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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과 초록빛 수목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이반 바조프 국립극장
다수가 알법한 익숙한 여행지를 선택하는 건 그곳엔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킬 매력이 존재해서다. 바꿔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낯선 여행지는 보장된 기쁨 대신 불확실한 도전과 색다른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발칸반도가 대표적이다. 특히 장수국가라는 이미지에 가려 여행지로 선뜻 떠올리기 힘든 불가리아는 알고보면 발칸반도 여행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은은한 장미향 너머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모스크와 성당이 공존하고, 유기농채소가 선사하는 신선한 자연의 맛으로 차려낸 식탁과 때묻지 않은 자연경관이 불가리아를 오롯이 채운다.
탐스러운 진분홍 꽃송이가 가득한 장미화원. ‘장미의 나라’라는 애칭답게
전 세계 로즈오일(Rosa oil)의 절반 이상이 불가리아에서 생산된다.
활기 넘치는 소피아의 메인 스트리트, 비토샤 거리.
음울한 역사를 딛고 피어난 장미처럼, 소피아
불가리아인은 꽃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제외하고 어딜가나 꽃물결이 넘실댄다. 단연 돋보이는 꽃은 장미다. 불가리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즈오일 생산국이다. 특히 국토 중심부에 자리한 카잔루크는 매년 봄이되면 장미꽃 향기가 천지를 진동한다. 날카로운 가시가 매혹적인 향기를 호위하듯 감싼 장미는 애잔한 역사를 간직한 불가리아와 닮았다. 불가리아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다. 로마제국에 정복당한 이후 1382년 오스만제국에 점령당해 약 500년에 이르는 긴 억압과 실정의 암흑기를 견뎠다. 이후 러시아(구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을 쟁취해 제국을 세웠지만 그마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또 한 번 러시아 군대에 의해 독일로부터 해방돼 공산국가의 길을 걷다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비로소 민주공화국이 되었고, 2007년 유럽연합에 가입해 현재에 이른다.
황금빛 돔이 인상적인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
근엄한 표정으로 대통령궁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교대식.
/ 유럽의 도시 중에서도 소피아는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로, 로마 시대 흔적이 곳곳에 산재한다.
유럽의 고도 중 하나인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Sofia)는 낡고 쇠락한 건물대신 고풍스러운 건축물로 시선을 모으고 거리는 활기 넘치는 사람들로 평화롭기 그지없다. 음울한 지난 역사의 흔적은 9월 9일 광장, 레닌광장 등 여전히 남아있는 거리의 이름이 대신할 뿐이다. 특히 소피아의 중심가 비토샤 거리(Vitosha Boulevard)는 현지인과 여행객이 가장 즐겨찾는 명소다. 녹음이 우거진 가로수와 유명 브랜드 매장이 입점한 우아한 파스텔톤 건물이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름모를 뮤지션의 거리공연은 자유분방한 거리분위기를 한껏 들뜨게 한다. 습도 없는 쾌청한 날씨와 인파를 헤치며 걷지 않아도 되는 한적함까지, 걷기에 이보다 완벽한 조건이 또 있을까 싶다.
이리저리 헤매듯 걷다보면 7,000년에 가까운 도시의 흔적과 조우한다. 지하철 공사중 우연히 발견한 로마 시대 세르디카(Serdica) 유적은 옛 터전 그대로 복원 전시 중이며, 그 옆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반야 바시 모스크(Banya Bashi Mosque)가 자리한다. 오스만제국의 유명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 1489~1588)이 설계한 이 모스크는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다. 종교 박해를 피해 지하에 세운 성 페트카 교회(Saint Petka Church)를 비롯한 크고 작은 동방정교회 건축물도 인상적이다. 그 가운데 황금빛 돔을 얹은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이 단연 돋보인다. 소피아의 랜드마크답게, 한 번에 5,000명이 입장해 미사를 볼 수 있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오스만제국과 싸우다 전사한 군인, 특히 러시아 군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네오비잔틴 양식의 성당 내부는 신비한 분위기의 성화로 가득하다. 마치 신의 가호가 그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듯.
불가리아인이 가장 즐겨 먹는 눈처럼 하얀 치즈가 곱게 뒤덮은 샵스카 샐러드.
흰 눈송이를 닮아 스노 화이트(Snow White)라고도 하는 스네잔카(Snezhanka) 샐러드.
꾸덕한 요구르트에 마늘, 딜, 올리브유, 소금 등을 넣어
동그랗게 만든 뒤 으깬 견과류를 토핑해 차갑게 먹는 애피타이저다.
