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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무게 40㎏의 작은 사내는, 화폭 위를 기어 大作을 그렸다
박생광(朴生光古, 1904~1985)은 ‘진채화의 거장 화가이다. 호는 '그대로, 내고(乃古)'. 경남 진주 출신.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에 경도(京都)로 건너가 다치카와미술학원(立川酸雲美術學院)에서 수업, 일본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校)에 입학, ‘근대경도파(近代京都派)’의 기수인 다케우치(竹內栖鳳)·무라카미 가가쿠(村上華岳) 등으로부터 고전과 근대 기법의 결합을 시도하는 신일본화(新日本畵)를 배웠다. 1963년 경상남도문화상 수상, 1967년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 하였다.
그의 회화 양식의 변천은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1950년대 후반기까지의 수련기, 2기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4년까지의 추상화 시기, 3기는 1974년부터 1977년까지의 2차 도일 시기(渡日時期)로 다시 구상(具象)으로 전환하여 일본화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성향을 보이던 시기, 4기는 1977년 이후 한국적인 소재의 추구 시기이다.
그의 회화는 4기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이르고 있다. 초기의 일본화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샤머니즘·불교 설화·민화·역사 소재 등을 주제로 삼아 폭넓은 정신세계를 전통적인 색채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한국적 회화를 현대적 조형성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미술사적 위치는 우리나라의 채색화 부분에 새로운 가능성과 활로를 제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화로서 표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대표작으로는 「무당(巫堂)」(1981년)·「무속(巫俗)」(1983년)· 「청담대종사」, 「토함산해돋이」(1984년), 「명성황후」(1984), 「전봉준」 등이 있다.
“징검돌을 딛고 기우뚱거리며 내를 건너 한 늙고 가난한 화가의 집에 갔다. 방바닥에 그림이 가득히 펼쳐져 있어 (작품을) 딛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린내 나는 내 발자국이 그 위대한 노화가의 작품에 찍혀 역사 속에 남겨질 것을 생각하며 다시 징검돌을 건너 돌아왔다. 뭔가 장엄하고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이경성 전(前)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북한산 자락 우이천 언저리 허름한 국민주택에 살던 화가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의 집을 다녀오면서 쓴 글이다. 방바닥에 발 디딜 구석이 없었던 것은, 3평 남짓한 화실이 너무 작았던 탓도 있지만, 박생광이 그리던 그림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늙고 가난한 화가”는 3m 넘는 종이를 바닥 전체에 펼칠 수가 없어서, 한쪽을 그리고 나면 말아가면서 다른 쪽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한 번도 화면 전체가 화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린내 나는 발자국”이 작품 위에 찍힐 것을 이경성 관장은 염려했지만, 박생광은 그것도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 화가 자신은 아예 그림 위를 기어다니면서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157㎝ 키에 40㎏ 몸무게를 지녔던 ‘소인’ 박생광은 한 손에 붓을 들고, 기는 자세로 엎드리거나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 넓은 화폭 위를 굴러다니며 그렸다. 그러다 밤이 되면 방구석에서 “그냥 솜이불 하나 겹쳐 깔고 송충이처럼 기어 들어가 잔다”고 했다. ‘명성황후’ 같은 한국미술사의 빛나는 걸작이 그렇게 탄생했다. 박생광의 나이 80세 무렵 일이다.
◇ 갈고닦은 실력
박생광이 80세에 그린 1984년 작 ‘명성황후(明成皇后)’. 흰옷을 입고
평안히 눈 감은 명성황후와 대조적으로, 백성들의 절규하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개인소장
러일전쟁도(露日戦争圖:Russo-Japanese War, 1904. 2. 8~1905. 9. 5)
박생광은 러일전쟁(露日戦争:Russo-Japanese War, 1904. 2. 8~1905. 9. 5)이 한창일 때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고,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망명 갔다가 돌아와 1941년 작고했다. 모친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묘소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양친 모두 원래 고향이 전라북도 전주 인근이었다고 하나, 박생광이 태어났을 때는 몸을 피해 경상남도 진주에 터를 잡은 후였다. 박생광의 운명은 시작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를 화가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진주고등농림학교 재학 시절 그림에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일본인 교사가 1920년 박생광의 일본 유학을 도왔다. 박생광은 교토 회화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정통 일본화 기법을 기초부터 습득했고, 도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던 오치아이 로후(落合朗風) 화숙의 신임받는 조교로 성장했다. 이중섭·김환기(李仲燮·金煥基) 등이 활동한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했고, 메이로(明朗)미술전을 주 무대로 탄탄한 회화 실력을 인정받았다. 간혹 조선을 다녀가긴 했지만 박생광은 해방될 때까지 대체로 일본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일본에서 갈고닦은 그의 실력은 써먹을 데가 별로 없었다. 일본색(日本色)을 탈피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채색화 자체가 죄악시됐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것이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기에, 그는 고향 진주에서 무던히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아내가 대안동에 청동다방을 열어 겨우 생계를 유지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다. 전기료가 하도 밀려 독촉하러 자주 오는 이가 있었는데 ‘저리 열심히 그려도 어찌 이리 가난할까’ 안타까워 전기세를 대신 내줄 정도였다.
