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1840), 회장, 참수형(48세로 1840년 1월 31일 순교)
박 아우구스띠노는 1792년(정조 16년) 경에 서울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이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그는, 본래 성격이 부드럽고 상냥하며 열심히 학문을 닦아 지식과 재간을 겸비하게 되었다. 비록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한편 모친에 대한 효성을 극진히 하고 교리의 본분도 충실히 지켜나갔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히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박애심이 대단하였고 교리를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데 전심하였다. 신자와 비신자를 가르치고 격려하였으며 죽을 위험이 직면한 비신자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은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순교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마음에 불길같이 타오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함이 널리 알려져 신자들은 웃으며 "대관절 아우구스띠노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뒤로 물러설 줄 몰랐으며, 가장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만 남겨 주었다. 이러한 덕과 재능은 즉시 앵베르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도청에서는 그를 제 1대상자로 지목했으므로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가서 머물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되어서도 부부는 서로 만나 그 은혜를 하느님께 감사하고 서로 축하하며 고통의 그 새로운 길을 꿋꿋하게 걸어나가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형조판서는 그들을 함께 신문시켰고, 계속하여 여섯 차례를 어떻게나 잔인하게 고문을 했던지 그들은 팔 다리를 못쓰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우구스띠노는 신앙의 정신으로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으며 항상 마음의 평온을 간직하고 있었다. 10일 뒤에 또 다시 형조에 끌려가 다리에 매를 몹시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중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는 죄'였다. 마침내 1840년 1월 30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라는 데에 끌려가 참수를 당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당고개에서 순교한 교우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으나 그 중에서 여섯 명만이 성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교훈> 박 아우구스띠노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많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재능과 지혜를 나누어주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재능과 지식을 주님을 전하는 데 아낌없이 바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