고소하고 바삭한 식감이 매력적인 바니차.
꾸밈없는 자연의 맛
팩트 체크를 하자면, 현재 불가리아는 유럽에서 기대수명이 가장 짧은 나라에 속한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던 옛날에는 장수하는 이들이 많았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국민 대다수가 도시에 거주한다. 간편한 패스트푸드를 즐겨먹고, 스트레스를 흡연으로 해소하는 인구비율도 높다. 로도피산맥(Rodopi Mountains) 주변의 몇몇 마을만 장수 국가의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가리아의 가정식은 여전히 건강한 맛을 중시한다. 조리과정은 최소화하고, 양념도 소금과 후추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유기농으로 키운 푸릇푸릇한 제철 채소가 매일 식탁에 오른다. 샐러드가 없으면 식사를 못한다고 할 정도다. 투박하게 썬 채소에 치즈와 올리브유를 곁들이는 샵스카(Shopska)는 불가리아인이 사랑하는 샐러드 중 하나다. 레시피는 간단 그 자체. 깍둑썰기한 토마토와 오이, 그리고 매운맛을 뺀 양파에 올리브유를 두른 후 짭조름한 페타치즈를 올리면 완성이다. 추운 겨울에는 우리네 김장 김치처럼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만든 ‘키셀로 젤레’를 담가 샐러드 대용으로 먹는다. 불가리아 시골 마을에서는 키셀로 젤레를 담그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월동 준비 중 하나다.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이 매운맛에 특화돼 있다면, 불가리아인은 시큼한 맛을 즐긴다. 불가리아에선 3,000년 전부터 요구르트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유에 박테리아를 넣고 하루동안 발효과정을 거치면 끝이다. 시큼한 맛이 전부인 ‘키셀로 믈리아코(Kiselo Mlyako)’는 불가리아식 전통 요구르트로, 불가리아 지역 내에서만 생기는 락토바실러스 불가리쿠스라는 유산균이 발생하 것이 특징이다. 별다른 첨가물 없이 본연의 맛 그대로 먹거나 요리양념으로 활용한다. 순두부처럼 몽글몽글하고 걸쭉한 키셀로 믈리아코를 면 보자기에 싸서 하룻밤 걸어두면, 수분이 쏙 빠지면서 덩어리가 지는데 이를 소스나 샐러드로 만들어 먹는다. 잡곡을 발효해 만든 보자(Boza)는 슈퍼마켓 진열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불가리아 국민음료다. 시고 고소한 미숫가루를 탄 물맛이다. 소화를 돕고 포만감도 커 식사에 곁들여 마신다. 사실 맛만 놓고 보면 키셀로 믈리아코나 보자 모두 시큼털털한 맛 때문에 쉽사리 다시 손이 가지 않는다. 그때마다 구원투수가 되는 건 역시 빵이다. 불가리아의 빵은 담백하고 맛있다. 특히 페타치즈를 넣어 오븐에 구운 바니차(Banitsa)는 바삭한 페이스트리를 연상시킨다. 얇은 반죽을 겹겹이 쌓고 그 사이사이에 치즈나 시금치, 버섯, 양배추, 햄 등 다양한 재료로 맛을 낸 바니차는 현지인의 든든한 아침 메뉴이자 솔푸드로 사랑받는다.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 건물의 벽과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은 성화.
지진과 화재로 훼손된 건물을 재건했으며, 불가리아 유명 예술가들이 참여해 복원됐다.
감탄이 터져 나오는 세븐 릴라 레이크(The Seven Rila Lakes) 트레일.
