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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周 五等爵制의 기원과 성격
- 西周 金文의 분석을 중심으로 -
민 후 기*
目 次
Ⅰ. 서론
Ⅱ. 公?伯?子?男과 西周의 世代分治
Ⅲ. 변방의 특수행정구역 ‘侯’
Ⅳ. 결론
參考文獻
Abstract
Ⅰ. 서론
역대의 문헌을 참조하면 周室과 列國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五等爵과 國 내부의 위계를 나타내는 卿?大夫?士가 西周 爵制라고 간주되어 왔다. ??禮記??에서는 五等爵을 公, 侯, 伯, 子, 男으로, 內爵을 卿, 大夫, 士로 정리하고 있으며, ??孟子??에도 ??禮記??와 거의 유사한 기술이 실려 있다. 이 중 五等爵의 성립시기와 그 구체적인 실시 여부, 또한 五等爵의 등급구별의 실제성 여부 등이 西周 爵制 연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먼저, 연구사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禮記??와 ??孟子?? 이래 五等爵을 周代 爵制로 보는 시각은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확고하게 유지되었는데, 唐의 杜佑가 孟子의 설을 周代 爵制의 표준으로 채용하거나, 宋의 鄭樵가 周의 爵制를 公?侯?伯?子?男의 5등으로 정리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근대에 들어와 疑古派의 등장과 함께 재검토된다.
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郭沫若은 王만이 아니라 諸侯도 王이라고 칭할 수 있었고, 公?侯?伯?子는 고정된 칭호가 아니라 國君의 通稱이라고 주장하고, 또한, 金文에서는 五等爵祿이 위계로서 작용하는 경우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동일시대의 傅斯年 역시 公?伯?子?男은 모두 一家의 호칭으로 班列이 아니었고, 侯 역시 원래 무사를 의미했는데 戰國이래 方術의 士들이 이들 호칭을 班爵祿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으며, 楊樹達 역시 金文을 이용하여 ① 侯?公, ② 侯?伯, ③ 侯?子, ④ 公?侯?伯, ⑤ 公伯, ⑥ 公?子, ⑦ 伯?子를 겸칭하는 사례를 찾아내 작명은 위계가 아니라 통칭에 불과하다는 설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해, 爵名에 定稱이 없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오등작이 위계로서 실제적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먼저, 陳槃은 顧棟高의 ??春秋大事表?? ?春秋列國爵姓及存滅表?을 전면적으로 보완한 ??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表?異?? 7책과 ??不見于春秋大事表之春秋方國稿?? 2책을 펴내어 각 國의, 爵, 姓, 始封, 都, 存滅에 대한 대대적인 자료의 집록을 시도하고, 결론적으로 五等爵이 周의 成王과 康王시기에 이르러 점차 존비를 나타내는 위계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王世民 역시 金文에 보이는 일부 작명의 혼란은 예를 들어 周와 통속관계가 없는 吳?越과 같은 蠻夷의 군장이 제멋대로 稱王하는 등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春秋公羊傳??의 “天子의 三公은 公이라고 부르고, 王者의 후예도 公이라고 부르고, 그 나머지 大國은 侯라고 부르고, 小國은 伯子男이라고 부른다.”는 정황이 周에서 관철되었다고 주장하였다. 杜正勝 역시 ‘公’이 겸칭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제후들이 본국에서는 그 작위와 관계없이 公을 칭하거나 장례의 경우 시호로 公을 덧붙이는 등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春秋??에 보이는 오등작제는 주로 서주시기의 상황을 반영하는 존비를 구분하는 신분제도라고 보았다.
이상에서 爵의 위계부정론과 위계긍정론으로 양분된 五等爵制에 대한 연구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지만, 필자는 이러한 爵의 위계부정론과 위계긍정론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爵’이 가지는 성질, 즉 國과 國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族과 族이 대립하는 족사회에서 지배족들의 시간과 거리를 넘어선 동맹을 위한 등차적 위계로서의 본질 때문에 양설이 동시에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春秋 爵制에 대한 규명을 통해 살펴보았다. 즉, 爵制를 ‘각지에 봉건된 족을 연결하는 연결망으로서의 위계’로서 정리한 것인데, 이런 관점에서 西周의 五等爵制를 다시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정리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은상의 작제가 서주시기에 들어와 어떻게 각지에 봉건된 주족을 연결하는 五等爵이라는 네트워크로서 정리되느냐를 계통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즉, 은상의 작제에서는 ‘公’이 작명으로 나타나지 않는 등 은상의 작제는 서주의 작제와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어떻게 해서 西周시기에 들어와 오등작이 성립되는가를 규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五等爵이 어떤 논리와 방식으로 周族들을 연결하여 異姓?異族?異國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즉, 西周 五等爵의 기원과 성격을 정리하는 문제인데, 이를 최근에 공간된 ??殷周金文集成??과 그 축소?해석본인 ??殷周金文集成釋文??, 그리고 1988년 이후에 발견된 金文을 수록한 ??新出殷周金文集錄??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公?伯?子?男과 西周의 世代分治
1) 公
公은 西周의 五等爵에 포함되어 있지만 殷商에서 爵으로 쓰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찍이 殷商 甲骨에 나타나는 五等爵을 검토한 董作賓은 甲骨에 보이는 당시까지 발견된 ‘公’자의 8가지 사례가 모두 사냥할 때 이용하거나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후대의 ‘行宮’에 해당하며, 따라서 甲骨文에는 爵位로서의 ‘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갑골문의 집성이 이루어지면서 ‘公’자에 대한 용례 역시 크게 증가하였는데 지금까지 두 가지 자형으로 쓰인 총 44片의 ‘公’자가 들어있는 갑골이 정리되었다. 이 중 ‘公’의 작칭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陳夢家와 胡厚宣이 “丁巳卜, 三公父二歲”로 판독한 ??甲骨文合集?? 27,494片이다. 두 사람은 이 片에 보이는 ‘三公’이 武丁 이전의 군주였던 陽甲, 般庚, 小辛, 小乙 중의 3명이었으며, ‘父二’는 이 片을 康丁시기의 卜辭라고 가정할 때 祖庚과 祖甲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에 따르게 되면 은상의 갑골에서도 사람을 ‘公’으로 칭한 사례가 있었다고 정리하게 된다. 그러나 于省吾는 지금까지 발견된 ‘公’자의 용례를 총정리하면서 27,494片에 보이는 ‘公’자 역시 ‘下’로 해석해야 하며 卜辭에는 先王을 ‘公’으로 지칭한 사례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殷商의 갑골에서는 ‘公’이 爵稱 내지 죽은 조상인 先公의 호칭으로 쓰였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고, 의심되는 사례 또한 거의 없다. 또한, 殷商의 金文을 살펴보아도 ‘公’이 언급된 경우는 <?公父丁?>의 “?(藝)公父丁”이라는 명문이 거의 유일한데, 이 사례만 가지고는 ‘公’의 은상에서의 작칭, 또는 선공의 호칭으로서의 사용여부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董作賓이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갑골에 나타나는 ‘公’은 “天邑商公宮”의 사례와 같이 ‘行宮’의 뜻으로 쓰인 사례가 많다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이와 같이, 殷商에서 사람을 ‘公’으로 칭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람을 公으로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周代에 와서부터이다. 그러면, 周人들이 어떤 사람들을 호칭할 때 ‘公’을 사용했는가를 살펴보자.
