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다. 귀가 먹먹하게 바람의 파동을 만들던 여름의 경쾌한 잎새들이 어느새 툭툭 낙하를 시작했다. 세월의 굴렁쇠는 순환의 궤를 타고 굴러간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이울더니 어언 가을마저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조금만 더 유예를 청해 보지만, 이 가을은 곧 스산한 가을비를 뿌리며 다음을 약속할 테고, 우리는 시간이 남긴 잔영을 끌어안고 쓸쓸한 마음을 뒤척일 것이다.
가을은 수확하며 조락하는 계절이다. 뜨거운 여름을 밀어내고 찾아든 가을빛에 달뜬 것이 엊그제인데, 어느새 중력의 한 점으로 쓸쓸하게 남겨질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때로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가 시간에 몸을 맡기고 그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행복도, 아름다움도, 그리움도 시간 속에 묻어두고 때가 되면 잠시 꺼내 보는 것이다. 특히 가을이 그렇다.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김동규가 부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흥얼거리다가 그러한 상념이 스쳤다.
그래서일까? 만나서 행복한 시간은 모두 잠시뿐이었다. 귀한 것일수록 길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 지나면 이별의 아픔이 찾아들고, 그리움의 시간으로 자리를 잡더라. 10월 31일이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떠나간 사랑을 묵주처럼 쥐고 돌리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 1980년대를 평정한 가왕 조용필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던 노래다. 지금도 그 노래는 동짓날에 팥죽을 먹듯 10월의 끝자락에 듣고 넘어가야 편한 노래가 되었다.
심금을 두드리는 고혹한 목소리 이브 몽땅의 ‘autumn leaves(고엽)’, 배리 매닐로의 감성 깊은 노래 ‘when october goes’, 샹송의 풍미를 얹은 최양숙의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가을 빗소리가 아득한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 등도 해마다 이맘 때면 여러 방송에서 들려주는 대표적인 가을 노래들이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청아한 늦가을의 정취는 쓸쓸하지만, 쓸쓸해서 더 고혹하고 더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 요즘 풍경이다.
가을은 그래서 색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백추(白秋)로 남았다. 선현들은 봄을 파랑(靑春), 여름을 빨강(朱夏), 겨울을 검정(玄冬)으로 표현했지만, 유독 화려한 가을에서는 손을 들었다. 각자가 알아서 채색하라고 무채색 하양을 건넬 뿐이다. 가을은 그만큼 저마다 빛깔이 다르고 상념도 많은 계절이다.
지난주, 결혼기념일이라고 아내와 설악 단풍을 찾았다. 해마다 보는 풍경인데도 단풍으로 물든 가을 설악은 아름다웠다. 그러다 뜬금없이 앞으로 내게 남은 가을이 얼마나 될까를 헤아려보았다. 많아도 이십 번을 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십 년은 그래도 여유가 있어 보이는 미래의 시간인데, 이십 번이란 숫자는 얼마나 각박하고 엄습하는 현실의 시간인가. 물든 단풍잎, 시든 들꽃, 빛바랜 풀잎 하나하나가 눈가에 아득하고 아련하게 흔들렸다.
사실 이러한 감정은 지난해에도 경험한 것들이다. 계절의 순환 속에 같은 것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새로움의 탄생을 보았는가. 이를 감각할 수 있는 몸이 있고 가슴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하늘이 내린 은총이다. 올해도 수많은 꽃이 피었다 져도 같은 꽃은 없고,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었어도 같은 사람은 하나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 계절에 이루어지는 소멸 의식이 눈물겹고, 장엄한 소멸 뒤로 부활할 또 다른 생명에 환희를 떠올린다.
가을이 깊어지면 들리는 또 다른 노래가 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에 가사를 입힌 시인 박목월 선생이 환갑을 앞두었을 때 제자가 물어보았다. “선생님도 시간에서 추락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 있으세요?” 선생이 웃으시면서 말했다. “환갑이란 나이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 충격을 받았다네.” 그 말씀이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다니.
10월이 떠나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새 막이 오른다.새로운 빛과 온도와 냄새를 안고 다음 계절이 몰려올 것이다.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연은 그런 사람을 어질게 만든다. 삶을 해설해 주고 세상을 보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태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가을의 진짜 주인은 오색의 등산복을 입고 산과 계곡으로 몰려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박하지 않고 말없이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는 저 나무와 숲과 바위와 흙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