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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스천 영성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고집사)
우리나라 교회는 열정적인 국민성답게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하철역에 가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커다란 팻말을 들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외국인이 신기한 듯 카메라로 찍고 있다.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그동안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기도원도 그러한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은 원래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모든 것을 잊고 기도만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뜨겁게 분위기를 띄우고 걸쭉한 말솜씨를 빛내는 부흥사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는 곳으로 바뀌어졌다. 그 부흥사들은 하나같이 성령 충만의 증거로서 방언, 방언통역, 치유, 귀신 쫒음, 예언 같은 은사를 받아야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다. 이미 기도원은 그런 은사를 소원하는 청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빼곡한 상황이기에, 함성이 고조될 때마다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하는 격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목회자들이라면 치유나 예언, 귀신 쫒음 같은 능력을 얻는다면 목회성공은 따 논 당상이고, 평신도들도 그런 은사를 갖고 살아간다면 세상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성경적인 아니라면 한 여름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은사와 비성경적인 은사를 분별하는 것은 평신도들에게 녹록치 않은 일이다. 만일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출처를 알 수 없는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나 기묘한 신비주의에 빠져있다면 교회의 미래는 안 봐도 비디오이다.
삐뚤어진 은사집회의 현주소
필자의 지인은 과거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를 따라 광주에서 열린 은사집회에 참석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대부분 목회자나 교회의 직분자가 모인 집회에는 인원도 엄청나서 체육관을 빌렸다고 했다. 이미 청중사이에서 유명한듯한 강사는 자신이 기도한 성수를 가져가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너도 나도 생수병에 담아가느라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더욱 해괴망측한 일은 예언을 연습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언을 하는 은사를 받으려면 먼저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해서 둘 씩 짝을 지어서 번갈아 예언을 연습하는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정상적인 교인이라면 이같은 행위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이단도 아닌 정상적인 교단의 목회자들이 다수 참석해서 은사를 받으려고 열광하는 현상은 기이하게 느껴졌다고 그 때의 경험을 회상했다. 필자가 청년시절에 다니던 시골교회는 최근 새 목사를 청빙하고 시험이 들었다. 그 목사는 무슨 집회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몇 주간 부산하게 도시로 나다니더니, 자신의 교회에서 강사를 모시고 은사집회를 한다고 교인에게 공표했다. 집회가 시작되자 기묘하게도 모두 통일되게 한복을 차려입고 등장한 강사와 스텝들은 참석자들에게 이상한 조건을 제시했다. 성령을 받으려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잠시 후에 모든 참석자가 입을 벌리고 있는 기현상을 연출했다. 무언가 잘못된 조짐을 눈치 챈 교인들은 그때서야 이들을 초빙한 담임목사에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집회는 중단되고 말았고, 그 목사는 그 일을 빌미로 그 교회를 떠났다. 성령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과 방언통역, 치유와 축사, 예언 등의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얻을 수 있다. 필자도 이런 경험을 수차례 경험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능력은 모두 성경에 비추어 다름이 없어야한다. 성경적이 아니라면 인간적인 방법이거나 악한 영이 개입한 현상일 것이다. 교회가 부흥이 안 되어 고민하는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이러한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얻고 싶은 유혹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더더욱 체계적인 신학교육이 턱없이 부족한 군소교단의 출신으로 자질이 부족한 목사일수록 이러한 성향이 더욱 강하다. 이들은 여기저기 떠도는 비성경적인 은사집회에 참석해서 배우고는 자신의 교회에 무분별하게 적용하면서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방언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친숙한 능력일 것이다. 성령운동으로 유명한 오순절 교단에서는 방언은 성령세례의 필수적인 증거로서 강조하도 있고, 대형교회로 유명한 그 교단소속의 담임목사는 전교인이 방언하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제는 어느 교단이든 상관없이 예배나 집회의 통성기도시간에는 으레 방언 기도하는 현상이 일반적이 되어버렸다. 방언을 주제로 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해진 어느 목회자는 아예 전국을 순회하면서 방언집회를 열고 있다. 이처럼 방언은 은사집회에 빠질 수 없는 현상이기에 더욱 성경적인 분별력을 요구하고 있다.