西周 청동기에서 사람을 ‘公’으로 하는 용례에는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서주청동기는 대부분 ?器라고 불리는 祭器가 대부분으로, 청동기 銘文에 청동기를 제작한 사람과 그 청동기로 제사를 받을 사람을 표기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微가 康公을 위해 寶尊?를 만들다”에서 微는 청동기의 제작자를 康公은 제사대상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방법에 따라 먼저, 제사대상자인 死者를 ‘公’이라고 부른 사례를 정리해보면 아래 표와 같다.
<표1> 公이 제사대상자로 나타나는 西周 청동기 빈도표(??殷周金文集成??)
Ⅰ Ⅱ Ⅲ Ⅳ
西周
初期 公(05219, 05842, 02181) ① 己公(02729)
② 日癸公(05928)
③ 乙公(03863, 07304, 08825) ① 單公(02270)
② ?公(00565)
③ 召公(00915)
④ 周公(10067)
⑤ 楷公(06486)
⑥ 笭公(06487)
⑦ ?公(04131)
⑧ 可公(09086, 09087)
⑨ 康公(10309, 09244)
⑩ ?公(02740, 02741) ① 公母(03631)
② 公丹?(09393)
③ 公日辛(05979)
西周
初?中期 辛公(06005)
西周
中期 ① 乙公(00246, 03702, 03917, 04414, 10175)
② 丁公(00246, 05960)
③ 己公(10321)
④ 辛公(00246, 02817, 05430) ① 黃公(02776)
② ?公(09897)
③ 釐公(00036, 09728)
④ 益公(04061, 09899, 06013, 09900)
⑤ 多公(09827)
⑥ 宗公(10313)
⑦ 聖公(00745, 00746, 00747, 00748, 00749, 00750, 00751, 00752, 02713) ① 公叔(04199, 04200)
② 公己(09690, 09691)
③ 公命仲(03828, 03829, 03830, 03831, 03832)
西周
中?末期 乙公(05?02789)
西周
末期 公(02762) ① 乙公(04168),
② 丁公(04278, 02818, 04466)
③ 癸公(02821, 02822, 02823, 04303, 04304, 04305, 04306, 04307, 04308, 04309, 04310) ① ?公(04090)
② 鄧公(04055)
③ ?公(04466)
④ 南公(00181)
⑤ 姑公(04436)
⑥ 武公(04071, 04072)
⑦ 城公(04274, 04275)
⑧ ?公(02818, 04278)
⑨ ?公(00141, 03958, 03959)
⑩ 穆公(00105, 00356, 00357) 公仲(00181)
① 乙公(02413)
② 癸公(04685, 09896) 義公(03624)
1) 위의 표에서 Ⅰ형은 ‘公’, Ⅱ형은 ‘天干+公’, Ⅲ형은 ‘○公’, Ⅳ형은 ‘公○’을 가리킨다.
2) 위의 표에서 ( ) 안의 수는 ??殷周金文集成?? 편호를 나타낸다.
위의 표를 보면, 西周초기에서 말기에 걸쳐 死者를 ‘公’이라고 부르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死者를 ‘公’으로 표기한 서주청동기는 그 유형에 따라 Ⅰ형: 公, Ⅱ형: ○公(○에는 天干), Ⅲ형: ○公(○에는 지명 등), Ⅳ형: 公○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Ⅰ형은 Ⅱ?Ⅲ형의 생략형이고, Ⅳ형 역시 여성과 Ⅱ?Ⅲ형의 도치형이 섞여있다. 따라서, Ⅰ형과 Ⅳ형을 제외하면 Ⅱ형과 Ⅲ형이 ‘公’자 청동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먼저 Ⅱ형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까지 발견된 Ⅱ형의 청동기에 보이는 제사대상자 중 ‘○公(○에는 天干)’은 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死者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서주시기에는 죽은 사람을 ‘○公(○에는 天干)’으로 표기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죽은 사람 중에서도 어떤 사람을 ‘公’으로 표기했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1976년에 陝西省 扶風縣의 莊白村에서 발견된 주로 西周中期의 청동기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중 1호?藏에서는 명문이 있는 74건을 포함한 전체 103건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 微氏 가족의 동기가 55건에 달한다. 그 중 世系와 관련된 <乍?折?>, <?尊>, <史牆盤>, <?ゑ?1>, <?ゑ?2>의 명문은 微氏의 7대에 걸친 世系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2> 微氏의 7대에 걸친 世系表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乍?折? 父乙 ?
?尊 父辛 ?
牆盤 高祖 烈祖 乙祖 亞祖祖辛 乙公 牆
?ゑ?1 高祖辛公 文祖乙公 皇考丁公 ??
?ゑ?2 高祖 亞祖 文考 ??
위의 표를 보면, <乍?折?>에서 ?가 자신의 아버지를 ‘父乙’로, <?尊>에서는 ?이 자신의 아버지를 ‘父辛’으로 부르는 것처럼, 西周 사람들은 西周中期까지 ‘[父?母?兄…]+天干’의 형태로 이루어진 廟號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史牆盤>에서부터는 이러한 관습에서 벗어나 죽은 아버지를 ‘○公’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西周中期 이후 가부장제의 확립과 형제의 군신으로의 전화와 같은 변화 속에서 ‘父’가 ‘한 세대 위를 나타내는 호칭’에서 ‘○○父’와 같이 살아있는 사람의 字로 그 의미가 변화기 시작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西周中期 이후 死者를 ‘○公’으로 표기하는 것은 殷商에서 1세대 앞의 족집단을 ‘○祖△’으로 표기한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또한,<?ゑ?1>에서 ?だ? 자신의 조상을 ① 高祖辛公―② 文祖乙公―③ 皇考丁公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西周시기에 ‘公’은 자신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父?祖?曾祖 등의 모든 직계조상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西周中期에 師望이 자신의 父를 ‘?公’이라고 부르고, 西周末期에 師兌가 그 조상을 ‘皇祖城公’, ‘皇考釐公’ 등으로 부른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서주청동기에서 死者를 ‘○公’으로 부르게 된 것은 西周中期 이후 父’자가 한세대 위의 아버지 형제세대를 나타내는 명칭에서 산 사람의 字로 쓰이기 시작한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에 따라 자신보다 위세대의 죽은 조상 모두를 ‘○公(○에는 天干)’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는 살펴보았다.
