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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省墓)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말한다.
省 : 살필 성(目/4)
墓 : 무덤 묘(土/11)
(유의어)
간산(看山)
배묘(拜墓)
성추(省楸)
전묘(展墓)
참묘(參墓)
성묘는 봄·가을에 묘를 살펴서 손질하는 민간 의례이다. 주자 '가례'에 의하면 성묘는 묘제(墓祭)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성묘에 제례의 절차가 합쳐져 나중에 묘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성묘의 형식은 크게 보아 분묘의 손질과 배례(拜禮)로 나뉘어진다. 성묘는 죽은 조상의 육체가 묻혀 있는 장소에서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속에는 조상숭배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현대의 분묘는 조상의 혼과 육체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 후손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전묘(展墓), 배분(拜墳), 배소례(拜掃禮) 또는 상묘의(上墓儀)라고도 부른다. 주자의 '가례'에 의하면 성묘는 묘제(墓祭)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성묘에 제례의 절차가 합쳐져 나중에 묘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손여제(孫汝濟)의 '예서유편(禮書類編)'에 의하면, 묘제는 진나라 때의 여묘(廬墓)주1로부터 시작되어, 당나라의 개원(開元, 713∼741) 연간에 한식상묘(寒食上墓)의 풍속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배소례에 대해서는 '개원례(開元禮)'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기제사를 지내기 하루 전날에 묘의 영문(瑩門) 밖에서 재배하고 봉분에 올라가 주위에 심은 나무들의 안팎을 두루 살펴 세 번 돌아보고 가시나무와 칡넝쿨 · 잡초를 잘라 베어내고, 다시 영문 밖으로 나와 재배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제록(祭錄)'에 의하면, 벼슬길에 얽매여 타향으로 나가 있어 제 때에 배소를 하지 못하면 한식날에 집에서 제사로 대신해도 된다고 하였다.
또한 '외서(外書)'에 따르면 10월 1일에 배분(拜墳)을 하는데, 이것은 서리와 찬이슬이 내릴 때에 느끼는 감정 때문이며, 한식 때에도 관습에 따라 배분을 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이굴(理窟)'에는 한식과 10월 1일의 전묘(展墓)주3는 초목이 처음 생기고 죽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가례'에 따르면 묘제는 3월 상순에 날자를 택해 지내도록 되어 있으며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4대 이상의 조상은 한위공(韓魏公)의 설명에 의해 10월 1일에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3월의 묘제에 사용되는 축문은 "계절의 기운이 차례로 흘러 바뀌고 비와 이슬이 봉분을 적시기 때문에, 이것들을 쓸어내려 봉분을 깨끗이 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10월 묘제의 축문은 "초목의 잎이 뿌리로 돌아가는 때를 맞아 근본을 갚을 일을 생각하게 되어 감히 봉분을 깨끗이 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성묘는 봄과 가을에 묘를 손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가 당나라 이후에 봄의 성묘는 한식, 가을의 성묘는 10월 1일로 고정되었고, 그 뒤 언제부터인가 제례의 형식이 첨가되어 묘제로 발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부터 이 배소례가 있었던 것 같다.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초, 한식, 단오, 추석에 묘에 가서 배소를 해왔으니, 어떻게 폐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날 아침 일찍 사당에서 천식(薦食)을 하고 묘에 가서 상을 차려 배례하는 것이 좋다. 만약에 묘가 멀면 2, 3일 전에 묘소에 가서 재계하여 상을 차리고 배례한다"고 하였다.