◇ 청담 스님과 박생광
박생광(朴生光, 1904~1985), ‘ 모란', 1970년대, 종이에 채색 ./ 개인 소장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모란과 범’, 1983년, 종이에 채색, 135×256cm.
끊임없이 정진하는 박생광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가 평생 가장 존경한 인물인 청담 대종사(靑潭大宗師, 1902~1971)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성철 스님(性徹, 1912~1993)이 “청담과 나 사이에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고 했던 성철의 지기 청담은, 박생광과도 오랜 친구였다. 청담과 박생광은 진주제일보통학교와 진주고등농림학교를 같이 다녔다. 학창 시절 3·1운동에 앞장서 일찌감치 옥고를 치른 청담을 박생광은 유달리 높이 보았다. 청담이 불교 입문 문제로 번민할 때 성금을 모아 그의 일본 유학을 도운 이도 박생광이었다. 그는 한때 불교에 귀의할 생각으로, 옥천사(玉泉寺)에 청담과 함께 수도하러 들어간 적도 있었다. 결국 청담은 득도한 후 박한영과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거쳐 해방 후 한국 불교 정화 운동의 선봉장이 됐지만, 박생광은 옥천사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나왔다. 술 생각이 나 안 되겠다며.
박생광은 스스로 말한 대로 “속정(俗情)을 떠나지 못해” 스님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청담은 어머니와 아내, 두 딸과 절연한 채 세속의 인연을 끊고 정진을 거듭했지만, 박생광은 결코 그럴 수 있는 위인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았다. 그는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내고乃古) ’(박생광의 호) 자신을 맡긴 채, 사랑도 고통도 온전히 느끼는 삶을 더 바랐다. 첫사랑이 폐병으로 죽자 이틀간 시체와 함께 지낸 후 영혼 혼례식을 올렸을 정도로 그는 타고난 순정파였다. 부인과 두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고, 남은 아들과 딸을 애절하게 사랑하던 그가 어찌 속세의 연을 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말년에 그림 모델 출신의 마흔 살 정도 어린 여인과 같이 살았다. “연애 감정 없이는 그림을 그릴 활력도 없다”고 했다.
◇ “그리고 싶은 그림”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당', 1982년, 종이에 채색, 130×70㎝, 국립현대미술관.
프랑스 파리 ‘85 살롱’ 공식 포스터 이미지로 채택작/ 가나문화재단
박생광, 청담대사 119x83.8cm 비단에 수묵채색 1980년대./ 대구미술관 임영근 기증
그렇게 속세에서 하루하루 흘러가던 박생광은 청담이 죽은 후 비로소 ‘각성’을 한 게 아닌가 한다. 1971년 박생광은 도선사(道詵寺) 주지였던 청담 가까이에서 살겠다며 우이동에 터를 잡았건만, 청담은 바로 그해 그만 입적하고 말았다. 입적 하루 전날에도 이화여대에서 강의하고 왔던 청담은 평생 한 가지 교훈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죽는 날까지 정진하라!
박생광은 1974년 70세 나이에 다시 일본에 가서 3년간 수련과 제작 활동에 집중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977년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생애 처음 후원자를 얻는다. 박생광이 먼저 부탁했다. “죽기 전에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으니 나를 도와 달라.” 그저 묵모란 한 점을 사려고 박생광의 집에 가는 징검돌을 건넜다가, 공무원 출신의 고향 후배 김이환이 그렇게 홀린 듯 후원자가 됐다.
박생광이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물감이 매우 많이 들었다. 한국의 오방색(五方色: 황黃·청靑·백白·적赤·흑黑)이 화면을 뒤덮은,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그림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석채(石彩) 값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당시 처음 후원한 물감 값만 300만원이었다고 한다. 동부이촌동 아파트가 평당 10만원 할 때였는데….