그런데, 西周中期 이후 死者를 公으로 칭하는 것에 대한 이와 같은 결론은 爵으로서의 ‘公’과 관련된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春秋??의 蔡侯와 관련된 기사를 보면 ??春秋?? 隱公 8년 6월의 “蔡侯考父卒”이라는 기사가, 8月의 기사에서는 “葬蔡宣公”으로 바뀌어 卒과 葬 사이에 ‘侯’가 ‘公’으로 바뀌고 있다. 이렇게 卒과 葬 사이에 侯?伯?子?男이 公으로 바뀌는 현상은 ??春秋??와 ??左傳??, 그리고 ??史記??에 그 사례가 매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한, 이러한 사례는 爵名이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爵無定稱說’의 주요 근거 중의 하나가 되어왔다. 또한, 이러한 현상을 何休는 “公은 五等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王이 臣子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의 君父를 존숭하게 公을 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라고 하여 孝의 관점에서 추증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西周中期 이후 자신보다 위세대의 죽은 조상 모두를 ‘○公(○에는 天干)’으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何休의 해석은 후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死者를 ‘○公(○에는 天干)’으로 표기하는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이외에도 서주청동기에는 산 사람을 ‘公’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표와 같다.
<표3> ??殷周金文集成??에 보이는 公 활동표
시기 활동 형 ??殷周金文集成?? 편호
西周初期 作器者 Ⅰ 公(09397, 01934, 05021, 10062)
Ⅱ 周公(02268), 腹公(02061), 尹公(09039), ?公(09061), 內公(09597), 應公(05177, 05220, 05841, 03477, 03478, 02553, 02554, 02150, 02151)
Ⅲ ?公?(02152)
Ⅳ 公?(02758, 02759, 02760, 02761)
Ⅴ 公大(太)史(02339, 02370, 02371, 03699)
수여자 Ⅰ 公(02670, 05333, 05400, 05975, 05987, 05991, 09094, 02758, 02759, 02760, 02761, 02728, 02595, 03948, 05986)
Ⅱ 周公(06512), 畢公(04030, 04031), ?公(02659), ?公(02739), 兮公(05399)
Ⅲ 公仲(10581), 公?(04088),
Ⅳ 公太史(05432), 公太保(09103)
정벌자 Ⅱ 周公(02739)
Ⅳ 公太保(02728)
명령자 Ⅰ 公(03862),
Ⅱ ?公(02740, 02741)
受命者 Ⅱ ?公(02730), 周公*(00251-00256,10175)
불 명 Ⅱ 毛公(02724), ?公(02556), ?公(05984)
西周初期
西周中期 작기자 Ⅰ 公(05948)
Ⅱ 乙公(02376)
수여자 Ⅲ 公仲(06510)
명령자 Ⅰ 公(06005)
수상자 Ⅲ 公仲(06509)
西周中期 작기자 Ⅰ 公(03479)
Ⅱ 穆公(00754, 00755)
수여자 Ⅰ 公(04159)
Ⅱ 毛公(04162, 04163, 04164)
명령자 Ⅲ 公叔(04104, 04105, 04106), 公?(05405, 05994)
제사자 Ⅰ 公(05430)
右 者 Ⅱ 益公(04267, 04268, 10170), 井公(09728), 穆公(09899, 06013, 09900)
수상자 Ⅱ 穆公(04191)
西周中期
西周末期 작기자 Ⅲ 楚公??(00042, 00043, 00044, 00045)
西周末期 작기자 Ⅱ 益公(00016), ?公(04684), ?公(03775, 03776), ?公(03739), 內公(00031, 00032, 00033, 00711, 00712, 04531, 09596, 09598, 03707, 03708, 03709)
Ⅲ 楚公逆(00106), ?公?(04600)
南公有??(02631)
寺(?)季故公(03817, 03818)
명령자 Ⅱ 武公(02835)
右 者 Ⅱ 康公(04197), 穆公(04255), ?ⓐ?(04279, 04280, 04281, 04282), 武公(02805)
수명자 Ⅱ 武公(02835)
Ⅲ 公臣(04184, 04185, 04186, 04187)
명 사 楚公??(11064)
불 명 王子刺公(10152)
西周末期
春秋初期 작기자 Ⅱ 內公(02475)
西 周 작기자 Ⅲ ?公?(03919)
1) Ⅰ형: 公, Ⅱ형: ○公, Ⅲ형: ○公○, Ⅳ형: 公○, Ⅴ형: 公+관직명
2) ( ) 안은 ??殷周金文集成??의 청동기편호(이하 표 모두 동일).
3) *이 붙은 西周初期 수여자 Ⅱ형의 周公은 원래 西周中期의 청동기이다. 그러나 周公에 관한 내용은 西周初期의 사실이기 때문에 西周初期로 분류하였다.
위의 표에 나타난 것처럼, 公은 西周 전기간에 걸쳐 청동기의 제작, 정벌, 명령, 수여 등의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應公이 보배로운 ?를 만들었다.”와 같이 ‘公’이 죽은 사람을 위한 청동기를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公’이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였음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또한, <多友鼎>에서는 ??이 침공했을 때 周王이 武公에게 정벌을 명하거나, ?公이 東夷의 정벌에 참여하고 있는 등의 사례는 公의 위치가 서주왕실에서 극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표3>의 ??殷周金文集成??에 보이는 公 활동표와 앞에서 살펴본 <표1>의 公이 제사대상자로 나타나는 西周 청동기 빈도표를 비교해보면, ‘○公’의 형태가 生稱과 死稱으로 동시에 쓰이고 있는 사례가 발견된다.
① 周公이 文王의 尊?를 만들다
② 延이 周公의 尊?를 만들다.
위 ①의 <周公作文王方鼎>에서는 周公이 청동기를 제작한 살아있는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②의 <延盤>에서는 周公이 제사대상인 죽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生稱과 死稱을 동일하게 쓰는 현상은 周人들이 生者와 死者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左傳??의 “死者를 生者와 같이 섬기는 것이 예이다.”라는 말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生者와 死者를 차별하지 않고 그 거주지를 동일하게 ‘宮’, ‘室’ 등으로 부른 것도 그 방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춘추시기 魯에서 桓公의 廟를 ‘桓宮’, 襄公의 廟를 ‘襄宮’, 魯公의 廟를 ‘世室’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이, 公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호칭으로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은 諡法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와도 일치한다. 문헌에는 諡號에 대해 堯, 舜, 成湯과 같은 호칭은 모두 黃帝가 제정한 시호라는 설과 周公이 武王을 위해 추존한 것이 그 시초라는 설등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王國維는 <?敦> 중의 ‘穆王’이나 西周初期의 文, 武, 成, 康, 昭, 穆王 역시 모두 살아있는 사람의 호칭임을 증명하고, 諡法이 共王과 懿王 이후 생겼음을 추론하였다. 이후 郭沫若 또한 <匡?> 등의 명문을 근거로 西周 共王과 懿王시기에도 諡法이 형성되지 않고 秦에 들어와 비로소 諡法이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諡法의 구체적인 형성시기는 이 글의 범위 밖이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公’만이 아니라 王國維와 郭沫若이 증명한 ‘王’ 역시 生稱과 諡號로 동시에 쓰였다는 사실은 서주시기에 生者와 死者를 동시에 호칭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음을 방증한다.
