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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省墓)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말한다.
省 : 살필 성(目/4)
墓 : 무덤 묘(土/11)
(유의어)
간산(看山)
배묘(拜墓)
성추(省楸)
전묘(展墓)
참묘(參墓)
성묘(省墓)란 조상의 무덤에 주기적으로 잡초를 제거하고 약간의 음식을 마련, 약식의 제사를 지내는 일을 일컫고 있는데 대개 음력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약 보름간에 걸쳐 행해진다.
따라서 때가되면 타지에 나갔던 사람들은 물론 정착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묘 준비에 열중한다.
성묘에 쓰이는 도구는 조금씩 다른데 예취(刈取)를 한다는 점은 동일한데, 동부지역에서는 낫과 돌사이에 낀 잡초를 베기 위한 호미를 사용하며 서부지역에서는 호미만을 사용하여 성묘에 임하고 있다.
낫을 사용할 경우 1인이 한자리의 묘(墓)를 성묘하는데 약 15분∼20분 정도의 시간이면 되나 호미만을 사용할 경우 약 1시간정도의 시간을 요하고 있어 조상의 묘가 많고 자손이 몇 명 안되는 집안에서는 낫의 사용이 바람직하다.
여기도 장단점은 있다. 낫을 사용할 경우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게 되며 예취하는데 있어서 그 크기가 불일정하여 대강 예취를 하게 되는데 호미만을 사용할 경우 시간은 오래 걸리나 깨끗하고 시원하게 조상의 묘를 다듬을 수가 있다.
성묘 절기(節氣: 백로를 일컬음)만 되면 일가 친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떠들썩하게 되는데 모듬 벌초(伐草)라 해서 혈연끼리 몰려다니면서 협동하여 벌초를 하게 된다. 조상대대로 이 벌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집안은 없었다. 그러기에 지금도 이 벌초에 대한 관념은 여전하다.
불행하게도 잘 내려오던 한 혈연이 어느 대에 자식을 두지 못해 대가 끊기면 자연적으로 조상의 산소를 그대로 방치하게 되는데 방치된 산소가 1년 2년 해를 거듭할수록 잡초가 우거지고 각종 나무씨가 흘러 들어 뿌리를 내리게 되어 손을 대기가 어려울 정도로 변하는데 이런 산소는 골총이라 불리고 있으며 성묘를 다니다 보면 군데 군데 눈에 띠게 된다.
대개 성묘객들은 이러한 골총을 보게되면 산터를 잘못써서 후손이 끊겨구나. 즉, 묘 자리를 잘못 선택하여 후대가 끊겨 오늘에 이르렀구나 하고 믿게 된다.
육지부에서는 성묘시 벌초를 하고 약간의 약식 제사 음식을 마련 산소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도 옛적에는 그렇게 차례(茶禮)를 지냈다는 말도 있으나 언제부터인지 그런 풍습은 사라지고 그대로 벌초만을 하고 벌초뒤에 행하는 약식 제사는 팔월 보름 추석절(秋夕節)과 함께 지낸다.
옛말에 조상의 묘에 벌초를 안하면 기일제사(忌日祭祀)때에 조상이 잡초를 머리에 쓴 채 온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8월 15일전에 벌초를 끝내고 추석절을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 벌초는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 풍습이고 또한 좋은 인상을 주는 풍습으로 호평되고 있다.
省(살필 성)은 눈(目)으로 작은 것(少)을 살펴본다는 뜻으로 보다, 살피다가 된다. 성찰(省察), 반성(反省)이 있다. 또 덜 생(省)으로 읽으면 아끼다, 줄이다는 뜻이 된다. 생략(省略)이 그렇다.
墓(무덤 묘)는 莫과 土의 결합(結合)으로 莫의 아래에 있는 大는 본디 艸의 변형이므로 해(日)가 아래 위의 풀숲 사이에 빠져 있는 형상(形狀), 곧 서산(西山)에 지려고 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莫(막)의 본디 뜻은 어둡다, 해가 지다가 된다. 후에 금지(禁止)로 전용(轉用)되자 해를 뜻하는 日을 덪 붙여 暮(저물 모)를 새롭게 만들었다. 곧 묘(墓)는 어두운 땅(土), 무덤인 것이다. 묘비(墓碑), 묘제(墓祭), 공동묘지(共同墓地), 분묘(墳墓) 등이 있다.
