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二十. 다시 만나지 못해도…
“꼭 와야 해. 알았지?”
“응. 나중에 봐.”
“지금 일해야 해?”
“왜?”
“난 끊고 싶지 않은데… 계속 끊으려고 하잖아.”
“료… 내가 안 가르친 사이에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당연하잖아. 난 아네고…의 학생이라구.”
“그래, 그래. 나중에 보자. 나 일해야 해.”
“서운하지만… 알았어.”
료였다. 오늘 저녁에 카페 정모가 있으니까 꼭 오라는 전화.
그것도 아니면 자기를 영영 만나주지 않을 것 같다고… 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료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만나기 힘들었다.
재민과의 일이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해서가 그 첫번째 이유이고
두번째는 내가 재민씨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이었다.
그의 말을 믿을지 아닐지 나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하지만 뭔가… 확실한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나 재민씨가 아니라고 결정을 하면 료를 선택할 수 있을까?
이것조차 의문스러웠다.
아~ 멀리까지 생각하지 말자.
미래에 대한 고민은 현실을 괴롭힐 뿐 발전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인터랙티브입니다. 아~ 차대리님.”
이재민 팀장 밑에서 일하는 차대리였다.
“실장님 외근 중이신데 전화드리라고 할까요?”
“아~ 그러세요? 그럼 핸드폰으로 해봐야겠네요.”
“요즘 많이 힘드신가봐요? 목소리가 안 좋으시네요.”
“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회사 전체가 비상이거든요. 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2주 동안 계속해서 철야니… 죽겠어요.”
“캐논때문에요?”
“네. 컨셉 다시 잡고 다시 촬영하고 마케팅 다시 수립하고… 캐논 진행했던 모든 부서가 죽을 맛이었어요. 근데 광고는 다시 만들면 되는데… 팀장님이 문제에요.”
“이팀장님요?”
“이팀장님, 지금 자리가 위태 위태한 상황이거든요.”
“왜요?”
“캐논이 원래 다른 회사에서 하던 걸 이팀장님이 가지고 온 거였어요. 캐논 매출이 상당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니 캐논에서 난리가 났죠. 한 번 떨어진 이미지는 다시 올리기가 힘든데 어떻게 할꺼냐고, 다시 광고 회사를 옮기겠다… 일단 광고에 대한 손해 배상뿐만 아니라 새로 만들어지는 광고 제작비까지 모두 저희 회사가 물게 됐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게 딱 이팀장님이 지게 된거죠. 이미지 손상된 거 다시 올리는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 내야 하는 데다가 책임 소재까지… 캐논 광고 때문에 집에도 안 들어가시고 회사에서 살다시피하며 새로 광고 만들고 다 했는데… 오늘 이팀장님 어떻게 처리할껀지 임원진 회의가 있을 꺼라고 하네요. 그래서 저희 팀 전체가 지금 좀 어수선해요.”
“이팀장님은?”
재민씨의 안부를 묻는 내 질문이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 차대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다른 광고 때문에 회의 중이세요. 대단해요. 저같음 손에 일이 안 잡힐텐데…”
“그러시군요. 어떻게 캐논 일은 마무리가 되셨어요?”
“네… 워낙 이팀장님이 일을 잘 하시니까 새로 나온 광고도 잘 나왔고 다른 것도 문제없이 진행되어 가는 중인데… 가장 큰 문제는 이팀장님이죠 모… 팀 전체가 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라… 에쿠… 이런 이야기 하면 안되는데… 민대리님 이거 비밀인 거 아시죠?”
“네, 그럼요. 힘내세요. 이팀장님 일은 잘 해결되겠죠.”
차대리와의 전화를 끊고 나니, 약간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힘들었겠구나. 그런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인데 철모르는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선뜻 그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그가 먼저 내밀지 않은 손을 억지로 잡아 당기는 것은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그에게 전화하면 아무 말없이 울거나 왜 힘든데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그를 닦달해댈 것이 뻔했다.
그러면 그는 더욱 힘들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민이라는 여자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내겐 없었다.
정말 그에게 친구일 뿐일까?
사귄 적이 있다고 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서 그는 정말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미안함과 의문스러움이 교차했다.
그런 마음이 하루 종일 나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재민씨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 궁금했다.
카페 회원들이 모두 웃고 떠드는 자리, 난 그들과 웃으며 술잔을 나누고 있지만 내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누군가가 테이블 밑에 있던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놀라 쳐다보니 료가 나를 향해 그냥 입모양으로 ‘괜찮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손이 참 따뜻했다. 따뜻함과 함께 전해오는 두근거림. 나쁘지 않았다.
그때 내 핸드폰 진동소리가 울렸다.
액정을 보니 재민씨였다.
나는 그것을 들고 한참동안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끊겼다.
그리고는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료가 내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말없이 내 손을 꽉 힘을 주어 쥐었다.
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세번째 핸드폰 진동이 울렸을 때, 나는 료에게서 손을 빼서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는 아무 말없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약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의 숨소리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음이 아파 와 찢어지는 듯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동안 아무 말없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내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와 줄 수 있어?”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어디에요?”
나는 술집으로 들어가 내 가방을 집어들었다.
나는 미안하단 소릴 남기고 급하게 술집을 나왔다.
그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돌아보았다.
“어딜 가는 거야?”
“료, 미안해. 나 지금 가야 해.”
“그 남자… 아네고를 힘들게 했다고.”
“알아. 하지만 그건 오해였어.”
“오해?”
“료… 미안해. 나 그 사람 많이 좋아해. 아니 사랑해. 상처받았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을 아래로 떨구고는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해도… 지금 가면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에게… 그에게 갈꺼야?”
“료, 미안해.”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료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난 지금 그 사람을 원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내 팔을 잡았던 료의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료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도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료가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인 체 그렇게 서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두 번이나 상처를 주다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인데…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내 마음도 그에게 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나는 재민씨를 원했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료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너무나 힘들어할 재민의 손을 잡고 싶었다.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재민씨가 있는 8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불이 모두 꺼있는 사무실.
저 안쪽 별도로 만들어진 사무실만이 불이 켜져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민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초췌해 보였다.
며칠 전 나를 만날 때도 이랬었나?
그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케 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는지…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난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가 나를 와락 안았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그는 내 품에 안겨 흐느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내 볼에도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마에, 그의 입술에 키스해주었다.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않으리라, 더 이상은…
첫댓글 차~암 남자와여자의 친구관계라... 깨끗이 잘린 휴지끝처럼되지는 않는것 같던데.
그러게요... 뭔가 냄새가...
재미있게 읽어네요.....글쎄요~남녀의 친구관계라.....??..다음편 기대~~
다음 편도 열심히 써서 올리겠습니다!
결국은 재민씨와??? 료가 넘 불쌍한거 같아요..ㅠㅠ
저도 피같은 눈물이 철철~
저도 료가 넘 불쌍한거 같아요..아무리 생각해도 재민씨 양다리 같은데요..--;;
료를 불쌍하게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매일매일 아침마다 글이 하나씩 올라와 있어서 너무 좋았었는데... 많이 바쁘신건가요..? 글이 2개 올라오면 참 기쁘지만.. 담엔 또 언제 올라올지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답니다~~^^
죄송합니다. 성실 연재 약속 드렸건만... 되도록이면 열심히 올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