이상에서 生者와 死者를 동일하게 대하고 동일하게 호칭하는 것이 西周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와 산 자를 동시에 ‘公’이라고 불렀다면, 양자에 무언가의 공통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先學들은 ‘公’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公’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해설 중의 하나는 “天子의 三公을 公이라고 하고, 王의 후예를 公이라고 한다.”라고 한 ??公羊傳??의 해석일 것이다. 이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중점을 ‘三公’이라는 말에 두게 되고 三公은 ??書經?? 周官에 나오는 太師?太傅?太保로 왕이 임명하는 관직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顧炎武는 三公을 職官이 아니라 “天子의 三公을 公이라고 하는 것은 周公, 召公, 畢公, 毛公, 蘇公이 이것이요. 王者의 후예를 公이라고 하는 것은 宋公이 이것이다.라고 하여 인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顧炎武가 公으로 언급한 인물들에는 대부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周王보다 최소한 한세대 앞의 부와 동일세대 내지 그 이전세대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成王과 康王의 시대에는 召公이 太保, 周公과 太公이 太師, 畢公이 太史를 지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중 周, 召 二公은 ??書經?? 君奭에서 “召公이 保가 되고, 周公이 師가 되어, 成王을 左右에서 도왔다.”라고 한 것처럼, 召公과 周公은 文王의 형제이자 成王의 숙부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太保를 지낸 太公은 邑姜의 父이자 武王의 舅로 成王 이하에게는 혼인집단의 원로에 해당한다. 畢公 역시 文王의 아들로, ?尙書序?에서는 成王이 붕어하려 하면서 召公과 畢公에게 제후를 이끌고 康王을 도우라고 하기 위해서 ??書經?? 顧命을 지었다고 하고 있다. 毛公은 周文王의 아들로 대대로 周의 卿士가 되었으며, 蘇公 역시 周公이 “太史와 司寇蘇公이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周武王때에 이미 司寇로 발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西周初期에 ‘公’으로 불린 인물들은 成王과 康王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형제(周公, 召公, 畢公, 毛公), 혼인집단의 원로(太公), 전대 王의 신하(蘇公)에 해당하고,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형제집단과 혼인집단이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중, 아버지의 형제집단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서주 초?중기의 국가의 성격과 관계가 깊은데, 형제관계가 정치?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사회에서는 가족내의 개별적 父子관계가 아니라 위 형제세대와 아래 형제세대 사이에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西周初期에 周公이 그 조카 성왕을 후견한 것은 단순한 삼촌?조카 관계로서만이 아니라 父世代의 대표로서 子世代의 대표를 후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楊寬이 장로감호제도라고 부른 太保와 太師에 의한 太子와 어린 王의 보호제도는 기실 太保와 太師만이 아니라 先王의 형제세대의 공동책임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西周初期의 文王의 형제세대에 의한 成王과 康王의 집단후견은 이를 방증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렇게 세대가 세대를 후견하는 세대국가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康王이 자신을 ‘미미한 이 末小子’라고 자신을 극히 낮춘 것처럼, 周王은 주로 ‘公’으로 불린 이들 선대 세대를 父와 동등한 인물로서 대하고 존숭했다. ??書經?? 洛誥에서 周公이 成王을 子?孺子??子(童子) 등으로 부른 것은 西周初期의 王과 公의 관계가 후대의 전제적인 왕과 신하와의 관계가 아니라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방증해주고 있다. 이렇게 公이 전세대의 보호자 또는 감호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三公’의 관직 역시 왕이 임명하는 관직으로의 의미보다는 적절한 후견인이 선택되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書經?? 周官에서도 三公을 해설하는 끝부분에서 “官을 반드시 채울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그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昭穆제도의 유제가 남아있었다면, 외삼촌(舅)에서 조카(甥)로 정권이 이양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카는 일정기간 외삼촌의 거주지에 거처하면서 가르침을 받아 외삼촌과 조카 사이에 특별한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이후 그 후견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西周初期에 보이는 太公의 활동이나 成王의 사후 太公의 아들 呂伋이 虎賁을 이끌고 康王을 맞는 것은 외삼촌집단과 조카집단 사이의 특별한 연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머니와 동일세대의 외삼촌집단이 ‘公’으로서 王을 후견하는 것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西周시기의 公은 生者와 死者를 구분하여 않고 자신의 세대보다 위세대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원래 세대국가에서의 ‘전세대’ 내지 ‘장로’ 등의 어감을 나타내는 말이었던 公은 서주왕실에서는 왕의 후견세대를 公이라고 부르면서 점차 爵稱으로 전화되어 王의 三公이 되었고, 이 작칭의 의미가 引伸되어 ‘公室’이나 ‘公私’의 ‘公’으로 전화한 것으로 보이며, 다른 일면에서는 死者의 호칭에서 점차 시호에 붙이는 公으로 전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로라는 원뜻도 일부 ‘公’자에 남겨졌. ??漢書?? 田叔傳의 顔師古의 주에서 “公은 노인의 호칭이다.”라고 하거나, ?宏傳의 주에서 “公은 長老의 호칭이다.”라고 하고, ??戰國策??에서 陳應이 張儀의 계략에 빠진 아버지 陳軫을 멈추게 한 것을 “그 아들 陳應이 그 公의 감을 막았다”라고 표현한 것에는 후대에도 公의 원뜻이 일부 보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伯
필자는 西周사회, 특히, 그 중에서도 초?중기의 사회는 (伯)?仲?叔?季가 실질적인 內爵의 기능을 수행하는 兄弟共治로 대표되는 족연합체의 성격이 강하게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론한 적이 있지만, 이러한 가설에 입각한다면, 五等爵 중의 伯은 伯?仲?叔?季를 대표하는 작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례로, ??釋名??에서 “아버지의 兄을 世父라고 하는 것은 嫡統으로 대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또한 伯父라고도 하는데 伯은 ‘가지다’라는 뜻으로 ‘家政을 가지다’라는 뜻이다.”라고 한 것 역시 伯이 室家를 담당하는 長者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를 제작한 사람에 따라 분류하면 伯이 제작한 청동기가 仲?叔?季 전체가 제작한 청동기를 압도하고 있다.