◇ 후세에 보여주고 싶은 것
청담이 불교에 입문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1981년 작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 개인 소장
박생광, ‘공작 위의 청담대종사’, 1982년
비싼 물감으로 작정하고 그린 박생광의 작품은 놀라운 것이었다. 일단 그는 청담 스님을 총 6점이나 그렸다.
청담이 출가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사바세계의 청담 대종사’는 3m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불교 탱화에서 본 것 같은 강렬한 색채와 빽빽한 화면 구성이 특징인데, 그렇다고 박생광의 작품이 불화(佛畵)는 아니었다. 그의 그림에는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박생광은 황해도 출신의 만신 김금화의 굿에도 심취했다. 1981년 김금화가 신딸에게 하는 신내림 굿을 박생광은 사흘 밤낮 잠도 안 자고 지켜봤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놀란 누군가가 무당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무당을 믿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면 모를까”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박생광은 불교·무속·민속(佛敎·巫俗·民俗)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한국의 ‘기층문화(基層文化)’를 탐구했다고 할 수 있다. 기층문화는 외래의 새로운 사상이 아무리 들어와도 저변에 깔려 변하지 않는 ‘민초(民草)’의 자생적 문화다. 한국의 민초는 온갖 애증과 고통을 안은 채, 아주 단순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아프지 않게 해 달라, 헛되이 죽지 않게 해 달라, 억울하지 않게 해 달라…. 뭔가 대단히 잘되기를 바라기보다, 그저 액운을 물리치는 데 만족한다. 한국의 기층문화는 애통함과 어리숙함과 염원이 뒤범벅돼 있지만, 또한 뭔지 모를 장엄함과 강인한 저력이 숨 쉬고 있다. 집에 걸기에는 너무 세고 무서운 이런 그림을 왜 그리냐는 말에, 박생광은 “후세에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문화의 뿌리를 더듬어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색채와 표현법으로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 화가의 최후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1985년 작 ‘노적도(老笛圖)’. 138.5x140cm, 종이에 수묵채색
누추한 모습으로 유유자적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담았다./ 대구미술관
최후에 그는 역사화를 그렸다. 1984년 ‘명성황후’를 완성했고 이듬해 ‘전봉준’을 그렸다. 다음으로 안중근과 윤봉길을 그릴 참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박생광은 이미 1984년 7월 후두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어 화가의 마음은 더 급했다. 하루 10시간 넘게 작업에 매달렸다. 김이환은 박생광이 후두암에 걸린 것이 늘 입으로 빨아서 다시 뱉어냈던 경면주사(鏡面朱砂:주홍색 또는 적갈색이 나는, 황화수은을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 광물의 결정체)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물감 중에서도 유독 비쌌던 주사(朱沙)를 쓴 후에 박생광은 붓을 꼭 입으로 씻었다. 입안에서 애무하듯 물감을 빨아 당긴 후 물감 접시에 조심스레 뱉어 다시 사용했다. 이 대목에서 도선사 옆으로 흐르는 우이천 계곡물도 아껴 쓰라고 했던 청담의 얘기가 떠오른다. 흐르는 물조차 아랫물을 취할 사람들이 넉넉히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 그런 청담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박생광 또한 물감을 아껴 후세에게 보여줄 그림이 그리 많았던 것이다.
이경성은 박생광의 ‘사바세계의 청담대종사’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걸어두었는데, 프랑스미술협회장이었던 아르노 도트리브(Arnaud d'Hauterives)가 이 작품을 그린 화가를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1984년 징검돌을 함께 건넜다. 도트리브는 좁은 화실에 쪼그려 앉은 화가에게 이듬해 파리 살롱에 특별전을 꾸미고 싶다고 했다. 박생광의 작품 ‘무당’이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렸던 ‘85 살롱’ 공식 포스터 이미지로 채택돼 그해 파리 전역에 걸렸다.
그러나 박생광은 파리에 가보지도 못하고 그해 영면했다. 그가 그린 마지막 작품은 ‘노적도(老笛圖)’였다. 누추한 노인 하나가 긴 피리를 입에 물고 표표히 구름 위로 날아가는 그림이다. 박생광은 화실에서 “송충이처럼 기어 들어가” 잠을 자면 간혹 꿈을 꾼다고 말했다. “내가 두 손을 꼭 쥐면 어린애가 되어 두둥실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는 그렇게 꿈같이 이승을 떠났다.
