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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4년 2월 2일 금요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교회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 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회의).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2024년 축성생활의 날 담화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축성생활자 여러분!
용의 기상처럼 영적인 활기가 가득한 2024년 한 해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올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시노드와 시노달리타스일 것입니다. 보통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말이 있다면 잘 안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꾸 반복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같은 길을 걷는 시노드 교회였고 이렇게 같은 길을 함께 걷기 위해 사도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상호 존중하며 경청하는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고 예수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 아닙니까? 그러면 이 교회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의 구별 없이 사랑으로 서로 존경하고 섬기며, 사랑하면서 성령의 목소리를 항상 듣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높고 낮음이 생기고 모두가 평등하게 앉았던 원탁 모양의 교회는 피라미드처럼 층층이 계급이 생기고, 사랑과 상호 존경으로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고 기뻐하던 교회에 여러 가지 법들이 잔뜩 생겨 율법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사람들을 옥죄고 형식적인 전례와 위선적인 신앙생활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교회를 쇄신시키기 위해서 베네딕도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 도미니코 성인 등 많은 수도회 창설자를 세우시어 계급과 율법이 난무한 교회를 다시 초대 교회처럼 사랑과 신뢰, 상호 존중, 경청, 친교가 넘치는 따뜻한 교회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1962년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셨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고 모두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시노드 교회, 같은 길을 걷기 위해 사도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고, 기도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랑했던 예루살렘 교회로 되돌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60주년이 지난 지금 그 이상은 다시 꿈이 되고 말았고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그 꿈을 새롭게 실현하시고자 시노드를 개최하시고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하자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면 시노드와 시노달리타스를 통해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다시 세우고자 우리 축성생활자들은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까요?
결혼한 부부의 이혼 사유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이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황혼 이혼한 경우는 대부분의 사유가 무시받는 것 때문입니다. 이혼하고 단 하루밖에 더 못산다고 해도 사람 대접받으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불륜이나 경제적 어려움은 오히려 큰 사유가 못 된다고 합니다. 요즘은 수도자 중에도 나이 많은 분들이 수도회를 떠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수도회에 거의 없었습니다. 수도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큰 부분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없고 수도회 안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크게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시노드, 시노달리타스를 외치지만 그 실천 중에 제일 중요한 상호 존중이 없어서 함께 사는 형제·자매들이 소외감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고 많이 떠나기까지 합니다. 또 상호 존중이 없어서 함께 사는 것이 즐겁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도피하게 되고 거기서 인터넷, 도박, 알코올 심지어 마약 중독까지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공동체는 점점 개인주의화 되어 분열되고 상호 존중은 더 약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축성생활자 여러분!
시노드와 시노달리타스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상호 존중으로부터 실현이 시작됩니다. 상호 간에 존중하게 되면 함께 있고 싶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참된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그 참된 친교의 모습이 바로 복음 선교로 이어지고 복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024년이 우리 모두에게, 서로를 지극히 존중하여 그 사랑으로 시노드 교회, 시노달리타스 공동체를 만드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축성생활자들을 매우 존중해 주시는 한국의 모든 주교님께 축복을 청합니다.
2024년 2월 2일 축성생활의 날에
한국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30672?gb=K1200 ]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축일2월 2일 성 고르넬리오 (Cornelius)
신분 : 백부장, 베드로의 제자, 주교
활동 연도 : +1세기
같은 이름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Caesarea) 주재 로마군 보병대의 백인대장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당신 천사를 통해 요빠에 있던 사도 베드로(Petrus)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사도 베드로를 모셔왔고, 그로부터 자신은 물론 온 집안사람들 모두 세례를 받았다(사도 10,1-48). 그때부터 성 코르넬리우스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 코르넬리우스는 카이사레아의 첫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축일2월 2일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신분 : 과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556-1640년
같은 이름 : 레토냑,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Joanna de Lestonnac)은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Gaston de Montferrant)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Toulouse)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Joannes de Bordes) 신부와 라이문두스(Raymundus)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고르넬리오 (Cornelius) 형제들과 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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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