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들보다 조금 앞장서서 걸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처음 여자가 물었다.
“거의 다 왔는데요. 저기 보이는 언덕 쪽에서 모퉁이만 돌면 됩니다. 지금 혼자 살고 있어요”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뭔 표정을 짓는 것만 같았다.
“아니 뭐 잘못된 거 있나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댁이 혼자 사시기에는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숙희라는 여자가 말했다.
“얘 그런 사생활을 왜 묻는 거냐? 그건 실례야...”옆의 첫번째 여자가 말했다.
“내 성격이 그런 걸 뭐...난 뭐든지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 하잔아...”숙희 가 대답했다.
“이해 해 주세요. 얘는 늘 이런 식으로 말한답니다. 이제 거의 다 오지 않았나요?”
처음 여자가 물었다.
“다 왔어요. 바로 저기예요. 내가 집에 올라가서 차 키 가지고 올게요. 조금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내가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서두르세요. 토요일이라 길이 막혀서 파티시간에 좀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처음 여자가 말했다.
“나 참 여기 밖에서 기다리라고...”숙희 라는 여자가 좀 불만스러운 듯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내가 사는 집으로 올라갔다.
사실 내 결혼생활은 몇 년 전에 이미 끝장이 났다. 자식들 다 성장시키고 더 이상 가족에 대한 큰
의무감에서 벗어난 나이든 부부들처럼 우리 둘 사이에서도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할 소재가 없었다.
솔직히 서로에 대한 애정은 예전에 식어버렸고 남은 거라곤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처럼 떠밀려 결국은
죽음의 바다라는 종착역에 도달하는 인생처럼 그런 큰 의미없는 움직임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갈러 서기로 합의했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이렇게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의 1/3 이 혼자 살아간다는 홀가분한 1인가구 중의
하나다. 나는 지금 완전 백수다. 얼마 전까지 다니던 작은 건물의 경비직마저도 이젠 나이들어 짤렸다.
좀 힘이 드는 일이긴 하지만 요즘은 일용직 자리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도 아직 일은 더 하고 싶고 생활비도 더 벌어야 해서 구청의 일자리 알선센터 등에 구직의뢰는 해
놓은 상태지만 코로난지 뭔 염병 탓인지 도대체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몸은 어디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건강하다. 내 주위에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 등의 기저질환도 전혀 없어서 복용하는 약도 없다. 좀 불안한 건 통장에 얼마
남지 않은 은행잔고가 바닥을 점차 드러내고 있다는 경제적인 문제 뿐이다.
그나마 매달 들어오는 얼마 되지 않는 국민연금과 결혼해서 제법 반반한 직장다니며 자기들끼리는
그럭저럭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 아들놈 내외가 꼬박꼬박 매달 보내주는 일정액의 적은 용돈이 현재
내 수익의 전부다.
내가 지금 혼자 살고 있는 집은 2룸의 작은 빌라형 연립주택으로서 골목길의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다.
비록 집은 넓지 않지만 뒤 편으로는 작은 시립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남방형의 구조로서 햇볕도 잘 들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도 잘 들어오는 적어도 나 혼자 살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집이다.
아내와 헤어지면서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정리해서 정확히 반반식 나눠 가진 절반의 돈으로 마련한 누가
뭐래도 나만의 자유스런 스위트홈 이다. 내 집은 울 수 있을 때 울 수 있고,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고,
요리솜씨는 없지만 먹고 싶은 것 눈치 안 보고 맘대로 해먹을 수 있는 곳, 한마디로 누구의 의식과 눈치
볼 필요가 필요 없는 곳, 남에게서 어떤 자존심 상하는 동정과 간섭도 필요 없는 나만의 독립공간이다.
비록 혼자 사는 것이 때론 불편하기는 하지만 평생 가져보지 못한 나만의 자유을 만끽한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내 생애의 마지막 1/3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늘 하나의 축복
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어찌 보면 그동안 내 자식, 헤어진 처,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친지들에 대한 상식적이고 의무적인
도리 등 기본적 사회규범과 윤리의식을 지키기 위한 댓가로 치러야 했던 내 희생과 굴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왜 일찍이 이런 삶을 살지 못해왔던가 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갈라선 처와 함께 살고 있는 딸의 전화였다. 왠일인지 이런 한가한 주말의
전화는 분명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여보세요”나는 스마트폰을 가까히 입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빠세요. 별고 없으시죠?” 건너편 딸의 대답이었다. 몇 년 전에 지방대학을 졸업한 미혼인 내
딸은 아직도 제대로 된 직장을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신세다.
솔직히 내가 항상 마음에 부담을 지울 수 없는 딸이다.
내 딸은 분명 곤란하거나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연락한다. 물론 좋게 말해서 아빠로서 아직도 나를
어느 정도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아빠, 나 당장 급한데 백만원만 빌려 주세요. 곧 갚아 드릴게요” 내 딸의 요청이었다.
