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sorbitol
여시들 안녕? 오늘 오후에 어떤 언니가 올려준 신경숙씨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구절들을 보고서
그걸 읽고 과거의 내가 생각이 났어, 그래서 급히 지난날 나의 싸이다이어리를 뒤졌음!
이제는 다 비공개로 해두었지만 내가 이별하고 정말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때 내 감정을 짚어보고
견뎌낼 수 있도록 해줬던게 신경숙씨의 책들이었어!
단편도 있고 장편도 있고 책이 굉장히 많은데 난 그중에서 <깊은슬픔>을 추천하고싶어
너무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이 많아서 하나하나 타이핑하며 정리해두었는데 문제가 안된다면
언니들에게도 그 감정들을 공유하고싶고 나처럼 치유받는 언니들도 있었으면 해
나는 딱히 사진을 모으는덴 취미가 없어서.....게다가 꽤 길어서 책읽는 기분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아!
무미건조하게 글만 쪄보도록 할게 미앙☆★
15
봄
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데......
그럴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나는 너를.
18
적어도 폭풍을 들을 때 은서는 현대음악요법의 기초이론인 카타르시스 이론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27 28
"가끔 그렇게 무작정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은 때가, 그런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말이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도 같아요. 그건 섬뜩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그랬으면 싶기도 해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아녜요? 다른 곳에서 새로 태어나서 아주 말짱히 새로 시작해보고 싶은, 그런 마음 그쪽은 없어요?"
"그러나 그것뿐이에요. 곧 이렇게 돌아오고 말거든요. 돌아올뿐만 아니라 정말로 이 세상 밖으로 튕겨져나가면 어쩌나, 싶어서 급하게 방향을 돌려 달려왔던 길을 안간힘을 다해 되달려오죠. 오늘은 한강다리를 건너오는데 앞뒤로 차량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였나봐요. 난간을 뛰어넘어 물 속으로 처박히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강하던지 그거 참고 다리를 건너느라 너무 피로했어요. 정말이지 이런 때는요, 절대로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아요."
40
이렇게 속만 끓이고 있을 수는 없어. 그가 전화를 안 하면 내가 하면 되는 거야. 그녀는 완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돌렸다. 그를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화를 할 뿐인데, 금세 자신감이 없어져 마음이 헝클어졌다.
50
약속? 예이츠였던가, 한때 입안에서 맴돌던 싯구절들.
그대 굳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에 / 나는 다른 이들과 사귀었네 / 하나 나 항상 죽음에 마주칠 때나 잠의 고갯마루를 애써 오를 때나 / 간혹 술로 즐거울 때 / 불현듯 떠오르는 그대의 얼굴 잊지 않았느니.
67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무심한 놈의 하늘은 그저 청청하게 드맑기만 하다. 서씨는 하늘 쪽을 향해서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떠본다. 푸르다. 너무도 푸르러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눈을 꿈벅일 때마다 아침이면 조금씩 엉겨온 오열 같은 것이 점점 더 진해진다. 쏟아내고 싶다. 쏟을 수만 있다면 후련해지리라.
93
여름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지.
어느 날 우연히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언젠가 네가,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116
이 사람이었던가. 나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나에게 물잠자리를 잡아주던 세를 물 속에 곤두박질치게 하곤 대신 저가병으로 가득 물잠자리를 잡아주던 사람이, 이슬어지를 떠나던 날 밤 숨차하며 뛰어와 내게 입술을 댔던 그 사람이 이 사라 맞는가. 이슬어지는 다 잊어버리고 너만 기억하고 싶다던 그 사람, 세 사람이 모두 우정을 나누길 바란다고 말했던 내 얼굴을 끌어안아버렸던 그 사람이 이 사람 맞나, 너만이 나를 사나움 속에서 건져내줄 거라고 하던 그 사람이 저이던가.
119
정말이지 한때는 어디선가 저 여자가 보고 있겠거니 생각하면 코를 풀 때도 콧소리를 세게 안 내게 됐고, 후룩 칼국수를 거칠게 먹다가도 후루룩 소리를 가다듬었었다.
다시 저 여자를 서울에서 만나고 나서도 줄곧 저 여자의 마음을 다 내게로 오게만 할 수 있다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을 것만 같았다. 왜 그리 간절했을까, 언제나 저 여자 곁에 세가 있어서인가.
