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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 (1-5합본)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부처님께서는 10단계의 지혜로 밝히셨다. 이때 첫 번째 단계가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로 삼마사나 냐나(sammasana ñāṇa)이다. 하지만 청정도론의 저자이신 붓다고사께서는 깨달음의 지혜를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통합해서 밝히셨다. 이때 세 번째 단계가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다.
현재 수행자들에게 널리 통용되는 지혜의 단계는 16단계의 지혜이다. 삼마사나 냐나(sammasana ñāṇa)에서 삼마사나(sammasana)는 이해, 분명한 이해, 현상을 바르게 아는 이라는 뜻이다. 냐나(ñāṇa)는 앎, 이해, 지혜라는 뜻이다. 이때 냐나(ñāṇa)는 통찰 지혜인 무상, 고, 무아를 뜻하는 빤냐(paññā)와는 다르게 일반적인 이해, 또는 통찰 지혜 이전의 지혜를 말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여기서 삼마사나 냐나(sammasana ñāṇa)는 분명한 앎, 분명한 이해라고도 한다. 위빠사나 지혜의 첫 번째 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두 번째 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에 이르면 세 번째 단계에서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에 이른다. 이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안다.
세 번째 단계인 현상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에 이르면 몸의 통증이 처음에 일어나서 점점 커지다가 나중에 차츰 작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쁨이나 슬픔도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다양한 현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을 알 때 차츰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함께 성숙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괴로움이라는 지혜도 알며 내 힘으로 되지 않아서 무아의 지혜도 함께 계발된다. 물론 이때의 무상, 고, 무아는 지혜의 시작이라서 완성된 무상, 고, 무아는 아니다. 이 순간에 여린 새싹 위빠사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라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 수행자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의 대상은 오온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오온을 가지고 살면서 생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밖에 있는 다른 대상이 아닌 오온에서 알아야 한다. 이때 오온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바로 무상, 고, 무아다. 그래서 오온이 무상, 고, 무아인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이것이 무상, 고, 무아의 지혜인지 모른다.
스승이나 주석서에서 말하기를 수행자가 무상을 모르면 위빠사나 수행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수행자가 얼마 동안 수행하다가 무상을 느끼지 못했다고 실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상, 고, 무아가 어떻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수행자가 무상을 느끼고도 이것이 무상이라고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수행은 반드시 스승과의 면담이 필요하다.
수행자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상을 추론해서도 안 된다. 이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냥 거기 대상이 있어서 단순하게 알아차릴 때 지혜가 계발된다. 그래야 대상이 가진 무상, 고, 무아의 진실이 드러난다. 이처럼 세 번째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무상, 고, 무아는 40가지가 있다.
이때 40가지의 다양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일정한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행자마다 이런저런 현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무상, 고, 무아 40가지는 무상 10가지, 고 25가지, 무아 5가지로 나누어서 나타난다. 이러한 40가지는 모두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수행자가 오온을 떠나면 안 된다.
처음에 무상은 10가지가 있다. 첫째, ‘무상(無常)함’을 아니짜또(aniccato)라고 한다. 이때의 무상은 항상 하지 않고 변한다는 뜻이다. 아니짜또(aniccato)에서 접미사 또(to)는 형용사로 ‘함’을 의미한다. 둘째, ‘분해됨’을 빠로까또(palokato)라고 하는데 둘로 깨짐, 쇠퇴, 파멸, 괴멸을 의미한다. 빠로까(paloka)의 접두사 빠(pa)는 크게 강조하는 뜻이고 로까(loka)는 세계라는 의미이지만 오온을 뜻한다.
그러므로 오온이 크게 분해되고 부서지고 흔들리고 움직이면서 쇠퇴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는 파멸이다. 그래서 오온을 가진 인간은 매 순간 죽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매 순간의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생명도 일어나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오온은 움직이고 진동하며 계속 흔들려서 인간은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완전하다.
왜 불완전한가? 오온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온은 불안하고 항상 들떠있다. 내가 평안하지 못하고 들떠 있는 것은 오온이 항상 움직이고 흔들려서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흔들림이 1초도 가만히 있지 않고 너무 강해서 몸과 마음은 무상하다.
셋째, ‘병이 남’을 이띠또(ītito)라고 하는데 아프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병이 생겨남, 망가져서 고장이나 쓸모가 없음, 아무렇지도 않다가 고뇌가 생김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이 모두 무상이다. 넷째, ‘걸음’을 짜라또(carato)라고 하는데 걸을 때의 흔들림이다. 몸을 움직여서 걸을 때 신체의 모든 부분이 흔들리는 것이 무상이다.