??殷周金文集成??에 보이는 伯이 제작한 청동기를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표4> ??殷周金文集成??에 보이는 伯이 제작자인 西周청동기
Ⅰ형 Ⅱ형 Ⅲ형 Ⅳ형 Ⅴ형 Ⅵ형 Ⅶ형 계
殷?西周 초기 1 1 2
西周 초기 76 60 14 56 206
西周 초기?중기 3 1 2 6
西周 중기 9 27 4 19 1 60
西周 중기?말기 1 1 2
西周 말기 31 5 23 3 23 85
西周 말기?春秋 초기 6 6
西周 1 1 2 3 7
계 89 121 5 44 3 110 2 374
※ 위의 표에서 Ⅰ형은 伯, Ⅱ형은 ○伯?官+○伯, Ⅲ형은 ○○伯, Ⅳ형은 ○伯○?○伯○○, Ⅴ형은 伯+ 官, Ⅵ형은 伯○?伯○○, Ⅶ형은 ‘官+伯○’을 말한다.
위의 표를 보면,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伯이 제작한 청동기가 무려 374개에 이르러 仲?叔?季 전체가 제작한 청동기를 압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西周 전 시기에 걸쳐 公?侯?子?男?伯?仲?叔?季가 제작한 청동기의 수와 ??春秋??와 ??左傳??에 나타난 열국의 爵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표5> ??春秋大事表??와 ??殷周金文集成??에 보이는 西周 爵 비교표
단위 公 侯 子 男 伯 仲 叔 季 계
??春秋大事表?? 國 4 27 50 3 21 105
??殷周金文集成?? 器 55 43 53 1 374 88 94 41 749
먼저, 위의 표를 보는 데는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春秋大事表??는 주로 춘추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殷周金文集成??은 시기적으로 주로 西周시대의 청동기를 분류한 것이기 때문에 양자에 시기적인 차이가 있다. 둘째, ??春秋大事表??는 國에 爵이 하나인데 비해, ??殷周金文集成??은 청동기의 숫자이기 때문에 양자를 단순 비교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비교를 통해 西周의 개략적인 상황을 유추해보기 위해서이다.
먼저, ??春秋大事表??를 보면 伯보다 侯가 많이 나타나고, 五等爵 전체로는 子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殷周金文集成??에 나타난 西周의 청동기 제작자를 보면 伯이 제작한 청동기가 거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서주시기에 중원 각처에 산재해했던 族?邑의 長의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 伯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說文解字??의 “伯은 長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徐灝가 ??段注傳??에서 “伯은 兄弟의 長이다. 引申되어 長의 호칭이 되었다.”라고 한 것은 伯이 당세대의 族長으로서 서주 族?邑에 분포하는 仲?叔?季를 아우르는 존재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이렇게 伯이 伯?仲?叔?季를 대표한 族長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西周시기의 爵制에서는 公?侯?伯?子?男의 伯과 伯?仲?叔?季의 伯을 구분할 수 없으며, 伯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앞서 살펴본 청동기 제작자나 그 제작 대상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서주청동기에 보이는 伯의 활동을 정리해보자.
<표6> ??殷周金文集成??에 보이는 伯 활동표
시기 활동 사례
西周初期 명 사 ?伯(11572, 11573), 伯?(10886), 伯憂(06175), 伯?(08299), 耳伯?(03242), 伯祖癸(05719)
수여자 息伯(05385, 05386)
참전자 過伯(03907)
수상자 尸伯(05407, 05989), 登伯(09104), ?伯?(04169)
불 명 伯□(05393), 辛伯(02712)
西周中期 수여자 伯姜(02435)
참전자 周伯邊(02734)
명령자 召伯(04100, 04101)
右 者 井伯(02783, 02804, 04196, 04243, 04276, 04316), 欲馬井伯(04283, 04284, 02813), ?伯(04209, 04210, 04211, 04212, 04270, 04271), 定伯(04250), 南伯(04256)
수상자 ?伯?(04302)
수명자 伊伯(09714), 伯?(05424)
불 명 格伯(04262, 04263, 04264, 04265), 宓伯(02678), 井伯(09455)
西周中?末期 右 者 ?伯(02786)
西周末期 명 사 昶伯墉(09960)
수여자 伯大(太)師(09725)
右 者 欲馬井伯(04244), 欲工(空)液伯(04312), 毛伯(04296, 04297), ?伯(04257, 04286)
수상자 伯克(09725)
불 명 單伯?生(甥)(00082), ?伯(02043), ?伯(10167), ?伯(09613), ?伯(04253, 04254), ?伯(10149)
위의 表에 보이는 伯의 활동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息伯?蓋>의 “息伯이 姜에게 貝를 하사하였다.”와 같이 伯이 물품을 하사하거나, <生史?>의 “召伯이 生史에게 명하여 楚에 사자로 가도록 했다.”와 같이 사신을 보내는 존재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伯이 일정영역을 관할하던 有爵者였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위의 표와 같이 서주 중?말기 청동기에서 井伯, ?伯, 定伯, 南伯, 欲工(空)液伯, 毛伯이 右者로서 활동하고, 특히 欲馬井伯, 欲空液伯과 같이 爵 위에 官을 冠한 경우는 伯 중의 일부가 서주왕실에 출사하여 관직을 맡았음을 알려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族을 근간으로 한 서주사회에서 伯?仲?叔?季라는 동세대의 장이었던 伯은 伯이 제작한 청동기가 분포지역이나 수에 있어서 여타 청동기를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그 자체가 각 지에 산재한 族?邑의 長이라는 대표명칭이 되어갔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윗세대였던 公과 대비되는 당세대의 長이라는 세대적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3. 子
우리는 앞에서 公은 伯?仲?叔?季보다 한 세대 위의 감호자 겸 보호자이며, 伯은 당대의 族長인 伯?仲?叔?季를 대표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伯?仲?叔?季를 기준으로 公이 한 세대 위라면 한 세대 아래에 해당하는 것이 子이다.