그랬을지도 모르지.
완은 풀썩 웃어버렸다. 세가 없었으면 저 여자 생각만이 전부여서 다른 일이 전혀 손끝에 잡히지가 않았던 그런 열정은 없었을지도 모르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란 여자 모두가 다 저 여자인 것만 같고, 저 여자의 마음만 곁에 붙들어놓을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은 어째도 괜찮을 정도로 그렇게 애가 타진 않았겠지.
122
그래, 나는 이 사람을 내 마음에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과하기 시작했지. 내가 화나게 했어? 내가 뭘 잘못했어? 그전엔 안 그러더니 내 마음이 이사람에게로 기울어지고부터 이 사람은 나로 하여금 저절로 그 말이 나오게 무료한 표정을 지었어, 늘.
123
완은 허허롭게 웃었다. 이 무슨 은서로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할 말인가. 완은 자신의 말이 공허히 떠돌고 있음을 느꼈다. 진짜로 은서 때문에 화가 난 적이 없음에도 거짓말을 한 게 아님에도. 그럼 무엇인가, 무엇이 이 여자를 뒷전으로 미루게 하는가. 편안해서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이 여자는 언제나 그자리에 있어줄 거니까, 다른 일을 하고 와도 거기 있을 꺼니까. 이건 또 무슨 이기적인 생각인가. 이 여자의 마음을 확실히 다 얻을 수 없었을 때는, 언제나 이 여자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이 여자가 서너 시간만 연락이 안 되어도 혹시 세에게 가 있나, 일손이 안 잡히던 때는, 다른 일을 뒤로 미루고 이 여자와 시간을 맞추었는데, 그랬는데.
127
은서는 완을 쳐다봤다. 여자와 남자의 속삭임을 완도 들었는지 은서가 쳐다보자 피식, 웃었다. 맹세. 은서는 여자가 발음한 맹세란 말이 남겨놓은 울림에 어디가 찡했다. 이 남자도 내게 맹세하듯 말했었지. 너 때문에 살고 싶다고. 나 때문에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완의 그 말은 너무나 커서 내 가슴에 옹이져버렸지.
128 - 130
은서는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냥 다 무서워, 오래된 것들이, 네게 빠져있는 내 마음이, 저 별이, 기억해야 하는 어린 시절이, 함께 있어도 이렇게 외로운 마음이, 네가 세상에 혼자인 듯이 그러고 앉아 있으면 나는 발이고 더듬이고 다 잘린 것 같아, 무서워.
네가 누군지를 모르곘어서 울지. 네가 그러고 있는 한 내가 뭘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서 우는 거야.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뭘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서, 그래서 우는거야. 왜 이러는 거지? 왜 지금에 와서 네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 거지?
저 남자가 바라다보는 곳은 어디일까. 어디인지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곁에 자신을 두고도 혼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 완의 모습을 볼 때면 그녀는 세상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
131 132
"네가 그러고 있는 한은 나는 어디다 마음을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사랑하니 할 말이 없어야 할 텐데... 네 생각을 하면 오싹해졌다 더워졌다... 하늘이나 땅이나 어디라도 솟아버리거나 꺼져버렸으면... 다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으려고, 다들 이러겠지, 싶다가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마음끼리 보태져서 할 일이 있을 텐데... 서로 돋아나게 하고... 살고 싶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한 건 그러기 위해서 였는데... 왜 그렇게 멀어지기만 하는 거지? 왜 내가 곁에 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 내가 무얼 잘못했어?"
"너에게 이렇게 기울어버린 내 마음이 잘못일까? 사랑한다고 말해버린 내가 잘못일까? 그뒤로 너는 나를 어디에 묻어버린 것 같아.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린 것 같아. 그런데도 난 그나마 그런 너조차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133
바보가 되어간다는 얘기지. 너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그 외에는 모두 공허하니까. 네가 전화를 걸어주거나 네가 나에게 와주거나 그것밖에는 중요한 일이 없으니까.
"네게 밀침을 당할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기도 힘들어. 상대방이 무슨 얘길 하는지 목소리는 들리는데 뜻이 새겨지지가 않아. 자꾸만 멍해져. 네가 자꾸만 그러면 난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아. 음악을 듣는 일도 신호등을 건너는 일도 세탁을 하는 일도 다 잊어버리고 말 것 같아."