다섯째, ‘쉽게 파괴됨’을 빠방구또(pabhaṅgu)라고 하는데, 오온이 잘 부서지는 것, 너무 쉽게 망가지는 것이 무상이다. 여섯째, ‘안정되지 못함’을 앗두와또(addhuvato)라고 하는데 불확실한, 영원하지 못한, 그대로 있지 않아서 무상함을 말한다. 특히 몸과 마음의 느낌은 그것 자체가 끊임없이 변해서 항상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무상이다.
일곱째, ‘부실함’을 아사라까또(asārakato)라고 하는데 부실(不實)한, 공허한, 가치가 없는, 헛된 것을 뜻하는데, 이것의 핵심은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여덟째, ‘권력의 덧없음’을 위바와또(vibhavato)라고 하는데 권력, 재산, 번영, 흥행의 덧없음이다. 또는 비존재(非存在), 단멸(斷滅), 유무(有無)로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도 있다.
아홉째, ‘조건 지어진’ 것을 상카따또(saṅkhatato)라고 하는데 합성된, 준비된, 원인의 합성으로 산출된,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유위법은 오온이 원인과 결과로 상속되어서 흘러가는 것으로 윤회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오온이 유위법이 열반에 이르면 무위법이 되는데 이것을 궁극의 실재라고 해서 최상의 진리라고 한다. 이처럼 인과의 연속이 무상이다.
열 번째, ‘죽음의 먹잇감’을 마라미사또(mārāmisato)라고 하는 오온 자체가 이미 죽음의 먹잇감인 상태가 무상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서 가면서 오온이 생존한다는 것은 무상을 의미한다. 이처럼 오온의 무상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이미 드러나 있는 상태다.
이와 같은 무상은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지혜이기 때문에 마음을 숙고해서 보지 못하면 무상인지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수가 많다. 이러한 무상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무상삼매인 찰나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빠르게 일어나는 찰나 집중의 힘이 없어서 처음에는 1선정의 일으킨 생각이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1선정의 집중력이 없으면 무상의 지혜가 나기 어렵다.
이상 무상 10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상함, 분해됨, 병이 남, 걸을 때의 흔들림, 쉽게 파괴됨. 안정되지 못함, 부실함, 권력 재산 번영 흥행의 덧없음과 비존재 단멸론 유무를 느낄 때, 조건 지어진 상태인 원인과 결과를 느낄 때, 오온이 죽음의 먹잇감으로 느낄 때다. 이상의 무상이 모두 10가지다. 이러한 무상은 오온의 실재하는 법이다.
이러한 법을 알기 위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꿰뚫어서 아는 통찰 지혜가 생긴다. 하지만 자아를 가지고 욕망으로 사는 인간은 이렇게 실재하는 진리를 설령 알았다고 해도 애써 피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부단한 노력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지혜다. 어떤 의미에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이 이런 지혜를 얻으려면 선업의 공덕이 받쳐주는 때가 필요하다.
이러한 때가 오지 않으면 알려는 의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때를 당겨주는 것이 괴로움이다. 괴로움이 있을 때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면 이 순간에 숨어있던 무상의 지혜가 드러난다. 그래서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이 성숙해야 한다.
다음으로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오온에서 나타나는 고(苦)는 25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의 지혜는 무상의 지혜가 난 뒤에 변화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괴로움이다. 이러한 괴로움을 지혜로 보려면 괴로움과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이때 괴로움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긍정적으로 대해야 괴로움의 지혜가 생긴다.
이처럼 현상을 바르게 아는 단계에서 집중력이 생기면 오온이 한순간도 똑같지 않은 변화를 보고 이에 대한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이러한 괴로움을 크게 나누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심신의 괴로움이다. 이것을 고고성(苦苦性)이라고 한다. 두 번째가 변화로 인해서 생기는 괴로움이다. 이것을 괴고성(壞苦性)이라고 한다. 세 번째가 오온을 가지고 살면서 원인과 결과로 생기는 괴로움이다. 이것을 행고성(行苦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25가지의 괴로움은 모두 이러한 세 가지 종류에 속하는 하나의 괴로움이다. 이때 세 가지 종류의 괴로움은 괴로움을 느끼는 정도가 다음으로 갈수록 괴로움이 더 커진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느끼는 당면한 괴로움이 가장 큰 것이 바로 세 번째 괴로움이다.
고 25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괴로움’을 둑카또(dukkhato)라고 하는데 고통, 아픔, 고뇌, 불안, 불만족, 불편함, 불행이라는 뜻이다. 둑카는 오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언어다. 하지만 둑카(dukkha)는 두(du)와 카(kha)의 합성어로 하찮고 실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가피한 것을 크게 생각해서 괴로워한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병’을 로가또(rogato)라고 하는데 질병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서 죽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가지고 태어난다. 오온을 가졌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항상 병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몸의 병과 마음의 병에 시달리며 산다. 그러므로 이때의 병은 타고 태어난 병을 말한다.