또한 송인(宋寅)은 "시제는 국법에 얽매여 증조까지만 지내는데, 묘제와 기제는 모두 고조까지 지내는 것이 옳으며, 5세조(五世祖)는 한식과 추석에, 6세조 이상은 단지 한식에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구(鄭逑)의 '한강집(寒岡集)'에 따르면, 명절의 묘제는 우리나라에서 가묘(家廟)를 세우기 전에 행해오던 것으로서, 가묘를 세운 다음에는 '가례'에 따라 지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한식과 추석에는 '가례'에 의해 묘제를 지내고, 정조와 단오에는 간단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조호익(曺好益)은 '지산집(芝山集)'에서, 명절의 묘제는 예가 아니나,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주자나 이황(李滉)도 역시 종래의 풍속을 따라 없애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보아 성묘는 대체로 16세기 중반까지는 묘제와 관계없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뒤에는 묘제의 형식으로 발전 또는 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성묘가 묘제의 형식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가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당시에는 옛날부터 행해오던 관습인 성묘와 '가례'의 묘제가 함께 행해졌거나, 이를 절충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에는 예학자들의 학설이나 해석에 따라 가문이나 지방에 의해 성묘나 묘제의 시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대체로 지금까지 변해온 것을 살펴보면, 정초에는 차례만, 한식에는 성묘만, 추석에는 차례와 성묘를, 그리고 10월에는 4대 이상의 조상에 대한 묘제가 각각 행해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성묘의 형식은 크게 보아 분묘의 손질과 배례(拜禮)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형식은 죽은 조상의 육체가 묻혀 있는 장소에서 직접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속에는 조상숭배의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조상숭배의 한 유형인 묘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조상의 혼을 모시는 사당이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 현대의 분묘는 조상의 혼과 육체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 후손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성묘는 묘제라는 형식으로, 그 숭배대상이 근친으로 한정되면서,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으로 보인다.
성묘(省墓)
성묘(省墓)란 조상의 무덤에 주기적으로 잡초를 제거하고 약간의 음식을 마련, 약식의 제사를 지내는 일을 일컫고 있는데 대개 음력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약 보름간에 걸쳐 행해진다. 따라서 때가되면 타지에 나갔던 사람들은 물론 정착하고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묘 준비에 열중한다. 성묘에 쓰이는 도구는 조금씩 다른데 예취(刈取)를 한다는 점은 동일한데, 동부지역에서는 낫과 돌사이에 낀 잡초를 베기 위한 호미를 사용하며 서부지역에서는 호미만을 사용하여 성묘에 임하고 있다.
낫을 사용할 경우 1인이 한자리의 묘(墓)를 성묘하는데 약 15분∼20분 정도의 시간이면 되나 호미만을 사용할 경우 약 1시간정도의 시간을 요하고 있어 조상의 묘가 많고 자손이 몇 명 안되는 집안에서는 낫의 사용이 바람직하다. 여기도 장단점은 있다. 낫을 사용할 경우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게 되며 예취하는데 있어서 그 크기가 불일정하여 대강 예취를 하게 되는데 호미만을 사용할 경우 시간은 오래 걸리나 깨끗하고 시원하게 조상의 묘를 다듬을 수가 있다.
성묘 절기(節氣: 백로를 일컬음)만 되면 일가 친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떠들썩하게 되는데 모듬 벌초(伐草)라 해서 혈연끼리 몰려다니면서 협동하여 벌초를 하게 된다. 조상대대로 이 벌초에 대해 관심이 없는 집안은 없었다. 그러기에 지금도 이 벌초에 대한 관념은 여전하다.
불행하게도 잘 내려오던 한 혈연이 어느 대에 자식을 두지 못해 대가 끊기면 자연적으로 조상의 산소를 그대로 방치하게 되는데 방치된 산소가 1년 2년 해를 거듭할수록 잡초가 우거지고 각종 나무씨가 흘러 들어 뿌리를 내리게 되어 손을 대기가 어려울 정도로 변하는데 이런 산소는 골총이라 불리고 있으며 성묘를 다니다 보면 군데 군데 눈에 띠게 된다. 대개 성묘객들은 이러한 골총을 보게되면 산터를 잘못써서 후손이 끊겨구나. 즉, 묘 자리를 잘못 선택하여 후대가 끊겨 오늘에 이르렀구나 하고 믿게 된다.
육지부에서는 성묘시 벌초를 하고 약간의 약식 제사 음식을 마련 산소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도 옛적에는 그렇게 차례(茶禮)를 지냈다는 말도 있으나 언제부터인지 그런 풍습은 사라지고 그대로 벌초만을 하고 벌초뒤에 행하는 약식 제사는 팔월 보름 추석절(秋夕節)과 함께 지낸다.
옛말에 조상의 묘에 벌초를 안하면 기일제사(忌日祭祀)때에 조상이 잡초를 머리에 쓴 채 온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8월 15일전에 벌초를 끝내고 추석절을 지내게 되는 것이다. 이 벌초는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 풍습이고 또한 좋은 인상을 주는 풍습으로 호평되고 있다.