성경적인 방언인지 아닌 지를 재는 잣대인 성경말씀을 비추어 생각해보자.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은 타국의 언어인 외국어를 뜻한다. 그 당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모국어를 가리킨다. 그래서 그 때에 전 세계에서 모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지역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렇듯 방언이란 실제 언어인 외국어였기에, 당시 방언의 은사를 가진 자가 방언을 말하려면 반드시 통역자가 옆에 있어야 하며,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했다(고전 14:28). 그러므로 은사집회나 예배의 통성기도시간에 모두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은 성경적이 아니다. 정작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다면 방언 통역하는 이의 통제를 받으며 하거나 혼자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렇지만 방언 통역하는 이는 아주 드문데, 방언하는 사람은 넘쳐나고 있으니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방언의 목적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고전 14:22)"이라고 씌어 있다. 고전 14장 뿐 아니라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도 고린도지역과 세계각지에서 모인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표징을 보이는 전도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인들이행하는 방언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교인들이 방언과 같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즉 실제적인 영적 체험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실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불어 방언의 경험이 구원받은 증표라고 생각한다는 것인데, 즉 방언을 함으로써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도 생기고, 이들에게 배워서 방언하는 촌극도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이 시대에 방언의 은사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개인기도 시간에 외국어로 방언을 하는 경우도 보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방언이 계속해서 바뀌면서 나오는 경우도 보았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거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경우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경험도 체험하였다. 게다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오래 기도해도 피곤하지 않고 스트레스와 억눌린 응어리가 풀어져 몸이 가벼워지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현상도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방언을 하는 이들이 더 많다. 이들의 방언은 몇 마디의 알아듣지 못하는 음절을 반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들은 기도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이 같은 방언을 계속하고 있다. 방언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능력이라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와야 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반복해서 이미 입에 익숙한 방언을, 그것도 짧은 음절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과 상관이 없는 일이다. 심지어는 아주 듣기 싫고 기분 나쁜 음절을 내 뱉는 이들도 있다. 깊은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도 역사도 나타나지만 더불어 악령도 틈을 탄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방언은 초신자에게 신적 체험을 하는 신비로운 수단인지는 몰라도, 오용하거나 악용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도 적지 않다.
치유
은사집회의 대표적인 현장이 치유집회이다.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든다. 세간에서 유명한 손기철 장로의 집회는 디지털 TV사이트에서에서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아 전 세계에서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과거에도 국내외에 유명한 치유은사를 가졌다는 이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 시대와 장소를 떠나 고치기 힘든 질병을 가진 이들은 어디서나 넘쳐나기에 이들의 등장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요즘은 동네의 작은 교회에서도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은사집회나 치유은사를 가졌다는 이들이 북적인다. 과연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병원이나 약국이 없어졌어야 할 터인데, 그런 현상은 없다. 물론 이 시대에도 성령의 치유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는 치유은사를 가졌다는 이들 중에 과연 진짜가 몇명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교회성장을 간절히 원하는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은사를 얻기를 원하기에, 기도로 열심히 하고 이름 있는 치유 은사자들의 집회를 쫓아다니며 배우다가, 어느날 자신도 그런 은사가 있다고 현수막을 내걸고 집회를 하고 군중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필자가 전에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도 설교 후에 여러 병명을 호명하며 이들의 질병이 나았음을 선포했다. 성령운동으로 유명한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를 따라한 행위로 비쳤지만 진의를 알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병자가 나와 치유를 부탁한 것도 아니고 치유를 인정하는 것도 아닌, 예배의 설교자가 스스로 질병치유를 선포하는 것은 기이한 일로 보였다. 어째든 비성경적인 방법이나 효과가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유은사를 가졌다는 목회자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말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 중에 그동안 유명한 치유은사 집회에 쫓아다녀봤지만 효과가 없었음을 고백한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난다. 그러므로 분별력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는다면 이들의 말에 휘둘려서 고생의 떡을 먹게 될 것이다.