곧 갚는다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애비로서 그걸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왜 뭐가 그리 급한데...너는 그 정도 돈도 없니? ”나는 가능한 한 내 딸이 기분 바쁘지 않게 말했다.
나에게 딸이란 아비로서 죽을 때까지 늘 보살펴줘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지운 적이 없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빌려준 돈이 얼마인지는 아니?”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예, 알고 있어요. 며칠만 있으면 ‘알바’하는 직장에서 월급이 나오거든요. 이번엔 그 돈만은 우선
꼭 갚을게요. 저도 요즘 아빠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어요” 청산유수 같은 딸의 말이었다.
“알았다. 내일 송금해 줄 게..꼭 갚아라” 나는 말했다.
“네 엄마는 잘 지내시니?” 나는 덧붙여 묻는다.
“예 어머니는 다니시는 직장도 잘 나가시고 즐겁게 지내시고 있어요. 아빠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셔야 해요." 딸이 대답했다. 이렇게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당장“내 코가 석자인데 언제까지 다 큰 딸자식을 신경써야 하나?”갑자기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
왔다.“어쩔 수 없이 통장에 얼마 남지않은 잔고에서 또 돈을 보내야 하나...나도 여유가 없다고
냉정하게 끊었어야 했나?”잠시지만 마음속에 갈등과 번민이 오갔다.
이 와중에서도 오래 전에 읽었던‘고리오 영감*’의 비참한 말로가 떠 올랐다.
"다 소설 속에 글일 뿐이야...나는 결코 그런 삶은 살지 않을거야...”스스로 다짐했다.
문득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금 전 그녀들이 생각났다. 자동차 키를 어디에 두었나 하고 찾고
있는 중에 배도 고프고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내가 뭐 그들을 태우고 오늘 저녁에 일산까지 가서
춤을 춰야 하는가?”갑자기 회의감이 생겨났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내 차에 연료 게이지 마저도 빨간 경고등이 들어와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동차 기름도 채워야 하고 아니 내가 뭘 바라고 거길 간다고 약속했지? 에잇 모르겠다. 좀 치사하고
미안하지만 적당한 핑계되고 못 간다고 얘기해 볼까?"
그렇게 고민하면서 슬며시 베란다 창가로 다가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두 여자들의 눈에 띠지 않게
조심하면서 몰래 1층 입구 쪽을 내려다 봤다. 그녀들은 서로 무언가 수군 수군대면서 위아래로 연신
올려 다 본다. 그나마 내가 살고 있는 3층 층수를 알려주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잠시 베란다 아래쪽을 반복해 내려다보면서 그녀들이 포기하고 돌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났다. 대략 십여분쯤 흐른 것 같았다. 시간이 이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돌연 둘 중 누군가가 외치는 듯한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다시 살금살금 베란다 창가로 더 다가가서 몰래 아래를 내려 다 보았다.
“야! 이 치사한 놈아! 잘 먹고 잘 살어라! 나쁜 자식 !”돌연 숙희 라는 여자가 위를 연신 쳐다보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에잇 재수없어... 얘 그냥 가자.” 이번에는 첫 번째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마침내 그녀들은 돌아
서고 있었다. 당연히 욕 먹어도 싸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솔직히 무척 미안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때로는 세상살이 하다보면 어쩔 수없이 이기적이고
파렴치할 수 밖에 없어...그녀들도 때때로 그럴거야...
내가 지금 무척 배도 고프고 피곤하거든...내가 먼저 살고 봐야지...”
스스로 나 자신을 달랬다. 약속이란 거 쉽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반성하면서 나는 주방
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달걀과 라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냄비에 적당히 물을 붓고는 전기 인덕션을 켰다.
“지금은 다른 생각할 여유조차 없지...우선은 춤으로 지친 내 몸의 허기를 달래는 것이 급선무야...”
나도 모르게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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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오 영감 : 19세가 프랑스 작가‘발자크’의 대표적 고전 소설,“한 때는 잘 나갔던 사업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지만 시집간 두 딸의 행복을 위해서 가지고 있던 마지막 한 푼 마저 다 주어버리는 지나친
부성애로 말미암아 정작 자신은 홀로 비참한 파멸을 겪게 되는 고리오 영감의 비극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첫댓글 호호호~~~~ 그래서 결국
치사한 놈이 된 그 분은
다른건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잘 한건 있네요.
하마터면 음주운전으로
큰일날 뻔 하셨으니까요.
잘 읽었습니다.작가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아. 음주운전을 생각 못했어요.
큰일 날 뻔했네요.
근데 글 속에서 나는 병맥주 겨우 한병
정도 마신 것 같은 데 그것도 안되겠지요. ㅎ~
그러게요~~
자식이 필요하면 쥐야할것 같아요~~
그래서
저두
얼마전 거금을 딸램이에게 주어거든요~
후회는
하지 않아요~
ㅋ
자식한테 주는 거야 뭐 후회까지야 할 것 없겠지만 그래도
달달 털어서는 주지 말고 춤방가서 놀 돈은 남겨놔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