위의 그림은 金文에 나오는 ‘子’자의 異體를 모은 것으로 子가 아이를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子’자는 殷商 갑골에서 그 용례가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그 용례를 분석해보면 父와 마찬가지로 親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조카까지를 모두 子라고 통칭하였다. 祖甲의 시대에 子庚이 있고, 武乙시대에도 子庚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이중 왕실의 子세대는 殷商시절부터 封爵으로 쓰인 사례가 발견된다. 먼저, 董作賓의 경우, 甲骨에 나오는 子를 ① 干支, ② 지명, ③ 婦子, ④ 貞人, ⑤ 王子, ⑥ 封爵으로 분류하고 ‘○子○’나 ‘○子’의 형식을 가진 것은 ‘子’爵에 해당함을 증명하였다. 또한, 胡厚宣은 殷代 武丁시대의 子에 대한 봉건으로 子□, 子宋, 子尊, 子漁 등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이들은 모두 王의 子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殷商에서부터 子세대가 封을 받아 有爵者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서주시기에 들어와 ‘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며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표7> ??殷周金文集成??에 나타나는 子 활동표
시기 활동 사례
殷 혹은 西周初期 작기자 仲子??(09298)
수상자 子(06000)
西周 작기자 ?子(02206)
수여자 子(05373)
불 명 於取子??(11757)
西周初期 작기자 子(10555, 05903), 營子(09390, 09391), ?子?(10575), 贊(柴)子(10069), 單子白(10070), 北子宋(10084), 營子旅(00582, 00583), 解子(00874), 乃子(00924), ?子旅(00930), 子?(03653), 子令(03659), ?子(06446), 北子?(06476), 太子?(12?07296), 子殷用(05274, 05872), 北子(05762, 02329), ?子(05843), 仲子(05909), 子?(05910), 子戌(02271), ?小子句(02272), 營子旅(02320, 02503), 解子(02345), 長子狗(02369), 乃?子(02532),
수여자 子(05355), 陶子(10105),
족 휘 子?(05329), 子脊(05985), ?子(06497),
수상자 ?子(05409)
정벌대상 ?子?(04140)
西周 初期?中期 작기자 黃子魯天(05970), 北子(06507)
西周中期 작기자 ?子(09880, 09881), ?子旅(05256, 03584), ?子于匹(09432), 余子?(02390)
족 휘 子?(05891, 05920)
西周末期 작기자 子?(02416), 交君子?(04565, 09662), ?季子?(05376, 09655), 子叔(09604), ?季氏子?(00683), 保子達(03787), 鑄子叔黑?(03944), ?子叔?(10219), 貯(賈)子己父(10252)
정벌대상 ???(子)(01?00260)
위의 표에 나타나는 것처럼, 子가 청동기 제작자와 수여자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子’가 西周시기에 爵으로서 기능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지만, 周王의 정벌을 받고 있는 西周末期의 子를 통해 그 변화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王이 文王과 武王이 힘쓴 疆土를 살피는데, 南或(國)의 ???(子)가 감히 우리의 영토를 침략했다. 王이 伐하여 그 곳에 이르고 그 都를 쳤다. ???(子)가 이에 遣間하고(?) 와서 ?王을 맞이하였다. (이에 ???를 따라) 南夷?東夷로 具(俱)見한 (國이) 26邦이었다.
위의 <宗周鼎>은 西周末期의 周昭王이 南征하여 서주의 영역을 침범한 ???(子)를 정벌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古?拾遺??에서는 ‘?’가 ‘子’의 가차이며 따라서 ‘???’에서 子는 군주의 爵名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宗周鼎>에서 ‘?阪?을 ‘南或(國)’ 내지 ‘南尸(夷)’로 지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西周末期에 蠻夷를 ‘子’로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西周의 세대국가적 특징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伯을 기준점으로 볼 때 公은 한세대 위, 子는 한세대 아래를 가리키는데, 한세대 아래의 子세대는 伯?仲?叔?季에게 보살핌을 받는 존재이며, 정치적으로는 부속된 존재라는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를 들어, ??書經?? 康誥에서 周公이 康叔을 ‘小子封’, ‘汝小子封’으로 부르는 것에는 돌보아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어감이 강하게 들어있다. 또한, <師??>에서 伯?父가 師?에 대해 “너희 祖考가 我家에 공훈이 있으니 그대가 비록 小子라고 하나 내가 너에게 我家를 맡긴다.”와 같은 기사는 子에게 직사를 맡기는 경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초기의 서주 작제에서는 子 역시 親族의 위계를 나타내는 말이었기 때문에 蠻夷와 같은 이족은 아예 爵의 대상이 아니었음은 ??禮記?? 明堂位에서 九夷之國, 八蠻之國, 六戎之國, 五狄之國 등은 아예 작제적 질서의 외연에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그러나, 西周中期 이후 본격화된 족적질서의 해체와 이민족과의 교류 속에서 爵制의 친족적 색채가 점차 약화되면서 子의 어감에서 ‘한등급 낮은’이라는 어감은 蠻夷에 대해, ‘돌보아할 대상’이라는 어감은 附庸國에 대해 적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스로를 王이라 호칭하였던 楚, 吳, 越, 舒 등이 ‘子’로 분류되었던 것은 결코 그들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姬姓 周의 관점에서의 분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楚의 熊渠가 “우리는 蠻夷니 중국의 號諡를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그 장자인 康을 句亶王에, 中子인 紅을 鄂王에, 少子인 執?를 越章王으로 삼은 것은 周의 입장에서는 異族인 楚의 경우는 원래 친족적 질서인 西周 爵制의 외연에 존재했다가 周에 의해 ‘子’로 규정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4) 男
다음으로는 男에 대해서 살펴보자. 五等爵 중 男은 그 실체가 거의 밝혀지지 않았는데, 혹자는 說文의 “남자는 田에서 힘을 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耕作과 관련하여 기원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西周金文에서 男과 관련된 청동기는 4器인데,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8> ??殷周金文集成?? 男 분류표
시기 활동 사례
西周末期 작기자 ?(許)男(02549)
대상자 ?男(03848), 朕後男?(04313, 04314)
위의 표에 보이는 것처럼, 男과 관련된 청동기는 4기뿐인데 이 중 3기는 출토지점이나 기타상황이 불명이고 나머지 1기는 1967년 陝西省 長安縣 馬王村 西周 ?藏에서 발견된 <許男鼎>이다. 따라서, <許男鼎> 단 1기가 陝西省에서 발견되었다는 근거로 ‘男’이 附庸 내지는 그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등의 추정을 하거나, 4기 모두 시대가 서주말기로 보인다는 이유로 ‘男’이 五等爵 중 가장 늦게 나타난 ‘爵’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억측일 수밖에 없으며, 男에 대해서는 이후의 발견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Ⅲ. 변방의 특수행정구역 ‘侯’