省(살필 성)은 눈(目)으로 작은 것(少)을 살펴본다는 뜻으로 보다, 살피다가 된다. 성찰(省察), 반성(反省)이 있다. 또 덜 생(省)으로 읽으면 아끼다, 줄이다는 뜻이 된다. 생략(省略)이 그렇다. 墓(무덤 묘)는 莫과 土의 결합(結合)으로 莫의 아래에 있는 大는 본디 艸의 변형이므로 해(日)가 아래 위의 풀숲 사이에 빠져 있는 형상(形狀), 곧 서산(西山)에 지려고 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莫(막)의 본디 뜻은 어둡다, 해가 지다가 된다. 후에 금지(禁止)로 전용(轉用)되자 해를 뜻하는 日을 덪 붙여 暮(저물 모)를 새롭게 만들었다. 곧 묘(墓)는 어두운 땅(土), 무덤인 것이다. 묘비(墓碑), 묘제(墓祭), 공동묘지(共同墓地), 분묘(墳墓) 등이 있다. 성묘(省墓)라면 조상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겸하여 예(禮)를 올리는 것으로 일명 배분(拜墳), 배소례(拜掃禮)라고도 한다.
봉분(封墳) 주위의 나무나 풀을 돌아보고 가시나무나 잡초 등을 잘라내 깨끗이 정리하는 것으로 보통 벌초라고도 한다. 그런 다음 간단히 음식을 올리고 조상을 추모하며 동시에 가족간의 유대를 다지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중국 사람들은 청명(淸明)에 성묘를 하는데 소묘(掃墓)라 부른다. 우리의 경우 설, 단오(端午), 한식(寒食), 추석(秋夕) 등 4대 명절에 성묘를 했는데, 지금은 보통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한다.
한식(寒食)의 성묘는 풀이 잘 자라게 하는데 목적이 있고, 추석(秋夕)의 성묘는 이듬해에 잘 자랄 수 있도록 정비하는데 목적이 있다. 물론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곧 효(孝)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설날과 추석이란 글에서, 우리나라 민간절기에 8월 15일에 성묘하는 것을 추석이라고 한다고 추석을 민간 풍습이라고 말했다.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이 안정진(安正進)의 질문에 답하는 글에서 3월 상순의 벌초는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에서 비롯되었지만 한식에 묘소에 참배하고 추석에 벌초하는 것은 중국의 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於禮無見)고 말한 것처럼 추석 성묘는 중국에는 없던 우리만의 풍속이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기승을 부리면서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 추석 성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중국에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인조(仁祖) 27년(1649) 송영보(宋英甫: 송시열)에게 답하며 송명보(宋明甫: 송준길)에게도 함께 보이다는 글에서 추석 때의 묘제(墓祭: 성묘)는 내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설행(設行)하지 말도록 명했고, 가묘(家廟)에만 약간의 주과(酒果)를 올리도록 시켰다고 말한 것이 이런 사례다.
이를 고민한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중국과 조선의 풍속을 배합해 새 기준을 만들었다. 양(陽)의 기운이 생겨나는 동지(冬至)와 음(陰)의 기운이 생겨나는 하지(夏至)에는 가묘(家廟)에 제물을 올리고, 풀이 자라는 한식과 곡식이 익는 추석에는 무덤에 전(奠)을 올린다는 것이다. 그는 영조(英祖) 33년(1757) 설날 제례(祭禮)를 고(告)하는 글(告辭)을 지어 조상들께 이를 고유(告由)했다.
안정복은 추석 성묘는 가야(伽倻)의 수로왕(首露王)에서부터 시작된 동방(東方)의 풍속이라고 보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매년 정월 3일과 7일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추석)에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祭奠)으로 제사지냈는데,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는 가야가 망한 후 영규(英規)라는 자가 음사(陰祀: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되는 자가 드리는 제사)를 행하다가 사당의 대들보에 깔려 죽자 그 상관 충지(忠至)가 수로왕(首露王)의 직계 규림(圭林)에게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석 성묘는 우리 민족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풍습이다.