성묘(省墓)라면 조상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겸하여 예(禮)를 올리는 것으로 일명 배분(拜墳), 배소례(拜掃禮)라고도 한다.
봉분(封墳) 주위의 나무나 풀을 돌아보고 가시나무나 잡초 등을 잘라내 깨끗이 정리하는 것으로 보통 벌초라고도 한다. 그런 다음 간단히 음식을 올리고 조상을 추모하며 동시에 가족간의 유대를 다지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중국 사람들은 청명(淸明)에 성묘를 하는데 소묘(掃墓)라 부른다. 우리의 경우 설, 단오(端午), 한식(寒食), 추석(秋夕) 등 4대 명절에 성묘를 했는데, 지금은 보통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한다.
한식(寒食)의 성묘는 풀이 잘 자라게 하는데 목적이 있고, 추석(秋夕)의 성묘는 이듬해에 잘 자랄 수 있도록 정비하는데 목적이 있다. 물론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곧 효(孝)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설날과 추석이란 글에서, 우리나라 민간절기에 8월 15일에 성묘하는 것을 추석이라고 한다고 추석을 민간 풍습이라고 말했다.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이 안정진(安正進)의 질문에 답하는 글에서 3월 상순의 벌초는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에서 비롯되었지만 한식에 묘소에 참배하고 추석에 벌초하는 것은 중국의 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於禮無見)고 말한 것처럼 추석 성묘는 중국에는 없던 우리만의 풍속이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기승을 부리면서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 추석 성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중국에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인조(仁祖) 27년(1649) 송영보(宋英甫: 송시열)에게 답하며 송명보(宋明甫: 송준길)에게도 함께 보이다는 글에서 추석 때의 묘제(墓祭: 성묘)는 내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설행(設行)하지 말도록 명했고, 가묘(家廟)에만 약간의 주과(酒果)를 올리도록 시켰다고 말한 것이 이런 사례다.
이를 고민한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중국과 조선의 풍속을 배합해 새 기준을 만들었다. 양(陽)의 기운이 생겨나는 동지(冬至)와 음(陰)의 기운이 생겨나는 하지(夏至)에는 가묘(家廟)에 제물을 올리고, 풀이 자라는 한식과 곡식이 익는 추석에는 무덤에 전(奠)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는 영조(英祖) 33년(1757) 설날 제례(祭禮)를 고(告)하는 글(告辭)을 지어 조상들께 이를 고유(告由)했다.
안정복은 추석 성묘는 가야(伽倻)의 수로왕(首露王)에서부터 시작된 동방(東方)의 풍속이라고 보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매년 정월 3일과 7일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추석)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奠)으로 제사지냈는데,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는 가야가 망한 후 영규(英規)라는 자가 음사(陰祀: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되는 자가 드리는 제사)를 행하다가 사당의 대들보에 깔려 죽자 그 상관 충지(忠至)가 수로왕(首露王)의 직계 규림(圭林)에게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석 성묘는 우리 민족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풍습이다.
옛 사람들이 조상의 분묘를 좋은 곳에 쓰고자 했던 것은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상의 혼령이 골육을 계승한 후손과 소통한다는 생각에서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여러 조상들을 함께 모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42세 때인 정조(正祖) 2년(1778) 세도가 홍국영(洪國榮)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했다가 양호맹(梁浩孟)의 개성(開城) 금학동(琴鶴洞) 별장으로 이주했다.
이때 박지원은 개경(開京)의 남원양씨(南原梁氏)들이 가까운 산에 조상의 분묘를 모시고 이를 지키는 분암(墳菴)의 이름을 영원히 생각한다는 뜻의 영사암(永思菴)이라고 지은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영사암기(永思菴記)를 지었다.