135-7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
"..."
"네가 말해봐.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
"또 아무 말도 안 할거냐?"
"전화한다고 했으면 전화해줘."
"...뭐?"
은서는 어둠 속에서 완을 향해 고갤 돌렸다. 완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어버렸다. 기껏 전화 얘기라니.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선 전화를 못 받고 몇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대로 죽는 거 같아. 알어? 수화기가 잘못 놓였나, 들었다 놔보고 혹시 벨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까봐 소리나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한번은 어쨌는 줄 알어? 전화를 기다리는데 오로지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는데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냉장고 플러그를 빼놓았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다른 일은 조금도 할 수가 없어. 벨이 울렸는데 네가 아니면 너무나 낙담을 해서 전화를 한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싶은 심정이야."
"은서야!"
"난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어."
난 그렇게 되어버렸지. 너에 의해 죽고 싶고 너에 의해 살고 싶게 되어버렸지.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며칠 있다가 전화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때부터 아무 일도 못 하고 전화를 기다리지. 다른 일들이 다 짜증스럽기만 해. 만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네가 전화를 하겠다고 했을 뿐인데도, 무슨 옷을 입을까, 머리가 너무 자랐나, 손톱을 다듬을까 부산스러운 마음이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무슨 벽보에 사랑이란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게 아깝지 않은 것, 이라고 써 있었지. 금방 너를 생각했어. 언제부턴가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너를. 그 풀칠이 덕지덕지한 벽보 앞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마나 절망했는지. 매사가 이런 식이야,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어.
감정이란 무서운 거야, 너무나 고통스러워. 은서는 손깍지를 깊게 꼈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은 마음이다가도 또 어쩐 줄 알아? 어느날 우연히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언젠가 네가,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내가 없을 때 전화가 올까봐 친구를 만나도 한 시간을 같이 못 앉아 있겠고, 영화를 보다가도 돌아와버리곤 하지.
"모르겠다. 왜 네가 네 인생을 망치려는 건지."
은서는 놀라 완을 쳐다봤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망치려는 게 아니라 찾으려는 거야."
"나는 네가 그렇게 애써야 할 사람이 못 된다."
"..."
139-140
"너를 사랑하느냐고? 이게 사랑인가 아닌가 나는 모르겠다. 사랑은 중간이 없다던데 사랑이면 사랑이고 아니면 아니라던데. 나는 그래. 너무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늘 너무 많아. 시간을 내주는 게 사랑이라면 할말이 없구나. 그렇다면 아닌가보지. 단 서너 시간도 내 시간을 내가 조절할 수가 없어. 불시에 출장을 가야 하고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고, 대접해야 할 사람들이 불시에 찾아와. 그게 불만이라는 거 아니다. 나는 잘해보고 싶다. 나로선 아주 좋은 조건이야. 정말이지 잘해보고 싶다. 그리고 잘해볼 수밖에 없는 처지지. 내가 어쩌겠어."
"너를 사랑한다는 말,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닌데."
"..."
"미안하다, 낙심시켜서."
142
"너를 만나면 이렇게 좋은데. 나를 들여다보기도 하는데. 뭔가 한가닥 걷어내지고 정신이 들기도 하는데. 너와 헤어지면 나는 네가 꿈만 같구나.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데 네가 희망을 가질까봐 두렵고. 어쩌다가 내가 네 마음 아프게 하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처럼 되어버렸는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런 것뿐이라니. 답답하다, 가자."
161
차량이 밀려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삼십 분, 그녀가 머리를 감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머리를 감고 나오기로 해서 늦게 될 시간 이십 분, 막 나오는데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와서 전화 받느라 늦을 시간 십 분, 때로는 그녀가 약속장소까지 오는데 건널 신호등의 시간 계산까지 해볼 때도 있었다.
