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번째 편지 - 스누피 가든
얼마 전 제주도를 갔다가 우연히 <스누피 가든>이라는 데를 들렸습니다. 저는 스누피가 막연히 미국 만화 주인공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기에 스누피 가든은 아이들이 가는 그런 곳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주에 스누피 가든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갈 생각을 하지 않다가 이번에 시간이 남아 시간을 때울 겸 아내와 아들과 같이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기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규모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주차장도 예상보다 매우 넓었고, SNOOPY GARDEN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인 넓고 흰 건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고 입장해 보니 만화 주인공 스누피와 그의 친구들을 캐릭터로 하여 재미난 장면을 많이 연출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테마파크에 흔한 것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저는 무신경하게 전시물을 따라 걷다가 한 곳에서 발을 멈추었습니다. “아빠, 스누피는 그냥 만화가 아니라 굉장한 철학을 지닌 만화예요. 글을 자세히 읽으시면 충격이 느껴지실 거예요.” 입장할 때 아들이 해 준 말이 떠오르는 장면을 만난 것입니다.
“My life has no purpose, no direction, no aim, no meaning, and yet I’m happy. I can’t figure it out. What am I doing right?” (내 인생에는 목표도, 방향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하다. 왜 그런 걸까? 나는 뭘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평생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방향을 살피고, 목적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스누피는 말합니다. “목표, 방향, 목적, 의미 없이도 그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면 그 기분을 분석하지 말고 그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제가 살아온 삶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는 스누피의 생각이 궁금해져 그때부터 만화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코너를 도니 이런 만화가 걸려 있습니다.
“This is my report on how to live..”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They say the best way is just to live one day at a time..” (한 번에 하루씩만 사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네요.) “If you try to live seven days at a time, the week will be over before you know it..” (만약 7일을 한꺼번에 살려고 하면 순식간에 일주일이 끝나버릴 거예요.)
머리를 한 대 맞는 느낌입니다. 저는 늘 일주일, 한 달, 한 분기의 계획을 세우고 삽니다. 그런데 스누피의 인생철학은 To live one day at a time (한 번에 하루씩만 사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스누피는 미국의 작가 찰스 M 슐츠(1922~2000)가 1950년부터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신문 잡지에 무려 50년간 연재했던 네 컷짜리 만화 ‘피너츠’(Peanuts)의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찰리 브라운과 그의 반려견 스누피, 그리고 여러 친구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이 펼쳐집니다. 미국인들의 삶과 문화 속에 스며든 만화입니다. 약 7만 9000여 편이 나와 있으며, TV 드라마 영화로도 제작됐고 75개국에 약 2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돼 전파됐습니다.
스누피의 인생철학은 이어집니다.
“Learn from Yesterday, Live for Today, Look to Tomorrow, Rest this Afternoon”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바라보며. 일단 오늘 오후는 쉬자)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인생은 배우고, 즐기고, 준비하는 일상의 긴장과 노력의 연속인데 ‘일단 오늘 오후는 쉬자!’는 스누피의 생각이 너무 멋있습니다.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매 코너마다 감탄의 연속입니다. 키 낮은 벽 너머를 통해 다른 전시장을 볼 수 있는 곳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Getting out into the open like this makes you look at life differently” (탁 트인 곳으로 나오면 너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어.)
저에게 오늘 탁 트인 곳은 바로 스누피 가든입니다. 이곳에서 제 삶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스누피의 이어지는 생각입니다.
“It’s fun to see new places and new things” (새로운 곳을 보고 새로운 무엇을 하는 것 그것이 즐거움이야.) 저는 Fun이 Happiness로 읽혔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려면 새로운 곳을 여행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누피 생각도 같은 모양입니다. 다음 코너를 가니 스누피가 여행에 대해 일갈한 말이 나옵니다.
“I’m a great believer in travel” (나는 여행의 위대함을 믿어)
저는 이번 여름휴가를 스페인으로 가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많은 분들이 소매치기, 퍽치기를 조심하라고 하셔서 갈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그러나 스누피 조언에 따라 여행의 위대함을 경험해 보아야겠습니다.
스누피 가든의 묘미는 전시장이 아니라 2만 5천 평 가든에 있습니다. 스누피 가든을 만든 분이 수년 전부터 10만 평의 땅에 조경용 나무를 심어 오다가 테마파크와 수목원을 결합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2020년 그중 2만 5천 평에 스누피 가든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스누피는 낙엽을 좋아하고, 페퍼민트는 담장 그늘에 앉아 있길 좋아한다. 피너츠의 아이들이 소통하는 장소는 항상 언덕과 담장, 나무 밑과 같은 자연이다. 그곳에서 인생 이야기를 한다. 언덕, 야구장 등 피너츠 모티브 컷 속에서 나오는 장면을 재현해 11개의 ‘에피소드 가든’을 만들었다. 그걸 제주 자연 속에 섞어서 테마파크를 만들어, 진짜로 피너츠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었다.”
스누피 가든을 만든 분이 언론에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수목원이 워낙 넓다 보니 걸핏하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저희도 몇 번을 뱅뱅 돌았습니다. 이런 관람객을 위한 명언이 있습니다.
“When Lost, Follow your compass“ (길을 잃었을 땐 너의 마음속 나침반을 따라가.) 인생을 살다 보면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가 곧잘 있습니다. 스누피는 마음속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럴 때마다 누군가 만든 표지판을 찾으려 헤맸습니다.
수목원을 돌다가 멋진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스누피 레이크입니다. 잔잔한 호숫가에서 찰리와 스누피가 이야기 나누는 만화를 그대로 옮겨온 곳입니다.
"Someday, we will all die Snoopy" (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어) "True! but on all the other days, we will not." (맞아, 그러나 나머지 날에는 살아 있잖아.)
저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늘 죽음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스누피의 말처럼 우리 모두 죽지만 나머지 날에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줍니다.
6시 스누피 가든 관람 종료 시간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시간이 더 있다면 몇 시간도 더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다음에 오면 책 한 권 들고 하루 종일 정원에서 책만 보고 싶습니다.
저는 기념품 파는 가게에서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최초의 스누피 만화를 모아 놓은 책 한 권을 샀습니다. 한동안 스누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주를 다시 찾고 싶습니다. 스누피를 만나러..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2.8.1. 조근호 드림
<출처 : 조근호의 월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