먼저 치유 은사자들의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과 차이가 나는 게 많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때 암시는커녕 준비조차 시키지 않았다. 심지어는 몰래 옷 끝을 잡은 여인도 치유 받았다. 그렇지만 심리치유인 경우 스텝들에게 분위기를 조성하며 음악도 곁들이고 간절히 사모하도록 준비시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처음 본 사람에게 간단한 말 한마디로 치유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심리치유는 성경의 치유와 거리가 달리 정교한 심리적인 기법을 이용한다. 심리학과 종교를 결합한 방법으로 타종교, 특히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심리치유의 성패는 영적인 능력이 아니라 심리와 암시기법, 투사심리학의 방법으로 치유를 일으키는 게 다르다. 만일 성령에 의한 치유은사라면 예수님처럼 단순명료하게 치유가 일어나야지 고도의 심리적인 방법을 곁들일 수 없다. 그렇지만 치유은사집회에서 이러한 모습을 너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 다른 관점은 치유의 효과가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가 평신도 시절에 다니던 교회에서 외국에서 유명하다는 치유강사를 불러와 질병을 가진 이들의 기대감에 온 시내가 술렁였다. 그 교회에는 필자도 잘 아는 초등학생 소아마비환자가 있었는데, 그 집회에서 치유되었다고 선포하였다. 그 소녀가 마침내 목발을 버리고 걷자 온 청중이 환호하였고 집회분위기를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그 어린 환자는 여전히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 때에는 나아진 것 같았는데, 나중에 보니 아니라는 거였다. 그 어린 환자가 경험했을 실망감을 떠올리니 그 강사에 대한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같은 일은 신유집회에서 비일비재하다. 그 당시에는 뜨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나은 것 같았고, 아님 믿음에 의지하여 나았음을 모두에게 선포했는데,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충남대 의대 교수인 임성진집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마음의 병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검사를 해봐도 이상이 없는데 아픈 것이다. 그래서 이적치유자의 말 한마디에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결국 이 환자는 애초부터 아프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가 흔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의료현장에서 의사가 설명하는 내용이 환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사측의 원인도 있지만 자기 몸의 질병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환자가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사실도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암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에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안압이 높다며 녹내장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에 녹내장에 걸렸음을 받아들이고 목사의 기도를 받고 나았다고 간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질병이 아닌 것을 오해한 경우이다. 셋째는 그 유명한 위약효과(placebo effect)이다. 가짜 약을 먹은 사람도 그것이 약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질병이 낫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이적치유 은사자의 강력한 암시는 가장 좋은 위약이 될 수도 있다. 넷째, 질병의 자연사를 모르면 오해가 발생한다. 어떤 병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방치했을 때 어떤 경과를 밟는지 관찰한 것이 질병의 자연사(natural course)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것이 감기의 자연사라면 평생을 두고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는 것은 아토피, 류머티스 관절염 등의 만성질환의 자연사이다. 질병의 자연사를 아는 것은 치료 효과를 판정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제 막 치료될 만한 시점에 기도를 받아 치유한 것으로 인정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재발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섯째, 검사의 특성 및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가 발생한다. 질병을 진단하기 위해 행하는 검사에는 선별검사(screening test)와 확진을 위한 검사가 있다. 선별검사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 질병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가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검사이다. 선별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는 것은 그 질병에 걸렸을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 높으므로 확진을 위한 검사를 시행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질병을 확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유 간증들이 선별검사만 받은 상태에서 확진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섯 번째로 통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겨난다. 10명의 그리스도인이 이 암의 말기 상태에서 치유집회를 찾았다. 치유 은사자는 그들이 모두 나았다고 선언했고 5년 후에 보니 그 중 2명은 실제로 살아있었다. 이 두 명이 정말로 이적치유를 경험한 것일까? 이 치유집회가 정말로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 환자수가 100명으로 늘어난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3명이 살아있고 97명이 사망하였다면 치료효과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검증하는 것이 통계학이다. 통계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모든 치료행위는 그 주체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사이비의료행위이다. 일곱 번째, 치유 간증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적지 않은 수의 경우 진단이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나 치유자에 의해 붙여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간증 전체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이적치유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진단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치료 효과의 검증이 필수적이다. 치유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그가 확실히 병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확진검사 결과(조직검사)가 있어야 하고, 집회 후에도 그에 준하는 검사를 시행해 병이 사라졌음을 환자의 증언에 의해서가 아닌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동안 오랜 세월에 걸쳐 치유의사 집회가 열려왔고, 지금도 신령한 치유은사자가 나타나면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간다.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찬양, 카리스마를 겸비한 은사치유자의 말에 열정적으로 화답한다. 이윽고 자신의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이가 강단에 오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선포하면 광란의 도가니가 된다. 그렇게 은사치유자는 유명인사가 되고 소문에 꼬리를 물고 그 집회는 놀라운 영적 집회로 둔갑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자. 십여년전 엄청나게 유명했던 할렐루야기도원 김계화 원장의 말로가 그렇다. 