영사암기에서 연암은 친족들은 살아 있을 때도 같이 사는 것이 좋고 죽은 후에도 한 묘지에 모시는 족장이 좋은데도 세상 풍속이 무너지면서, 장지(葬地)가 화복을 준다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효도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고 서로 믿는 마음을 능가하게 되어 각각 따로 산소를 두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박지원은 남원양씨들이 분묘들을 한 곳에 모신 것을 조상에 대한 효심이라며, 장차 그 씨족과 세대가 더욱 번창함을 볼 것이며, 그런 뒤라야 세속의 이른바 풍수지리설이 장차 우리를 속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풍수론(風水論)에서 지사(地師)를 초빙해 길지(吉地)를 가려 묏자리를 정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는 예(禮)가 아니다. 어버이를 매장하면서 복을 바라는 것은 효자의 마음이 아니다고 묏자리를 기화로 발복하려는 세태를 비판했다.
왕릉(王陵)도 마찬가지였다. 효종(孝宗)의 장지를 정할 때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나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주장한 것처럼 오환(五患)이 없는 자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오환(五患)은 앞으로 ①도로 ②성곽 ③연못이 되거나, ④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⑤농지가 될 곳을 뜻한다.
왕릉(王陵)일지라도 이런 장소만 피해 효를 다하면 된다고 본 것이다. 산 자를 위한 발복(發福)이 아니라 산 혼령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곳이 묘소라는 것이다.
▶️ 省(살필 성, 덜 생)은 ❶회의문자로 작은(少) 것까지 자세히 본다(目)는 것으로 '살피다'를 뜻한다. 자세히 상대편을 본다는 대서 스스로를 깊이 반성(反省)한다는 뜻으로도 되고, 또 少(소)를 글자체(體)의 부분으로 하기 때문에 少(소), '덜다', '생략하다'란 뜻으로도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省자는 '살피다'나 '깨달다', '관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省자는 少(적을 소)자와 目(눈 목)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하지만 省자 갑골문을 보면 目(눈 목)자 위로 生(날 생)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초목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본래 省자는 작물이 자라는지를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살피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후에 백성들의 안위를 살핀다는 뜻이 파생되면서 '관청'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省자가 상위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省(성, 생)은 (1)옛날 중국에서 궁중(宮中), 금중(禁中)의 뜻 (2)중국의 옛날의 중앙(中央) 정부(政府). 곧 중서성(中書省) (3)근세 이후 중국의 지방(地方) 행정(行政) 구획(區劃)의 이름 (4)미국(美國), 영국(英國), 일본(日本) 등의 일정한 부문을 관리(管理), 지도(指導)하는, 중앙(中央) 행정(行政) 기관(機關). 우리나라의 부(部)에 해당함 등의 뜻으로 ①살피다 ②깨닫다 ③명심하다 ④관청(官廳), 관아(官衙) ⑤마을 ⑥대궐(大闕) 그리고 ⓐ덜다(생) ⓑ허물(생) ⓒ재앙(災殃)(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살필 고(攷), 살필 체(諦)이다. 용례로는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여 살핌을 성찰(省察), 제사에 쓸 희생을 검사하던 일을 성생(省牲), 이른 아침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의 안후를 살핌을 신성(晨省), 자기가 한 일이나 행동을 잘못이나 허물이 없었는지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반성(反省), 스스로 반성함을 자성(自省), 깨달아 살핌을 감성(感省), 객지에서 부모를 뵈러 고향에 돌아감을 귀성(歸省), 깊이 반성함을 맹성(猛省), 자기의 사상이나 언동 따위를 스스로 돌이켜 봄을 내성(內省),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깨우쳐 돌아봄을 경성(警省), 덜어서 줄임을 생략(省略), 글자의 획을 줄이어 쓰는 일을 생획(省劃), 문장 속의 어떤 구절을 생략하는 일 또는 그 글귀를 생구(省句), 줄이고 뺌을 생감(省減), 글자나 문구를 생략함을 생문(省文), 비용을 줄여서 아낌을 생비(省費), 절약해서 비용을 줄임을 검생(儉省), 간략하게 줄임을 약생(略省), 편지를 쓸 때 첫머리를 생략한다는 뜻으로 의례적인 인사말을 줄이고 곧바로 용건을 적을 경우에 쓰는 말을 관생(冠省), 알맞게 덜어서 줄임을 재생(裁省), 덜어서 줄임을 감생(減省), 그만두게 하여 제거함을 파생(罷省), 나무람과 경계함이 있는가 염려하며 몸을 살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성궁기계(省躬譏誡),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아 마음속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마음이 결백함을 이르는 말을 내성불구(內省不疚), 겨울은 따뜻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밤에는 잠자리를 정하고 아침에는 안부를 살핀다는 뜻으로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이르는 말을 온정정성(溫凊定省),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여 살핌을 일컫는 말을 자아성찰(自我省察), 자기 자신의 행위나 내면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일컫는 말을 자기반성(自己反省), 하루의 일 세 가지를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일일삼성(一日三省), 정신을 잃고 의식을 모름이란 뜻으로 사람으로서의 예절을 차릴 줄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인사불성(人事不省) 등에 쓰인다.