셋째, ‘부스럼’을 간다또(gaṇḍato)라고 하는데, 몸에서 나타나는 혹, 종기, 종양이라는 뜻이다. 넷째, ‘가시에 찔림’을 살라또(sallato)라고 하는데 화살에 찔림, 바늘에 찔림이라는 뜻이다. 살면서 생기는 이러한 고통을 말한다. 다섯째, ‘사악함’을 아가또(aghato)라고 하는데 죄, 죄악, 잘못, 증오, 고통, 불행, 화, 비참, 근심, 걱정, 역경이라는 정신적 괴로움을 뜻한다.
여섯째, ‘병의 아픔’을 아바다또(ābādhato)라고 하는데 질병 때문에, 질병의 아픔이라는 뜻이다. 몸과 마음에 병이 생겼을 때의 괴로움이다. 일곱째, ‘불행함’을 우빳다와또(upaddavato)라고 하는데 재난, 위험, 태풍과 같은 것을 겪을 때의 괴로움이다. 여덟째, ‘두려움’을 바야또(bhayato)라고 하는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괴로움이다.
아홉째, ‘위험한’을 우빠삭가또(upasaggato)라고 하는데 위험한, 불행한, 화난, 재난을 당한이라는 뜻으로 접두사와 전치사의 의미로 쓰인다. 열 번째, ‘의지하지 못함’을 아따나또(atāṇato)라고 하는데 의지할 것이 없는 괴로움이다. 열한 번째, ‘피난처가 없음’을 아레나또(aleṇato)라고 하는데 의지처가 없어서 숨을 곳이 없는 괴로움이다.
열두 번째, ‘기억이 없음’을 아사라나또(asaraṇato)라고 하는데 기억이 없어서 귀의할 곳이 없음. 피난처가 없는 괴로움이다. 열세 번째, ‘고난’을 아디나와또(ādīnavato)라고 하는데 고난, 재난, 화, 잘못, 과실, 위험, 불리함, 악한 결과, 나쁜 일을 겪을 때의 괴로움이다. 뜻하지 않은 여러 가지 불상사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다.
열네 번째, ‘변화의 법’을 위빠리나마담마또(vipariṇāmadhammato)라고 하는데 대상을 보는 순간 사라짐, 원래와 다르게 변질되는 괴로움이다. 열다섯 번째, ‘고통의 근원’을 아가무라또(aghamūlato)라고 하는데 망가짐의 뿌리가 되는 괴로움이다. 열여섯 번째, ‘살인자’를 와다까또(vadhakato)라고 하는데 살인자, 사형집행인, 처벌하는 사람이 살생으로 겪는 괴로움이다.
열일곱 번째, ‘번뇌가 있는’ 것을 사사와또(sāsavato)라고 하는데 오염된 것과 함께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원인과 결과로 흘러가는 유루의 괴로움이다. 열여덟 번째, ‘태어남’을 자띠담마또(jātidhammato)라고 하는데 태어남, 매 순간의 태어남, 생법(生法)을 겪는 괴로움이다.
열아홉 번째, ‘늙음’을 자라담마또(jarādhammato)라고 하는 데 늙을 수밖에 없는, 늙어가는 노법(老法)의 괴로움이다. 스무 번째, ‘병이 있는’ 것을 비야담마또(byādhamma)라고 하는데 병을 겪을 때, 병법(病法)의 괴로움이다. 스물한 번째. ‘죽음’을 마라나담마또(maraṇadhammato)라고 하는데 죽음의 고통, 죽는 순간에 겪는 사법(死法)의 괴로움이다.
스물두 번째, ‘슬픔의 상태’를 소까담마또(sokadhammato)라고 하는데 슬픔, 비탄, 우수, 슬픔의 상태가 모두 수법(愁法)이라는 괴로움이다. 스물세 번째, ‘비탄의 상태’를 빠리데와담마또(parideva dhammato)라고 하는데 비탄, 통곡, 애도, 슬픔의 괴로움이다. 이때의 슬픔은 수(愁), 비(悲), 고(苦), 우(優), 뇌(惱)의 아픔이며 모두 비법(悲法)이라는 괴로움이다.
스물네 번째, ‘불안한 상태’를 우빠야사담마또(upāyāsadhammato)라고 하는데 괴로움, 불안, 근심, 고난, 절망, 불안한 상태의 괴로움이 모두 고법(苦法)이다. 스물다섯 번째, ‘번뇌에 당함’을 상낄레시까담마(saṃkilesikadhammato)라고 하는데 번뇌, 갈애, 사견에 당하고 있는 상태가 모두 뇌법(惱法)이다.
이상 25가지의 괴로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괴로움, 병, 부스럼, 가시에 찔림, 사악함, 병의 아픔, 불행함, 두려움, 위험한, 의지하지 못함, 피난처가 없음, 기억이 없음, 고난, 변화의 법, 고통의 근원, 살인자, 번뇌가 있는, 태어남, 늙음, 병이 있는, 죽음, 슬픔의 상태, 비탄의 상태, 불안한 상태, 번뇌에 당함이다.