한 뼘 더 건강해지는 여정
불가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다.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지만,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을 경험하기에는 더없이 완벽하다. 소피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자리한 릴라 국립공원(Rila National Park)은 불가리아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으로, 공원 내 위치한 릴라산맥은 발칸반도에서 가장높다. 장엄한 대자연의 품속을 걷는 하이킹 명소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릴라 수도원을 품고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발 1,000m가 넘는 깊숙한 산속에서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을 만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첩첩산중 계곡물 소리만 고요히 울려 퍼지는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은 누구라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소망을 기도하고픈 숙연함이 묻어난다. 자연의 품안에서 고독과 수행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은둔자 이반 릴스키가 10세기에 설립한 릴라 수도원은 불가리아의 심장이다. 종교활동 외에 불가리아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불가리아인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요새를 연상시키는 안뜰로 들어서면 600년 이상 된 떡갈나무 고목이 세월의 무게를 받치고 서있다. 교회와 예배당, 역사박물관을 비롯해 순례자와 여행객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까지 두루 갖춘 대단지다. 아쉽게도 교회 내부는 사진과 영상 촬영이 불가하지만, <성경>을 묘사한 정교한 프레스코화와 제작 기간만 12년이 걸렸다는 릴라 십자가 등은 신비하 고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릴라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세븐 릴라 레이크(The Seven Rila Lakes) 트레일은 빙하 호수 7개를 이어 걷는 하이킹 코스로 유명하다. 해발 2,000m가 넘는 곳을 걸어야 하기에 체력적으로 만만치 않지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압도적 풍광은 더없이 황홀하다. 특히 여름에도 곳곳에 녹지 않는 눈이 남아 있어 짙푸른 초목과 투명한 호수가 더욱 신비하게 느껴진다. 호수는 저마다의 생김새에 따라 이름을 품고 있는데, 낮은 호수(Lower Lake)를 시작으로 물고기 호수, 클로버 호수, 쌍둥이 호수, 신장 호수, 눈 호수 그리고 일곱 번째인 눈물 호수(Tear Lake)에 다다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새도 우짖지 않는 깊은 고요가 밀려온다. 릴라 수도원을 둘러 보며 차분해진 마음은 자연의 품안을 누비며 한결 경건해진다.
✺ 불가리아(Bulgaria)의 공식 명칭은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이다.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에서 흑해를 끼고 있는 국가. 수도는 소피아(Sofia)이며, 면적은 111,002㎢, 인구는 6,687,717명(2023년 추계), 화폐는 불가리아 레프이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이며, 국민은 대부분 불가리아인, 터키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가리어가 공용어이고, 종교는 불가리아정교, 이슬람교이다. 도시인구의 비율이 높으며, 8년제 기초교육이 무상의무교육으로 실시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불가리아인들의 출국이 크게 늘었다. 국화는 장미이다.
✵ 불가리아 국장 가운데에 그려진 빨간색 방패 안에는 왕관을 쓴 금색 사자가 그려져 있으며 방패 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 시대에 사용된 왕관이 올려져 있다. 방패 양쪽에는 왕관을 쓴 두 마리의 금색 사자가 그려져 있고 방패 아래에는 두 개의 참나무 가지와 열매가 장식되어 있다. 국장 아래쪽에 있는 리본에는 불가리아의 나라 표어인 "단결은 힘이 된다"("Съединението прави силата", "Saedinenieto pravi silata")라는 문구가 불가리아어로 쓰여져 있다.
✵ 이반 바조프(Ivan Vazov, 1850-1921)는 불가리아의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시·단편소설·장편소설·희곡에는 불가리아의 농촌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이 깃들어 있으며 불가리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스테판 스탐볼로프가 불가리아에서 반러시아 정책을 폈을 때 오데사로 망명해(1886~89)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인들의 시련을 그린 연대기 형식의 걸작 장편소설 〈멍에 Pod igoto〉(1894)를 쓰기 시작했다. 스탐볼로프가 실각한 뒤에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98~99년에 교육장관을 지냈다.
그밖에 연작 서사시 〈잊혀진 자들에게 바치는 서사시 Epopeya na zabravenite〉(1881~84), 중편 〈사랑받지 못하는 자 Nemilinedragi〉(1883), 장편 〈신세계 Nova Zemya〉(1896)와 〈카잘라르의 여제 Kazalarskata Tsaritsa〉(1903)·〈스베토슬라프 테르테르 Svetoslav Terter〉(1907), 희곡 〈하쇼베 Hashove〉(1894)·〈심연을 향해 Kam propast〉(1910)·〈보리슬라프 Borislav〉(1910) 등이 있다.
김성호, ‘남한산성에서 본 서울’, 45.5×45.5cm. 현재 KB GOLD&WISE 과천 전시 중
먼동이 터오는 도심의 찰나의 여명이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듯하다. 매일 새벽 반복되는 일상적인 순간이겠지만 삭막한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도시의 야경이나 새벽, 또는 빗길 풍경을 그려온 김성호 작가는 실제 자연이나 도시 풍경이 전하는 느낌, 그 이상의 서정적 감동을 전한다.
[참고문한 및 출처: 글과 사진: 《KB 국민은행 GOLD &WISE, 2023년 08월호, 글: 이은혜(자유기고가)》, 《Daum, Naver 지식백과》|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