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피카소.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는다 !!
한국 사람들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秋史)는 모국(母國)인 조선보다 중국 청(淸)나라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淸)나라 최 전성기에 최고의 학자인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과 교류하였으면서
두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때 추사 나이는 25세 옹방강(翁方綱) 78세 완원(阮元)은 50대였다.
청(淸)나라 두 학자는 세계 웬만한 학자는 만나주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라고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
김정희(金正喜)의 처음 호(號) “완당(阮堂)”은 완원(阮元)의 이름 “阮”을 준 것이다.
추사(秋史)의 글씨 말미에 “추사(秋史)”라고 쓴 것은 보기 어렵다.
대부분 “완당(阮堂)”이다.
청나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강덕량(江德量)의 호가 “추사(秋史)”였다.
추사의 스승은 북학파인 박제가(朴齊家)였다.
청(淸)나라 연경에서 돌아온 박제가(朴齊家)는 16세 제자인 소년 김정희(金正喜)에게
입이 닳도록 강덕량(江德量) 학문 이야기를 한 뒤,
그를 본받으라는 의미로 “추사(秋史)”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김정희(金正喜)의 제일 처음호가 추사(秋史)였다.
그러나 김정희(金正喜) 자신은 추사(秋史)라는 호를 잘 안 썼고 “완당(阮堂)”을
많이 사용하였다.
추사의 기록에는
자(字)는 추사(秋史), 호(號)는 보담재(寶覃齋)다.
추사 고향은 충남 예산이었지만 마지막은 과천(果川)에서 72세의 생애를 마쳤다.
그래서 과천에 사는 동안 추사는 “과(果)”자가 들어가는 호(號)를 사용하였다.
추사의 마지막 글씨인 봉은사의 불교경판을 보관하는 “판전(板殿)”에도
끝에 “72세 칠십이노과(七十二老果)”라 썼다.
72세 과천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과천(果川)에 사는 동안 호(號)는
과로(果老), 과농(果農), 과산(果山), 과월(果月), 과전(果田), 과충(果沖), 과파(果坡),
과도인(果道人)등등~~ “과천(果川)”이란 뜻의 “과(果)”자 호(號)를 인생의 마지막까지
썼다.
우리는 서예가 “추사(秋史)”로만 대부분 알고 있지만 당시 세계 최대의 대국(大國)인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게 탐구했으며 조선 금석학(金石學)의 일인자였다.
황초령비(黃草嶺碑)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추사가 발견한 것이다.
추사는 대표적인 북학파(北學派) 학자였다.
영국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영웅(英雄)숭배론자였다.
그는 말하기를
-Shakespeare wouldn't trade India-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
고 하여 인도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필자는 말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피카소.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는다.-
추사(秋史)의 서체(書體)의 조형미(造形美)는 피카소의 큐비즘(cubism立體派)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추사(秋史)의 서체(書體)에는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보다 더 깊은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표현되어 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