▶️ 墓(무덤 묘)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莫(막)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莫(막)은 暮(모)의 본디 글자이며 풀 저쪽편으로 해가지다, 해질 녘, 쓸쓸하다, 물건이 없다의 뜻이 있다. 土(토)는 토지(土地), 곳, 墓(묘)는 죽은 사람을 묻는 쓸쓸한 곳이다. ❷회의문자로 墓자는 ‘무덤’이나 ‘묘지’, ‘장사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墓자는 土(흙 토)자와 莫(없을 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없다’라는 뜻을 가진 莫자에 土(흙 토)자를 더한 墓자는 '땅에 묻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墓자는 죽은 사람이 묻혀있는 ‘무덤’이나 ‘묘지’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墓(묘)는 뫼의 뜻으로 ①무덤 ②묘지(墓地) ③장사(葬事)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덤 영(塋), 무덤 총(塚), 무덤 분(墳)이다. 용례로는 묘소로서 경계를 지은 구역을 묘역(墓域), 죽은 사람의 신분과 성명과 행적과 자손과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을 묘비(墓碑), 무덤이 있는 땅 또는 그 구역을 묘지(墓地), 무덤이 있는 곳을 묘소(墓所),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을 묘표(墓表), 무덤의 대표 연고자를 묘주(墓主), 뫼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하고 작은 돌비석을 묘갈(墓碣),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묘제(墓祭), 뫼를 쓸 때 구덩이 안에 널이 들어갈 만큼 알맞게 파서 다듬은 속 구덩이를 묘혈(墓穴), 무덤으로 가는 길을 묘수(墓隧), 신분이나 품계에 따라 정한 무덤의 구역을 묘계(墓界), 무덤 근처에 가꾼 나무를 묘목(墓木), 무덤 앞으로 들어 가는 어귀를 묘문(墓門), 무덤을 만드는 사람을 묘공(墓工), 묘지나 묘표에 쓴 글을 묘문(墓文),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묘석(墓石), 무덤 속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방을 묘실(墓室), 소출을 묘제의 씀씀이로 쓰는 논밭을 묘위(墓位), 남의 뫼를 지키고 거기에 딸린 일을 보살피는 사람을 묘직(墓直), 무덤을 분묘(墳墓),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 무덤을 다른 데로 옮김을 천묘(遷墓), 부모의 거상 중에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 동안 사는 일을 시묘(侍墓), 오래 된 무덤을 고묘(古墓), 예전에 전사한 병사의 시체를 한데 몰아서 묻던 무덤을 도묘(都墓), 널리 알려진 무덤으로 묏터가 좋아서 자손이 잘되어 나가는 무덤을 명묘(名墓), 조상의 산소를 살펴봄을 배묘(拜墓), 지관을 데려다가 묘지를 가려잡음을 상묘(相墓),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일컫는 말을 구묘지향(丘墓之鄕), 먼 윗대 조상의 무덤을 일컫는 말을 고현분묘(高玄墳墓),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