✵ 박생광(朴生光) 추 모 송 / 具 常
한평생 몸과 마음 그림에다 바치셔서
촛불처럼 스스로를 오롯이 사르시니
한국화 그 뿌리위에 새 경지를 여셨네
깊은 산 수행인의 탈속한 모습에다
천성으로 타고나신 보물이 그 마음씨
가셔도 우리 가슴에 그림 함께 사시네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전봉준’, 1985년, 종이에 채색, 360×510㎝, 국립현대미술관.
‘전봉준’은 기세가 넘치는 전봉준의 모습을 화면 중앙에 모시고, 그 주위에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동학군을 묘사했다. 붉은색을 중심으로 오방색을 화려하게 사용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역 전봉준(가운데)을 비롯한 모든 인물과 배경이 강렬한 색채 안에서 꿈틀댄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을 실감나게 재현한 작품이다. ‘호남제일성’이라고 쓴 현판이 뒤에 보여 전주 지역임을 알게 한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배경처럼 깔고 전봉준은 하얀 옷을 입어 강약 대비 효과를 극대화했다. 화면 아래 군함과 기마병, 대포 등이 있어 치열한 전투 현장임을 표현했다. 그런 가운데 닭과 황소가 있고, 그 사이에 누워서 절규하는 아낙네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과감한 색채 그리고 기운이 뻗치는 윤곽선 등 명작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박생광 회화의 채색 기법은 이렇다. 우선 목탄으로 대상의 윤곽선을 그리고 아교 물을 칠해 바탕에 스며들게 한다. 직선은 한꺼번에 내려 긋지 않고 끊어서 긋는다. 물감은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화면 위에 직접 원색을 칠한다. 물감을 칠하고 숟가락으로 걷어내고 다시 다른 색을 덧칠하여 중첩시키기도 한다. 오방색 중심의 원색은 강렬한 흡인력을 만든다. 작가 말년에는 분채(粉彩)보다 오히려 단청 안료를 즐겨 사용했다.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였다.
사실 한국은 채색화 전통의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유교 문화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회화사를 엮게 하여 채색화의 약세를 보였다. 채색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고려 불화 그리고 조선의 궁정 회화, 불화, 무속화, 이른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졌다. 생산된 작품의 숫자로 보나, 수용한 사람들의 숫자로 보나, 수묵화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게 채색화의 역사였다. 그런데 현재 대학에서 사용하는 한국회화사 교과서 같은 책을 보면 이른바 민화 작품은 완전 무시했다. 현재 미술대학에서 채색화를 가르치는 교수도 거의 없지만 배우는 학생도 별로 없다. 채색화 전통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이런 미술계 현실을 반성하고자 국립현대미술관은 개관 이래 처음으로 본격적인 채색화 특별전을 마련했다. 채색화의 기능과 현대성을 감안한 전시기획이었다. 이런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관객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채색화의 복권이다. 이런 시도의 전시장에서 박생광의 ‘전봉준’은 상징성이 매우 크다.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초가(Cottage)’, 종이에 채색, 68.0x45.7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탈(Mask)’, 1984년, 종이에 채색, 68.4×69.5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탈(Mask)’, 1984년, 종이에 채색, 67.5x69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탈과 학(Mask & Crane)’, 1981년. 종이에 채색, 69.6x68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탈’, 1980년, 종이에 채색, 29.5x49.7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 토기'.
박생광(朴生光, 1904~1985), ‘금산사의 추녀(秋女)',
고구려 고분벽화, 단청, 나전칠기 문양 등 우리 전통예술의 철학을 바탕으로 작업했으며, 샤머니즘, 무속의 색채는 주술적 기운을 느껴지게 한다.
전통적 미감, 단청색의 강렬함이 돋보임. 박생광, ‘꽃가마’, 1979년, 170.4×90.4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여인과 민속(Woman and Folklore)’, 1980년, 종이에 채색, 71×69 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시집가는 날(Married Day)’, 종이에 채색, 47.0×48.5cm.
박생광, ‘시집가는 날’, 80.30x80.3cm, 사후판화
박생광(朴生光, 1904~1985), ‘ 시집가는 날'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열반(涅槃)’, 1982년, 종이에 채색, 136.3x136.0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부처(Buddha)’, 1980년대, 종이에 수묵채색, 44x33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창과 불족(窓·佛足)’.
