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우리는 추석을 맞이해서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하고 인사드리고, 조상님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던가 제사를 지내던가 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오게 되었을 때 유교적인 조상제사를 미풍양속이 아닌 미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금지했었지요. 그래서 진산사건에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첫 순교자가 되는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해서 100년 동안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만 여명의 순교자가 발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천주교가 처음 들어가게 될 때에 박해가 이어지는데 이것은 그 나라 기존의 풍습, 풍속과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고 토착신앙과의 마찰일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 그리스-로마 도시들에는 우상신전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우상 신전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제사를 드리고, 거기에서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어마어마한 양의 제물은 다시 일반 시장으로 유통되어서 시민들의 식탁 위에 올려지게 됩니다.
오늘 독서인 코린토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진 시기인 서기 55년 즈음,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 태양신 아폴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등 12개 신전이 있을 정도로 우상 숭배가 많았고 이 제물들도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교우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초대교회에서 서기 49년에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을 때,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을 했었지요. 그때 3가지 단서를 달았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음행, 목졸라 죽인 동물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코린토 교회는 그 이후에 결성된 교회입니다. 서기 49년에서 5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물론 코린토 교회도 이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초반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복음을 전하는 본질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교회가 꼴을 갖추게 되면서 구체적인 코린토 교회의 신앙생활도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입장은 한마디로 “너무 신경쓰지 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예, 원래 없는 것이고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으니, 세상 만물 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너무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시한 문제는 우상 숭배의 음식이 아닙니다. 그건 먹던지 말던지 그리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우상제물을 막 일부러, 함부로 먹어요. 남들 보이는 데서... 그러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양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그러면서 처음에 그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은 주님께 죄를 짓는 셈입니다.
성당에 다닌다고, 성경을 좀 배웠다고, 교리를 좀 안다고, 그것에 예외적인 부분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확대해석하거나 일부러 하는 꼴입니다. 예를 들어 매주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금육재를 “신부님께서 외식은 예외라고 하셨어” 하면서 일부러 외식한다든지, “난 환자니까 고기 좀 먹어줘야해, 난 예외겠지?”하고 확대해석하는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12시간 공복재를 지키던 것이 계속 현실과 타협하여 6시간, 3시간, 2시간, 지금은 미사 전 한시간인데, 어떤 분은 “미사 중에 영성체는 30분 뒤에 모시니까 미사 30분 전에까지는 먹어도 돼”하고 먹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래서 보는 이도 나쁜 걸 배우게 됩니다. 상대방 죄짓게 만드는 꼴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적인 면도 악영향을 받게 됩니다.
겉이 상하면 속도 곪습니다. 형식과 내용, 본질적인 면과 표면적인 면 둘 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영육 간에 건강하고 내면과 외면이 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우리가 영육 간에 건강하고 내면과 외면이 건재했으면... 아멘...
아는것이 걸림돌이 될 수도있겠네요.
그정도는 괜찮을걸?
사람이니까...
그럴수도있지...등등
나도 부족한머리로 남을 죄짓게하진않았는지 돌아보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