Ⅱ장에서는 西周 五等爵 중의 공백자남을 통해 서주의 오등작이 세대관계를 축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추론해보았지만, 이 장에서는 세대관계와는 다른 특성를 보이는 ‘侯’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尙書?? 禹貢의 ‘侯服’에 대해 僞孔傳에서는 “侯는 候이다. 斥候로 服事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고, ??逸周書?? 職方篇에 대한 晉 孔?의 注 또한 “侯는 王의 斥候이다.”라고 하여 원래 ‘侯’와 ‘候’가 동일한 글자에서 파생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錫圭 역시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여, 殷商의 侯는 원래 척후를 맡아보던 직관이 변화하여 제후가 된 것이라고 하였고, 勞? 역시 “제후의 직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척후를 하는 것으로 봉건제후는 척후로부터 변하여 봉국이 되었는데, 이것은 漢代의 (斥)候官이 縣으로 변한 것과 서로 유사한 길을 밟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侯’가 ‘斥候’에서 기원했다는 설과 달리 그 기원을 활쏘기와 관련시키는 경우도 있다. ??儀禮?? 大射儀의 “司馬는 量人에게 명하여 侯를 헤아리게 한다.”라는 구절에 대해 鄭玄의 注에서 “활을 쏘아 정곡에 맞히는 것을 ‘侯’라고 하니, 天子가 정곡에 맞히면 諸侯를 복종시킬 수가 있고, 諸侯以下가 맞히면 諸侯가 될 수가 있다.”라고 한 것은 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侯’는 원래 활쏘기에서 기원하여 “王者의 干城”으로 변했다는 설도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侯’의 기원에 대한 2가지 설을 살펴보았지만 ‘斥候’를 본다는 것은 접경지역에서 행하는 일이고, 활쏘기에서 기원한 干城이라는 것도 무력에 기반한 것익기 때문에 그 기원이야 어쨌든 ‘侯’의 기본이미지는 ‘변방’과 ‘무력’의 양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侯’의 변방에서의 직무와 관련하여 陳夢家는 卜辭에 나타나는 殷商의 제후를 ① 邦의 경내에 위치한 多伯과 多君, ② 邦의 경계에 위치한 侯田 혹은 多田, ③ 邦의 외곽에 위치한 方白 혹은 邦白으로 나누고 있다. 실제로 金文을 살펴보면, <大盂鼎>에서는 “殷 邊境의 侯?田(甸)과 殷의 正百?이 술에 빠졌기 때문에 師를 잃게 되었다”라고 하여 侯?田(甸)이 변경에 위치해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고, <?令方?>에서는 “明公이 아침에 成周에 이르러 令을 내렸는데 三事令에게 令을 내린 것은 卿事寮와 諸尹과 里君과 百工에게였고, 그와 더불어 諸侯인 侯?田(甸)?男에게는 四方令을 내렸다.”라고 하여 侯가 四方令을 받는 외복의 제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侯’는 畿外 및 그 접경에 주로 위치한 周代적 용어로는 ‘藩屛’을 위해 설치된 군사?행정?경제상의 봉건적 특별행정구역의 長으로 漢代의 外郡이나 唐代의 절도사와 일면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西周金文에 나타나는 ‘侯’의 활동을 살펴보자.
<표9> ??殷周金文集成??에 나타난 서주시기 侯 활동표
시기 활동 사례
서주 명 사 侯(12007, 12008)
작기자 侯(02274), 薛侯戚(02377), 牀侯(03752)
西周
初期 명 사 侯(10793, 10794, 10795, 10796, 10797, 10798, 10799, 10800, 10801, 11835), 康侯(00464, 06173, 08310, 11450, 11778, 11779, 11812, 12020) ?(燕)侯(10887, 11854), ?(燕)侯天(10953), ?(燕)侯舞(11011), ?侯舞?(11860, 11861)
작기자 侯(08301), 康侯?(02153), ?(燕)侯旨(02269), ?(燕)侯(03614, 10303, 10304, 10305), ?(鄂)侯弟?季(03668, 05325, 05912), 魯侯(09096, 09408), 朕(?)侯(02154), 楷侯(04139), 耳侯?(03826), 量侯?(豺)(03908)
수여자 侯(02507, 03906, 02749), 康侯(02504), ?[燕]侯(00689, 05978), 井(邢)侯(09451, 02706, 09893), 相侯(04136)
수명자 康侯(04059), 井(邢)侯(06015)
정벌자 井(邢)侯(02706)
수상자 ?(燕)侯旨(02628), 獻侯?(02626, 02627)
대상자 侯(06196), 丁侯(02346)
受土者 相侯(09303, 09895, 06002)
명령자 ?(燕)侯(02703)
족 휘 亞?侯(05923, 05924, 10351)
西周
初期?中期 수여자 侯(02458)
포로획득 ?侯(02457)
西周
中期 작기자 己(紀)侯(03772, 03977), 蔡侯(09627), 楷侯(09553), 膺(應)侯(04045)
전쟁자 井(邢)侯((04237))
책명받는 자의 관할자 ?뇜?(02820)
사신을 받는자 ?뇜?(00948)
西周
中期?末期 수여자 ?侯(02638)
수상자 膺(應)侯見工(00107-8)
대상자 膺(應)侯(00107-8)
西周
末期 작기자 薛侯(10133), ?(鄂)侯(03928, 03929, 03930), 魯侯(00545, 09579), 己(紀)侯卜虎(00014), 己(紀)侯(00600), 蔡侯(02441, 10195), ?侯(09586, 09587), 筍侯(10096), 膺(應)侯(03860), 曾侯(04598), ?(陳)侯(03815), ?侯(03589), 侯氏(03781, 03782)
수상자 ?(鄂)侯馭方(05?02810)
먼저, 위의 지금까지 출토된 金文에 보이는 열국과 작명을 ??春秋?? 및 ??左傳??과 비교?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殷周金文集成??과 ??春秋?????左傳??에 나타나는 列國의 國?爵 비교표를 만들어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10> ??殷周金文集成??과 ??春秋?????左傳??의 列國의 國?爵 비교표
己(紀) 魯 ? 薛 ?(燕) 井(邢) 陳 蔡 康 ? 耳 曾 獻 ?
金文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春秋??와
??左傳??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柏 相 牀 筍 ?(鄂) 量 ? ? ?? 膺(應) 丁 楷 ?
金文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侯
??春秋??와
??左傳??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위의 표는 侯와 侯氏를 제외하고 侯로 國名이 보이는 모든 작명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표를 보면, ??春秋?? 및 ??左傳??에 보이는 ‘侯’로 기록된 列國은 金文에서도 모두 ‘侯’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侯’라는 爵名이 서주시기에 고정된 칭호였다는 사실을 반영하며, 西周시대에 爵制가 실시되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할 있다. 또한, ??春秋??와 ??左傳??에 기록된 ‘侯’보다 휠씬 많은 侯가 서주시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실례로, ??春秋??에는 齊, 衛, 晉, 陳, 蔡, 杞, 鄧, 邢, 隨, ?, 薛 등의 侯가 보이는데, 金文에는 ??春秋??와 ??左傳??에 보이지 않는 ?, 耳, 曾, 獻, 柏, 相, 牀, 筍, 量, 胡, 膺(應), 丁, 楷, ? 등의 侯가 추가로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金文에 보이는 侯들은 <保?>에서 “王이 保 및 殷 東國의 五侯에게 명령했다.”라고 하거나, ??書經?? 多方의 “너희 殷侯로 民을 다스리는 자들이여.”와 같은 구절에 나타나는 ‘五侯’, ‘殷侯’와 같이 그 구체적인 국명이 散逸된 侯라고 생각된다.