옛 사람들이 조상의 분묘를 좋은 곳에 쓰고자 했던 것은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상의 혼령이 골육을 계승한 후손과 소통한다는 생각에서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여러 조상들을 함께 모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42세 때인 정조(正祖) 2년(1778) 세도가 홍국영(洪國榮)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했다가 양호맹(梁浩孟)의 개성(開城) 금학동(琴鶴洞) 별장으로 이주했다. 이때 박지원은 개경(開京)의 남원양씨(南原梁氏)들이 가까운 산에 조상의 분묘를 모시고 이를 지키는 분암(墳菴)의 이름을 영원히 생각한다는 뜻의 영사암(永思菴)이라고 지은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영사암기(永思菴記)를 지었다.
영사암기에서 연암은 친족들은 살아 있을 때도 같이 사는 것이 좋고 죽은 후에도 한 묘지에 모시는 족장이 좋은데도 세상 풍속이 무너지면서, 장지(葬地)가 화복을 준다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효도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고 서로 믿는 마음을 능가하게 되어 각각 따로 산소를 두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박지원은 남원양씨들이 분묘들을 한 곳에 모신 것을 조상에 대한 효심이라며, 장차 그 씨족과 세대가 더욱 번창함을 볼 것이며, 그런 뒤라야 세속의 이른바 풍수지리설이 장차 우리를 속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풍수론(風水論)에서 지사(地師)를 초빙해 길지(吉地)를 가려 묏자리를 정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이는 예(禮)가 아니다. 어버이를 매장하면서 복을 바라는 것은 효자의 마음이 아니다고 묏자리를 기화로 발복하려는 세태를 비판했다.
왕릉(王陵)도 마찬가지였다. 효종(孝宗)의 장지를 정할 때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나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주장한 것처럼 오환(五患)이 없는 자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오환(五患)은 앞으로 ①도로 ②성곽 ③연못이 되거나, ④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⑤농지가 될 곳을 뜻한다. 왕릉(王陵)일지라도 이런 장소만 피해 효를 다하면 된다고 본 것이다. 산 자를 위한 발복(發福)이 아니라 산 혼령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곳이 묘소라는 것이다.
성묘(省墓)
명절에 조상들의 묘(산소)를 찾아가서 제사를 올리는 풍습을 말한다. 귀성과 겸하여 고향의 지인들을 만나기도 한다. 대개 설날과 추석에 이루어진다. 4월 초 한식에도 성묘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해당 시기에는 성묘를 하기 위해 전국 고속도로나 유명 공동묘지 인근 도로가 빽빽히 틀어차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특히나 한식 때는 봄철 꽃놀이 시즌과 겹치기 때문에 양대 명절 성묘길보다 도로가 더 막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3. 성묘를 못하는 예
3.1. 묘의 파괴
21세기 들어 공공기관 및 공기업 등 공공시설이나 학교, 회사, 도로, 철도 건설은 물론이고 골프장, 스키장, 수영장, 워터파크 등 위락시설 건설을 위해 시공사가 묘지를 파헤치는 바람에 조상 묘가 사라져 성묘를 못 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특히 골프장의 경우가 그렇다. 골프장들은 대부분 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명 리조트에서 강원도 홍천군에 소노펠리체 리조트를 건설할 때도 이런 사례가 나왔다. 여기서는 대명 측에서 골프장 건설을 위해 조상 묘 4기를 훼손해 후손들이 성묘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시공사는 해당 묘지를 무연고 묘지로 신고하고 진행한다고 한다. 문화재 복원을 위해 묘지가 파괴된 경우도 드물게 있다. 실제로 풍납토성의 경우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벽 내부에 무덤이 있었으나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인해 묘지가 사라졌다.
실제로 골프장 한가운데에 묘지가 있고 누군가가 골프를 치고 있다는 이유로 성묘를 하지 못하게 막은 사례도 있다. 물론 시공사가 묘지 파헤칠 때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한다. 만약 선산을 파헤쳤는데 그게 높으신 분들의 선산인 경우는 답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집안 소유의 산을 선산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애초에 남의 산에 몰래 묘지를 설치했다면 사유재산 침해다.
도굴 등으로 남의 묘지를 훼손하는 행위는 명백한 잘못이지만 관련 법적 규제가 전무하기 때문에 묘지에 대한 유족들의 권리가 지켜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괴담에서도 어떤 유원지나 오락 시설이 원래는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라는 식의 클리셰가 자주 다뤄진다.