박생광 화백은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미술공부와 활동을 하였고 귀국후 역사화와 무속화에 심취하여 한국미술의 근원에 대한 많은 실험으로 한국 미술사에 남는 대표 작가이다. 민화의 해학적 표현과 초공간적 구성으로 역동적인 화면을 창출 하고 있다. 먹으로 밑선을 그은 뒤 채색하고 다시 밑선을 또렷이 마감하는 과정에서 강조된 마감선은 붉거나 검정이 겹쳐져 가장 독창적인 그의 회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탁몽(托夢)’, 1983년, 136x137cm.
‘탁몽(托夢)’은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 어떤 일을 이야기하며 무엇을 요구하거나 어떤 의사전달을 하는 것.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이브 1’, 1976년, 종이에 수묵채색, 100x91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힌두 신神 2, 1984년, 종이에 수묵채색, 137x136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여의주(如意珠:Mountain)’, 1967년, 종이에 채색, 196.0x140.2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당 2(巫堂 2:Shaman 2), 1982년, 종이에 채색, 135.8x135.8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속 6’, 1983년, 종이에 수묵채색, 138x98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속 16’, 1985년, 종이에 수묵채색, 137x135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속(巫俗:Shamanism), 종이에 채색, 135.7×134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당(巫堂)', 1980년, 종이에 채색, 136x140cm,/ 국립현대미술관.
박생광(朴生光, 1904~1985), ‘ 무속', 1981년, 종이에 수묵담채, 66x68.5cm,/ 대구미술관.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당(Shaman), 1982년, 종이에 채색, 136.3x136.3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무녀’, 1984년, 종이에 수묵채색, 137x136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창과 무속(Window and Shaman)’, 1982년, 종이에 채색, 50.2×45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장승(A Kid and Korean Milepost)’, 종이에 채색, 134.0x132.0cm.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1980년, 종이에 수묵채색, 74.5x76cm,/ 대구미술관.
박생광, ‘토함산의 해돋이’, 1981년
박생광(朴生光, 1904~1985), ‘가야금', 1983년, 종이에 채색, 113x85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여인(Woman)’, 종이에 채색, 67.8x45.5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세 여인(Three Women)’, 1982년, 종이에 채색, 70x69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 십장생1‘, 1981년, 종이에 채색.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십장생(Ten Symbols of Longevity), 1984년, 종이에 채색, 257.0x135.7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십장생’, 1979년, 종이에 수묵채색, 137x134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비천상(Flying Deva)’, 45x34.4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나여(裸女:Nude Woman), 1980년, 종이에 채색, 45.2x67.6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나녀 2’, 1982년, 종이에 수묵 채색, 69x47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옛 4(Ancient Times 4)’, 1983년. 종이에 채색, 136x136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창(Window)’, 종이에 채색, 55×40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창’, 1977년, 종이에 수묵채색, 41x55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Silver’, 1976년, 종이에 채색, 100.2x101.0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한라산도(Mt. HanRa)’, 1975년, Gold, ink and color on silk, 176.2x152.0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진주 북장대’, 1979년, 종이에 수묵채색, 69창, 41x55 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수춘(樹春)’, 수묵담채, 210×165cm, 1977년,
고등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 -p83 수록작품.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의랑순국도
박생광(朴生光, 1904~1985), ‘동해일출도’, 종이에 채색, 진주시립미술관.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소(A Bull)’, 1984년, 종이에 채색, 69×90cm.
박생광, ‘황소’,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
단숨에 그린 듯한 역동적인 곡선과 묵직한 먹선으로 소의 동세를 표현했다. /소마미술관
박생광, ' 소 (A Bull)', 연도미상, Ink on paper,
눈동자를 희게 남기고 동공을 큰 점으로 그려 흰 색이 도드라지는 극적 효과를 냈다./ 소마미술관.
‘그 날의 화엄’ 성철 종정 예하의 다비식 장면, 김호석 화백의 그림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조선일보 2023년 09월 02일(금)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드 경성(김인혜 미술사가), 윤범모, "강렬한 오방색, 한국 채색화 지평 열다"(동아일보, 2022.8.2일자. 28면), 문화재청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정보, Daum, Naver 지식백과/ 글 및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9월7일 목요일
가을의 시원한 산들 바람이 부는 목요일 아침입니다.
햇살은 여름 보다
더 뜨겁습니다.
아마 이 햇볕에 과일이나 곡식이 더욱 무르익는 것을 서두를 것 같습니다.
살아가며 하루하루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시도록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면 그게 행복이며 즐거움일 듯 합니다.
삶은 즐거움이 많을수록
건강하고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고 만나는 분들과 눈빛만 봐도 따뜻한 사랑이 느껴질 수 있는 나날를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