마지막으로 무아 5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이다’를 빠라또(parato)라고 하는데 내가 아니고 남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빠라(para)는 저쪽으로, 넘어서, 지고(至高)의, 다른, 낯선, 외부의, 외부 사람의, 라는 뜻이 있다. 수행자가 어느 순간에 나의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고 전혀 낯선 외부의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무아의 지혜다. 이런 상태를 지고의 행복이라고 한다.
둘째, ‘없다’를 릿따또(rittato)라고 하는데 없는, 공허한, 제거된 상태라는 뜻이다. 이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무언가가 별개이고 나와 관련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어 공허하게 느낀다. 이처럼 주체가 없어서 실체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 무아다. 몸과 마음은 있지만 이것을 주도하는 어떤 실체가 없어 주인이 없고 알맹이가 없다고 느낀다.
여기에는 오직 원인과 결과의 흐름만 있다. 그렇다고 몸과 마음 자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은 있지만 나의 몸과 마음이 아니고 단지 순간의 몸과 마음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 무아다. 공허하다는 것은 몸과 마음은 있지만, 이것을 마음대로 하는 주인공이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셋째, ‘빈’을 뚯차또(tucchato)라고 하는데 빈, 공허한, 버려진, 가차 없이 버려진, 이라는 뜻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느끼던 것을 가차 없이 버려서 나와 무관한 하나의 대상으로 보이는 상태다. 이때 감성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을 해서 나의 소유라거나 나라거나 나의 존재라고 보지 않고 이것을 버린 상태다. 그러므로 뚯차(tuccha)는 아무것도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말한다.
쓸모가 있으면 소유하려는 욕망과 집착이 생기지만 쓸모가 없으면 가치를 느끼지 못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다. 이때 비로소 무아의 지혜가 날 수 있다. 무아는 생각으로는 알 수 없고 이렇게 알 때 무아의 의미를 안다. 넷째, ‘공’을 순냐(suññato)라고 하는데 빈, 텅 빈, 공허한, 비실체적인, 현상적인, 공(空)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공은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므로 아(我)와 아소(我所)라든가 실체와 자성이 없는 것을 말한다. 공(空)은 실체가 없어서 단지 비어 있지 몸과 마음 자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은 없다고 부정하는 뜻의 무(無)가 아니다. 공은 실체가 없는 무아이다. 오온을 나의 것이고 나고 자아로 보지만, 이것은 나의 견해다.
공(空)은 두 가지가 있다. 해탈의 공과 무아의 공이다. 여기서 해탈의 공은 긍정적인 지혜이지만, 무아의 공은 부정적인 지혜다. 여기서 공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때 해탈의 공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완전하게 알아서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하지만 무아의 공도 가치가 없는 것을 알지만, 아직 완전하게 아는 해탈의 공이 아니라서 얼마간의 괴로움은 남아 있다.
그러므로 무아의 공에서 해탈의 공으로 넘어가려면 애욕의 빛이 바랜 상태에서 애욕이 완전하게 소멸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때 해탈의 공이 아라한의 공이다. 오온을,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있지만, 비어 있어서 비실체적인 것이라 공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은 마치 껍질을 벗겨도 아무것도 없는 파초 나무와 같다.
사실 나는 내가 있다는 꿈속에서 살지만, 홀연히 꿈을 깨고 보면 오온에서 남는 것은 무상, 고, 무아밖에 없다. 다섯째, ‘무아’를 아나따또(anattato)라고 하는데 무아(無我), 자아(自我)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아의 지혜는 깨달음의 최종적인 단계라서 모든 집착이 끊어진 해탈에 이른다.
이상 무아 5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이다, 없다, 빈, 공, 무아이다. 이상 5가지가 무아를 알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이 모두 유사해 보이지만, 약간은 다른 특징의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40가지의 무상, 고, 무아를 살펴보았다.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의 16단계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세 번째 단계인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인 삼마사나 냐나(sammasana ñāṇa)에 이르면 이상의 40가지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때의 무상, 고, 무아는 더 깊고 분명하게 아는 무상, 고, 무아의 초입 단계이다. 원래 16단계의 지혜는 무상이 5단계이고 고가 5단계이고 무아가 6단계이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의 지혜인 ‘분명하게 이해하는 지혜’는 무상의 단계에 있으면서 고와 무아의 지혜까지를 아는 초보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이때 나타나는 40가지의 무상, 고, 무아의 현상은 처음으로 법을 마주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의 지혜가 성숙하면 다음 단계인 ‘생멸의 지혜’가 성숙하여 더 깊은 무상의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단계의 지혜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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