명절 기간에 남자들만 조상들의 산소 및 제사상에 절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할머니, 며느리, 딸 등)는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성묘 시간에 배제되고 주방 일(음식 만들기, 설거지, 친지 대접)에 동원되기만 할 뿐이다.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원), 직장에 다니는 딸조차도 조상들의 선산에 절하러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보통 집안의 남자 어른들은 유교적, 체력적인 특징상 딸들과 휘하 여자 친척들을 성묘에 동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차별로만 오해할 수도 있는데 과거엔 선산들이 지금처럼 도심이 아니라 농촌과 산촌, 그 중 숲이나 들, 산에 많이 있었다. 양지 바르고 넓은 평야 지대 근처에 있는 곳도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선산들은 산과 숲 깊숙이 있다. 거기다가 뱀(특히 독사)과 멧돼지, 독충(특히 진드기)들도 목숨을 노리려고 많이 숨어 있다. 먼 옛날 조선시대까지는 호랑이도 많이 있었다. 이런 방해꾼들이 숨어 있는 환경에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한다는 건 우리 친척들 중 누구 하나 같이 데리고 가 달라는 개념없는 소리랑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산들이 훨씬 많았고 산소 인근에 주차하기도 쉽지 않았기에 선조들의 산소에 인사드리기도 쉽지 않았으며 거기다가 비포장도로도 흔했으며 등산도 해야 했다. 여기에 겨울에 있는 설날의 경우, 산에 눈이 쌓여 있는 관계상 더 그렇다. 성묘라는 부분을 빼고 겨울이 제일 산행하기 위험한 계절이다. 따라서 집안 남성들 중 건장하고 용감한 사람들만 모여서 소수정예로 움직여야 했다.
그나마 땅이 꽝꽝 얼어있으면 미끄러짐만 조심하면 되지만, 설날이 늦어져 2월인 경우, 땅이 녹기 시작하여 진흙탕인 것은 물론이요, 비탈길이 무너져 사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결국 소수인원으로 가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라서, 굳이 간다면 과거엔 가는 길에 방해되는 나뭇가지도 낫으로 쳐가며 산행에 익숙하고 군대에서도 했던 눈 치우기도 하며 체력이 좋았던 장손과 큰집 식구들, 휘하 남성 친척들만 가게 된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선산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굳이 시간들여 엄동설한에 산행을 한다는 것 자체도 결코 유쾌하진 않은 일이며, 과거엔 절을 올릴 때 신발은 물론 양말조차 벗어야 했었다. 핵가족화로 형제자매 자체가 적어진 요즘은 남녀 구분없이 데려가는 경우가 흔하며, 허례허식 지키느니 안전을 위해 장갑 및 신발도 신은 채로 절을 올리는 게 디폴트다.
명절의 음식도 계속 간소화, 간략화되며 장기적으론 사라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정확히는 명절에 친족들이 모인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한식날 조상들의 산소에 방문해서 지내는 묘사도 마찬가지다.
귀성과 마찬가지로 조상의 묘가 댐으로 인해 수몰되거나 북한 치하에 있는 경우 성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매년 설날과 추석이 되면 황해도, 평안도 계통 실향민들이 임진각 망배단에 모여서 북쪽을 향해 합동 차례를 지낸다. 함경도 계통 실향민들은 통일전망대로 가기도 한다.
공공기관, 공기업, 대기업 등에서 근무하시는 높으신 분들(최소 장관, 차관, 전무, 상무 이상급)은 명절때마다 자기 조상님들을 모신 무덤들이 있는 선산에 성묘하러 갈 때 자신들 혼자 가기 싫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이렇게나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고 자랑하러 갈 겸 휘하 임직원들을 강제로 참석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휘하 임직원들 입장에서는 명절휴일 다 빼앗기고 명절수당도 없어 이래저래 좋지 않다.
공공기관은 해당 공무원들을 좌천시켜 시골 오지로 내보내겠다느니 협박하고, 대기업은 해당 직원들을 정년 45세 이전에 해고시키겠다느니 협박하는 그런 식으로. 그래도 이런 경우는 옛날 1980~1990년대에나 있었던 일이고 당연히 이런 악습이 거의 없다. 이런 경우는 높으신 분들이 강제로 시킨다기보다는 휘하 임직원들이 스스로 해당 높으신 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귀성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이후에는 비율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나마도 고향에 부모님이 있는 경우가 여전히 남아있는 귀성과는 달리 장례 문화는 오늘날 화장이 90%를 차지하여(2021년 6월 기준) 절대적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단, 묘가 아니라 봉안당을 찾는 것도 성묘라고 부르기는 한다.