164
은서의 시선이 떠난 마음자리가 휑해져버린 후 세는 무엇을 보아도 기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지하도에 시주 나무상자곽을 내놓고 염불을 외고 있는 스님에게 시주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이 되찾아지기를 원했고, 미술대 동창들끼리 소녀가장돕기 전시회를 열어 소품을 출품했을 때도 세는 거기 한 귀퉁이에 은서의 시선이 찾아지기를 기원했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방금 지나간 장미꽃 장수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도 세는 얼른 기원을 했다. 그 아주머니의 말대로 그 꽃으로 인하여 기쁜 일이 생기길.
170
굵었던 빗방울이 가늘어져 있다. 정말 모든 것이 다 무섭구나 은서야. 내가 너에게 더이상 별것 아닌 사람이란 게 무섭고, 점점 멀어지는 네가 무섭고, 그런 네게 빠져 있는 내 마음이 무섭구나.
너도, 은서는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서 무서운 거야. 내가 완이 누군지 모르겠어서 무서웠던 것처럼, 그것처럼.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너도 나하고 뭘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서 무서운거야. 지금에 와서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서.
174
"밥 먹자고 하면 되지, 시간이 괜찮다면은 뭐고, 그럴 수 있겠냐? 는 또 뭐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세는 웃는다. 언제부턴가 네 앞에서 무엇을 해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네가 그냥 슬쩍 고갤 돌려도 내가 뭘 잘못했구나, 싶어지고, 네가 힘없이 앉아 있으면 내가 짜증스러워 그러는구나, 싶어 나는 자신감이 없어진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은 너에게 닿지 못할 것만 같으니 내가 어떻게 그냥 밥 먹으러 가자, 고 할 수 있겠냐.
188
어느 날부턴가 완 앞에서는 그랬다. 묻고 싶은 말이 목에까지 차올라 있는데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아니다, 라는 확실한 무슨 대답을 듣는 것이 겁이 나서였을 것이다. 아니다, 라는 말을 듣느니, 그래서 깜깜해지느니, 묻지 못해 그 말이 서리처럼 가슴에 차갑게 맺히더라도 불확실한 게 은서가 견디기에는 나았다.
232
나는 이렇게 돼버렸어. 지금도 봐라, 이 음악. 머리를 맞대고 제대로 얘기도 못하게 하지 않니. 그래 따지고 보면 다 뼈다귀 같은 일이지. 그런데 그 뼈다귀 같은 일 때문에 또 살아가는 거 아니겠어. 사랑... 사랑으로 살기엔 이미 늦었어.
233
"그땐 자라가 나를 끌고 바다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네 말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아. 다시 그런다면 따라가지 않고 손을 놓을 거야. 왜 이해는 이렇게 늦게 오는 건지. 다 지나가고 돌이킬 수 없을 때 오는 건지."
257
가을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무슨 벽보에
사랑이란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 게
아깝지 않은 것, 이라고 써 있었지.
금방 너를 생각했어.
언제부턴가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너를.
그 풀칠이 덕지덕지한 벽보 앞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마나 절망했는지.
매사가 이런 식이야,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어.
309
강물은 조용한 얼굴로 지나감을 인정하라 한다. 그러나 내가 고달픈 것은, 은서는 웃었다. 지나가는 것이 물과 새뿐이 아니라는 것... 내가 지나가고 너 또한 지나간다는 것. 강물과 아주 헤어져 중앙선을 달렸다. 멀리 농가 마당 멍석 위에 널린 붉은 고추에 눈이 아프다.
322
세는 나뭇잎이 가장 많이 쌓인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한손으로 배낭을 풀어 팽개치듯 던지고는 나뭇잎 위에 드러누웠다. 한 손은 은서의 손을 잡은 채여서 은서도 끌려가듯 저절로 눕게 돼버렸다. 세는 은서의 손을 놓고서 일어나더니 사방에서 나뭇잎들을 긁어모아 은서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방에서 나뭇잎을 긁어모아온 후 은서 옆에 누운 뒤 모은 나뭇잎들로 제 몸을 덮었다.
361
은서는 김학수 피디와 헤어져 혼자 고가도로 밑을 빠져나와 길을 걸었다. 쉽게 잊지 못하기는 은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목련이 질 때 빛깔이 그렇지, 그렇게 누렇지. 시인의 누렇게 뜬 얼굴이 발에 밟혀 은서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지옥이 어디 따로 있겠소. 그리움이 끊긴 마음이 지옥이지.