또한, <표9>의 ‘??殷周金文集成??에 나타난 서주시기 侯 활동표’에 정리된 것처럼, ‘侯’는 서주시기에 능동적으로는 작기자, 명령자, 수여자, 정벌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일정 영역을 관할하는 존재였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侯旨鼎>의 “?(燕)侯旨가 처음으로 宗周에 조근을 갔을 때”와 같은 표현이나,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에서 公이나 伯과 달리 侯가 高爵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右者로서 등장하는 사례가 없다는 점, 그리고 ??書經?? 蔡仲之命에서 “내가 그대에게 명하노니 東土에 侯하라.”와 같이 西周의 변경인 四土 중에서 東土를 그 봉건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 등은 侯가 서두에서 살펴본 제가의 설처럼 ‘侯’가 변경지역을 관리하는 특수한 작위였음을 증명해준다.
Ⅳ. 결론
이상에서 西周 金文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처럼, 公?侯?伯?子?男의 五等爵은 그 성립초기에 公(전세대의 원로가 長老로서 국정을 감시?자문), 伯(伯은 그 총칭으로 伯?仲?叔?季의 당세대가 族?邑을 관할), 子(伯?仲?叔?季의 후속세대가 附庸으로 국정에 참여)의 세대국가적 특성을 기본으로 변경의 특수행정구역인 侯와 사례 자체가 너무 적어 분석이 불가능한 男을 합쳐 성립하였다.
이를 그림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公 ← 감호세대(畿內): 王의 1세대 앞
侯 ← 감호세대(畿外): 王의 1세대 앞
伯 ← 통치세대: 王과 동일세대
子 ← 附庸세대: 王의 1세대 뒤
男 ← 附庸세대: 王의 2세대 뒤(?)
위의 표와 같이, 西周의 五等爵은 父子관계와 君臣관계가 정치?사회적으로 아직 주도적인 관계로 부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公?伯?子?(男)를 중심으로 한 세대적 위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書經?? 呂刑에는 이와 관련된 穆王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를 문장의 對句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① ② ③ ④ ⑤
1) 王曰 嗚呼 念之哉 伯父伯兄仲?叔?季弟幼子童孫 皆聽朕言.
∥ ∥ ∥ ∥ ∥
2) 王曰 ? 來 有邦有土 告爾祥刑.
위의 기사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핵심적인 부분은 ④번째 부분으로 ‘有邦有土’가 ‘伯父伯兄仲?叔?季弟幼子童孫’과 對句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有邦有土(邦을 가지고 土를 가진 자들)’는 西周?春秋시기의 문헌에서 일정지역을 관할하는 有爵者와 동의어로 쓰이며, 따라서 穆王시기에는 有邦有土者 내지 有爵者가 伯父/伯兄仲?叔?季弟/幼子/童孫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부분은 ① 伯父, ② 伯兄仲?叔?季弟, ③ 幼子, ④ 童孫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를 爵과 대입하면 伯父〓公, 伯?仲?叔?季〓伯, 幼子〓子, 童孫〓男(?)의 관계가 성립하여 이제까지 살펴본 세대국가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기사만을 보면 男은 원래 ‘童孫’을 가리켰을 확률이 크다고 추측할 수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五等爵이 西周의 통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검토해보자. 문헌에 따르면, 殷周革命 이후 西周의 境內에는 수많은 國이 산재하고 있었는데, ??漢書?? 賈山傳과 ??尙書大傳??에서는 周에 1,800여 국이 복속했다고 하고, ??呂氏春秋??에서는 封國이 400여, 服國이 800여 있었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제문헌의 기록을 헤아리면, 西周初期 周室의 관할 영역 안에는 최소 800에서 최대 1,800에 이르는 수다한 族?邑이 점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열국이 산재한 상태에서 封建을 받은 西周의 封國들은 수많은 異姓, 異族, 異國에 둘러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西周의 封國들이 수많은 異姓, 異族, 異國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는 邦國을 넘어 周王室을 비롯한 각지의 周族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즉, 방국을 뛰어넘는 거대한 족연합이 필요한데, 수많은 周의 族?國이 아무런 순서없이 모이는 것은 혼란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원할한 동맹을 위한 표지, 즉 세대간의 등차적 위계로서의 오등작이 필요했다고 보여진다.
이와 관련하여, ??禮記?? 明堂篇의 기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 周公이 諸侯를 明堂에서 조회했다. 天子는 斧를 지고 南鄕하여 섰다. 三公은 中階의 앞에 北面하는데, (그 열에서는) 동쪽을 상위로 한다. 侯의 위치는 ?階의 동쪽에 위치하여 西面하는데 (그 열에서는) 북쪽을 상위로 한다. 伯의 國들은 西階의 서쪽에 위치하여 東面하며 (그 열에서는) 북쪽을 상위로 한다. 子의 國들은 門의 동쪽에서 北面하는데, (그 열에서는) 동쪽을 상위로 한다. 男의 國들은 門의 서쪽에서 北面하는데, (그 열에서는) 동쪽을 상위로 한다.
위의 기사는 公?侯?伯?子?男이 周族연합의 회합 때의 위치를 나타내는 관념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주왕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식의 존재로 인해 周族同盟이 족연합으로서원할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주족연합내에서의 개별 族?國의 위치를 지정해준 것이 서주 五等爵의 본질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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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peerage system of the Ancient China was an instrument with which the ruling clan consolidated its components. The ruling class was organized with different systems in different period.
The system of grandfather(祖), father(父), brother(兄), mother(母), grandmother(?), or son(子) of Yinsang period developed into gong(公), hou(侯), bo(伯), zi(子), nan(男) [the outer five degrees of peerage] and bo(伯), zhong(仲), shu(叔), ji(季)[the inner peerage] during Western Zhou period.
The peerage system of Western Zhou was composed of gong(公), which means senior generation, and of bo(伯), zhong(仲), shu(叔), ji(季), which means same generation, and of zi(子), junior generation. Among the others, hou(侯) was originated from administrative division of frontier areas during the Yinshang period. On the other hand, the meaning of nan(男) cannot be determined due to insufficient evidences. The five degrees of peerage system demonstrates that different generations administrated separately. Therefore, the peerage system of the Western Zhou was the product of clan system of those days, and it connected heads of Xi(姬) clan, no matter how far they were territorially distant from each other. With the help of the peerage system Xi clan could consolidate its components and surpass other clans in ‘the age of clan’ when several competing clans were active in a same territorial division.
Eventually, the system of gong(公), hou(侯), bo(伯), zi(子), nan(男) , which had been founded as the hierarchy of masters during the Western Zhou period, continued to exist up to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and then disappeared with the advent of state.
Keywords: The Five Peerage System(五等爵), Western Zhou(西周), gong(公), hou(侯), bo(伯), zi(子), nan(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