2020년대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유행으로 성묘 문화 쇠락이 더 빨라지고 있다. 그래도 재벌들은 일반 서민들과는 다르게 여러 개의 선산들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아직까지도 매장을 자주 하기에 성묘 비율도 더 높은 편이다.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의 원인이 성묘객의 실화로 밝혀짐에 따라 비판의 대상에 올랐다.
여담으로 성묘하면서 무덤의 잡초를 깎는 벌초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성묘대행업체라는 것이 생겨서 이런 업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성묘대행업이 대인기라고 한다. 교통정체가 너무 심해서 각 집안의 대표만 가는 경우도 있다.
산에 올라갈 때는 낡은 옷을 준비해서 성묘하는 것이 좋다. 잡초와 흙먼지를 다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하얀 신발도 바닥의 흙에 오염되기에, 어두운 색의 신발을 신는 것이 좋다. 부부 합장을 할 경우 봉안당을 1번만 들러도 부모 성묘를 다 할 수 있다. 성묘하러 가는 조상의 묘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면, 후손들은 명절 및 기일마다 한국사에 친숙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성묘객들이 향을 피우다 산불을 내는 일이 종종 있다. 봄에 성묘할 때 주의할 부분이다. 종이를 태우는 중국식 성묘 때문에 불이 나기도 하지만, 단순히 향만 피웠을 뿐인데 향의 불똥이 바람에 날려서 산불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 있는 설날과,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린 상태에서 맞이하는 추석과는 달리 한식은 봄 한복판에 있어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산불에 매우 취약하다.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의 원인도 성묘객의 실화로 밝혀졌다.
▶️ 省(살필 성, 덜 생)은 ❶회의문자로 작은(少) 것까지 자세히 본다(目)는 것으로 '살피다'를 뜻한다. 자세히 상대편을 본다는 대서 스스로를 깊이 반성(反省)한다는 뜻으로도 되고, 또 少(소)를 글자체(體)의 부분으로 하기 때문에 少(소), '덜다', '생략하다'란 뜻으로도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省자는 '살피다'나 '깨달다', '관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省자는 少(적을 소)자와 目(눈 목)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하지만 省자 갑골문을 보면 目(눈 목)자 위로 生(날 생)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초목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본래 省자는 작물이 자라는지를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살피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하지만 후에 백성들의 안위를 살핀다는 뜻이 파생되면서 '관청'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에서는 省자가 상위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省(성, 생)은 (1)옛날 중국에서 궁중(宮中), 금중(禁中)의 뜻 (2)중국의 옛날의 중앙(中央) 정부(政府). 곧 중서성(中書省) (3)근세 이후 중국의 지방(地方) 행정(行政) 구획(區劃)의 이름 (4)미국(美國), 영국(英國), 일본(日本) 등의 일정한 부문을 관리(管理), 지도(指導)하는, 중앙(中央) 행정(行政) 기관(機關). 우리나라의 부(部)에 해당함 등의 뜻으로 ①살피다 ②깨닫다 ③명심하다 ④관청(官廳), 관아(官衙) ⑤마을 ⑥대궐(大闕) 그리고 ⓐ덜다(생) ⓑ허물(생) ⓒ재앙(災殃)(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살필 고(攷), 살필 체(諦)이다. 용례로는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여 살핌을 성찰(省察), 제사에 쓸 희생을 검사하던 일을 성생(省牲), 이른 아침에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의 안후를 살핌을 신성(晨省), 자기가 한 일이나 행동을 잘못이나 허물이 없었는지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반성(反省), 스스로 반성함을 자성(自省), 깨달아 살핌을 감성(感省), 객지에서 부모를 뵈러 고향에 돌아감을 귀성(歸省), 깊이 반성함을 맹성(猛省), 자기의 사상이나 언동 따위를 스스로 돌이켜 봄을 내성(內省),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 깨우쳐 돌아봄을 경성(警省), 덜어서 줄임을 생략(省略), 글자의 획을 줄이어 쓰는 일을 생획(省劃), 문장 속의 어떤 구절을 생략하는 일 