366
은서는 가만히 서 있는 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쏟아질 듯 눈앞이 어른거리며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다. 이 남자의 화난 모습 앞에서. 생각해보니 한 번도 세는 은서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은서를 밀어낸 적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물을 수도 없다. 세의 얼굴, 어디에 저토록 냉정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던가, 어디에.
368
미혹
378
"기다림이었어요. 내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었어요. 기다림이 끊어지닊 ㅏ마치 나 혼자서만 외떨어진 장소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아무런 기다림이 없어지기는 처음이었어요. 가능한 일이든 불가능한 일이든 마음속에 기다림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붙여 하루를 보낼 수가 있지 않아요? 전화벨이 울리면 반갑기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고, 밤길을 걷게 될 때는 옆에 있겠거니 생각하며 혼잣말도 해보고요."
386
그러다가 은서는 진저릴 쳤다. 아주 짧은 순간에 요즘 자신의 생활에 끼어든 불안의 실체를 깨달았다. 너무 낯익은 그 불안의 실체를. 그전에 불과 한 해 전이건만 마치 기억도 안 나는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때, 늘 이랬었다. 완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마음이 늘 이렇게 불안했었다. 완은 그랬다. 그녀에게 거리를 무턱대고 걷게 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아 울게 했고, 그릇가게 같은 데서 별 의미 없이 찻잔 같은 걸 사게 했다.
411
겨울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처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만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426
은서는 눈물이 핑 돌아 얼른 강으로 시선 돌렸다. 무슨 일이 생겼지. 세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이제야 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의심으로 가득 차 있지. 나는 무서워. 무서울 따름이야. 회복시킬 수 없을 거야. 그러기엔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 세를 너무 무참하게 했어. 네가 내게 준 슬픔이며 무안을 나는 고스란히 세에게 뱉아냈지. 저기 저 자리에서도... 은서는 그 열므날 세와 앉아 있던 강변 언덕을 쳐다보았다. 저 자리에서도 나는 세를 보지도 않고 여름하늘을 보며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아, 라고 중얼거려 세를 슬프게 했지. 그때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던 낙담은 어느 날인가 네가 아주 무료한 표정으로 나를 보지도 않고 하늘을 보며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날이야, 라고 말했을 때 것과 똑같은 것이었어. 이제는 내가 세에게서 그 말을 듣겠지. 그 말까지 하고 난 뒤면 세는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할 거야. 지금은 나를 의심하느라 그 상태는 아니겠지만.
은서는 눈을 감았다.
429
그럼 어떻게 말을 하지? 너를 다시 만나기 전에 너를 생각하면 아득했었어. 생각해보면 일 년 전 일인데 왜 그렇게 오래 전 일 같은지. 그러면서도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너는 어떻게 변했으며, 너에게 바쳐진 내 마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싶었지.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진작 만나는 건데, 그랬으면 세를 그렇게 외롭게 두진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상황이 이렇게 나빠지진 않았을 텐데.
539
다시, 봄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다이어리 날짜별로 그대로 복사해왔더니 이상한 줄들이 생기고 지웠더니 문장도 길게 써지질 않음 ㅠ_ㅠ 줄은 어찌어찌 다 지우고 다음편집기로 바꿨는데 눈에보이지 않는 틀이 없어지질 않는다고한다 또르르...양해부탁한다능
위에 써있는건 책의 페이지고
스크랩이나 복사는 자유롭게 해도 돼!! 나처럼 읽고 여시들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깊은슬픔 구절 옮긴것만으로도 너무 길어서 다른책은 짧기도 하고 이 책만큼 구절이 많지 않으니 직접 읽어보는것을 추천하며 마지막으로 리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구절만 쓰고 물러나도록 할게!
228
불면은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준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앗 이렇게 손글씨로 써놓으니까 더 와닿음....ㅠㅜ 진짜 명작이라 문장 하나하나 다 좋은 것 같아..♥ 지금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울꺼고 내가 놓친 부분도 많을듯! 나두 요거 써놓고 지금 다시 읽구있어 자야하는데..ㅎ_ㅎ...
이거다한책에나오는구절이야? 꼭읽어보고싶은데..
웅 언니 다 책 한권에 있는 구절임!!! 제목은 깊은슬픔이야!!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아 너무 불행해... 근데 또 그 불행으로 견뎠다는거 읽었을때 가슴이 턱 막힘 ㅠㅜ..
