는 그의 삶처럼 나의 것도 하나님의 눈에 그렇게 보이고 싶다. 장례식을 참여한 수십명의 뒷 모습을 보며 1991. 07. 18. ~ 2020. 09. 13 까지, 예수님 처럼 짧은 인생을 산 그도 결코 헛되이 뿌려지지 않았겠다. ‘1’은 그저 숫자가 아니다. 이것을 알려준 그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