또는 그 글귀를 생구(省句), 줄이고 뺌을 생감(省減), 글자나 문구를 생략함을 생문(省文), 비용을 줄여서 아낌을 생비(省費), 절약해서 비용을 줄임을 검생(儉省), 간략하게 줄임을 약생(略省), 편지를 쓸 때 첫머리를 생략한다는 뜻으로 의례적인 인사말을 줄이고 곧바로 용건을 적을 경우에 쓰는 말을 관생(冠省), 알맞게 덜어서 줄임을 재생(裁省), 덜어서 줄임을 감생(減省), 그만두게 하여 제거함을 파생(罷省), 나무람과 경계함이 있는가 염려하며 몸을 살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성궁기계(省躬譏誡),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아 마음속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마음이 결백함을 이르는 말을 내성불구(內省不疚), 겨울은 따뜻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밤에는 잠자리를 정하고 아침에는 안부를 살핀다는 뜻으로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이르는 말을 온정정성(溫凊定省),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여 살핌을 일컫는 말을 자아성찰(自我省察), 자기 자신의 행위나 내면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을 일컫는 말을 자기반성(自己反省), 하루의 일 세 가지를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일일삼성(一日三省), 정신을 잃고 의식을 모름이란 뜻으로 사람으로서의 예절을 차릴 줄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인사불성(人事不省) 등에 쓰인다.
▶️ 墓(무덤 묘)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莫(막)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莫(막)은 暮(모)의 본디 글자이며 풀 저쪽편으로 해가지다, 해질 녘, 쓸쓸하다, 물건이 없다의 뜻이 있다. 土(토)는 토지(土地), 곳, 墓(묘)는 죽은 사람을 묻는 쓸쓸한 곳이다. ❷회의문자로 墓자는 ‘무덤’이나 ‘묘지’, ‘장사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墓자는 土(흙 토)자와 莫(없을 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없다’라는 뜻을 가진 莫자에 土(흙 토)자를 더한 墓자는 '땅에 묻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墓자는 죽은 사람이 묻혀있는 ‘무덤’이나 ‘묘지’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墓(묘)는 뫼의 뜻으로 ①무덤 ②묘지(墓地) ③장사(葬事)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덤 영(塋), 무덤 총(塚), 무덤 분(墳)이다. 용례로는 묘소로서 경계를 지은 구역을 묘역(墓域), 죽은 사람의 신분과 성명과 행적과 자손과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을 묘비(墓碑), 무덤이 있는 땅 또는 그 구역을 묘지(墓地), 무덤이 있는 곳을 묘소(墓所),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을 묘표(墓表), 무덤의 대표 연고자를 묘주(墓主), 뫼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하고 작은 돌비석을 묘갈(墓碣),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묘제(墓祭), 뫼를 쓸 때 구덩이 안에 널이 들어갈 만큼 알맞게 파서 다듬은 속 구덩이를 묘혈(墓穴), 무덤으로 가는 길을 묘수(墓隧), 신분이나 품계에 따라 정한 무덤의 구역을 묘계(墓界), 무덤 근처에 가꾼 나무를 묘목(墓木), 무덤 앞으로 들어 가는 어귀를 묘문(墓門), 무덤을 만드는 사람을 묘공(墓工), 묘지나 묘표에 쓴 글을 묘문(墓文),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묘석(墓石), 무덤 속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방을 묘실(墓室), 소출을 묘제의 씀씀이로 쓰는 논밭을 묘위(墓位), 남의 뫼를 지키고 거기에 딸린 일을 보살피는 사람을 묘직(墓直), 무덤을 분묘(墳墓),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 무덤을 다른 데로 옮김을 천묘(遷墓), 부모의 거상 중에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 동안 사는 일을 시묘(侍墓), 오래 된 무덤을 고묘(古墓), 예전에 전사한 병사의 시체를 한데 몰아서 묻던 무덤을 도묘(都墓), 널리 알려진 무덤으로 묏터가 좋아서 자손이 잘되어 나가는 무덤을 명묘(名墓), 조상의 산소를 살펴봄을 배묘(拜墓), 지관을 데려다가 묘지를 가려잡음을 상묘(相墓),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일컫는 말을 구묘지향(丘墓之鄕), 먼 윗대 조상의 무덤을 일컫는 말을 고현분묘(高玄墳墓),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