아너무좋다.. 이책꼭사야겠다..
음.. 다읽어봤는데 스토리는 어때?? 누군가한테 산물해주고싶은데.. 그럴수 있을까? 남잔데...
세-은서-완(남 여 남) 삼각관계같은건데 그냥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라능....스토리는 그냥 일상의 스토리같은건데 감정표현이 진짜 섬세!! 유년기부터 결혼이후까지 다루고 있어 대부분이 은서시점이고
그 상황 그 사람들의 마음들 주변의 사소한것들 하나하나를 다 끌어들여서 감정을 표현함 ㅠㅜ 잊을수가 없어 먹먹해져..
처음에 날 정말 열정적으로 좋다고 했던 그 남자가 나에게서 멀어져가고 날 더이상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 느낌..
또 그런 그사람에게 집착하고 불행해지는 나(여자)
이별이 당장 눈에 보이는데 헤어질수도 없고
그런 나를 내가 보면서 또 답답하고 한없이 슬퍼짐....
완전 같은 상황은 아닐지라도 보통의 남녀가 처한 이별의 상황에서 극중의 그 감정들을 공감할수밖에 없게 써놓음 ㅠㅜ
나는 그런 그 여자 입장에 너무 공감이 됐고 내 감정을 일일히 다 짚어준 것 같아서 많이 위로받았어
또 객관적으로 남이 나를 볼 때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픔을 이겨내고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
사실 남자보단 여자들이 많이 읽고 읽었을 때 크게 공감하지만
누구에게 선물해도 손색없을거야!! 내가 당시 내 상황에 초점을 맞춰서 골라낸 구절들이라서 그렇지
평생 은서만 사랑했던 세의 이야기, 은서네 가족들 이야기도 있어!
우와...언니의 정성스런 댓글 짱짱 감동!! 고마워ㅠㅠ
나 이 소설 개인적으로 참 먹먹하게 잘읽었음. 언니 덕분에 또 먹먹해지네용 고마워^^
우울함과애잔함은 ...신경숙작가님이 최고신듯
이 글 읽고 신경숙 작가가 경외스러워졌다..이 감정들을 어케 이렇게 표현했지?
울면서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엉엉 울었었는데...다시 볼수있게 해줘서 고마웡...
흡 언니들 댓글 하나하나 다 너무 소중하다 ㅠㅜ..
다들 공감해주고 역시 이미 좋아하는 여시들도 많구나*
하나하나 댓글 달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부털감이라 두손 부여잡고 참는다능^_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다른 하나엔 상처가 숨어 있겠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아프게 단념해놓고, 단념하지 않았을 때의 그 괴로움을 알기에 마음이 다시 그걸 원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냄새말예요.
헤어지고 읽어서 그랬었나 그때 나는 이 구절들이 너무 맘에 와닿았어T-T
언니ㅠㅠㅠㅠ대박....이거짱이다 나이책사야겟어ㅠㅠㅠㅠㅠㅠ
우앙 여시야좋쿠나조아
나이책진짜좋아하는데..bbb
그래, 나는 이 사람을 내 마음에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과하기 시작했지. 내가 화나게 했어? 내가 뭘 잘못했어? 그전엔 안 그러더니 내 마음이 이사람에게로 기울어지고부터 이 사람은 나로 하여금 저절로 그 말이 나오게 무료한 표정을 지었어, 늘.
ㅠㅠㅠㅠ이부분진짜격한공감..아 먹먹하다 ㅠ
불면은.... 이마지막구절 구구절절 옳다 ㅠㅠ
이책 좋다...
세가 불쌍했다가 미웠다가 가여웠고 안쓰러웠다...책 읽고 난 후 한참 지나서야 세가 너무 이해되서 미안했다... 미워해서
삭제된 댓글 입니다.
...거의 두달이 지나서 여시 댓글이 달렸는데 넘 맘아프다...............새로운 행복한 사랑을 하자 우리!
나중에 다시읽어볼께 좋은글고마워
시발 대박이네....1년전에 다른애랑 헤어졌을때 내가댓글단건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따른애랑 헤어지고 처음본듯이 읽으면서 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