맨손으로 암덩어리를 꺼내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러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해놓고 있으며 이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녀의 치유은사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의 결론이다. 치유은사집회뿐 아니라 유사 빈야드 집회, 신사도운동, 만민 중앙교회 집회 등에서는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는 등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집단최면에 의한 심리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 속아 쫓아다니는 목사를 둔 교회라면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귀신 쫒음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도 성령이 주시는 대단한 은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통적인 교회보다 베뢰아 귀신론으로 널리 알려진 성락교회와 같은 이단에 속한 이들이 귀신을 잘 쫒아낸다며 유명세에 오르기도 한다. 이 같은 현상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귀신들린 이를 교회로 데리고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칠 것이다. 그래서 귀신을 쫒아 내는 능력만 지닌다면 일거에 유명한 목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니, 이를 소망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사실 눈을 돌려 교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자신이 아는 신령한 기도원이나 교회의 목사를 찾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으니, 귀신을 쫒아 내는 목회자들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귀신을 쫒아내는 방식은 성경적이 아닌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끔 언론기사에 알려지는 것처럼, 감금해 놓고 음식을 주지 않고 고통을 주거나 신체적인 폭력을 가해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은 간단한 말로 귀신을 쫒아냈다. 바울사도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스토커 짓을 하는 귀신에게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나가라고 소리치고 있다. 귀신을 쫒아내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외에 신체적인 접촉은 필요 없다. 그렇지만 수많은 축사 은사자들은 갖가지 도구나 기이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한마디로 자신들이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가짜 축사은사자들은 귀신들린 현상이나 정신분열증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자들은 정신분열증환자이거나 귀신 들린자이고 드문 경우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경우도 있다. 이들은 병원에 데리고 가면 100% 정신분열증환자라고 진단하며 약을 제조해주고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말을 한다. 기독교 정신과 의사중에서도 귀신들린 현상이라고 진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이 의학적 지식이나 임상실험에서 귀신들린 현상을 인정하는 일은 단연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신앙관으로 이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는 지는 몰라도 현실에서 찾는 것은 거의 드물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더 큰 해악은 정신이상자들은 무두 귀신들인 것으로 진단하는 목회자들의 몫이 더 크다. 정신병에 의한 현상은 환각(환청, 환시), 망상, 부적절한 감정 등이다. 누군가가 말을 한다거나 혹은 하나님이 말을 한다는 경우도 모두 계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환청의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짜 축사자들은 이들의 질환을 구별하지 못하여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죄악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귀신들린 자들은 일반적인 정신질환자와 비교해서 힘이 엄청나게 세고, 허황된 말이라도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필자도 귀신을 쫒은 경우도 있고 사람 몸 안에 들어간 귀신과 여러 시간 대화한 경험도 있다. 그 예를 소개하겠다. 오래전에 필자의 지인중에 정신이상 증세가 발병하여 종합병원 정신과에 가서 진찰했다. 의사는 그녀가 중증 정신질환자로서 10년이상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필자는 가녀린 여자가 힘이 세고 허황된 말이라도 일관성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필자의 집에 데려와 아내와 같이 기도하여 3일만에 쫒아내었다. 그녀가 다른 정신질환자와 다른 것은 엄청난 힘과 일관된 말 그리고 며칠 동안 자지 않아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에 착안했다. 또 다른 예로서, 귀신과 대화한 사건도 신적인 능력을 감지했기에 구별할 수 있었다. 귀신들렸는지 정신질환자인지 구별하는 것도 그가 필자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에 있었다. 그 사람은 필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냈기에 정신이상자라고 볼 수 없었다. 사람 속에 들어간 귀신은 처음에는 자신을 가브리엘 천사라고 속였다. 나중에 그가 천사가 아니라 마귀인 것을 알아챈 것은 과거의 일은 필자의 생각을 읽어내서 잘 알고 있었지만 필자가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했기 때문이다. 마귀에게 속아 몇 시간 동안 고생했던 필자는, ‘사탄아 나가라’는 한마디에 즉시 그 사람은 귀신들린 현상이 사라졌다.
몇해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필자에게 귀신을 쫒는 은사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필요하면 언제나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째든 정신이상자를 보면 무조건 귀신들렸다고 진단하고 물리적으로 쫒아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가짜라고 보면 된다. 귀신을 쫒는 일은 기독교의 목회자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스님이나 무당 혹은 퇴마사로 자처하는 이들도 주변에 있다. 이들의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상관없이 성령이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정신이상자들을 보면 무조건 고쳐준다고 달려드는 목사들을 조심해야 한다. 귀신을 쫒아내는 일은 영적인 에너지가 엄청나게 많이 소진되는 일이기 때문에 필자도 왠만하면 맡지 않으려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정신이상자들은 귀신들린 자보다 정신질환자가 더 많다. 그러므로 축사로 낫기보다 병원의 치료를 받아야한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는 귀신을 쫒아낸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들은 권사나 장로, 목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들을 분별하고 조심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삶이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예언
예언은 교회에서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이다. 평신도 중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면 목사들은 교회를 나가라고 하기일쑤이다. 목사가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면 교인들을 들볶기 마련이다. 기도원에 가도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이들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다. 성경에 보면 예언의 은사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 시대에 예언은 존재하는가? 에 대한 답변은 ‘그렇다’ 이다. 그렇지만 거짓예언자들이 판치고 있는 작금의 세상에서 참 예언을 구별한다는 것은 모래밭에 바늘을 찾는 격이다. 그렇다고 모든 예언을 무시하고 거짓으로 치부하라고 하는 말 역시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예언의 무기로 교인들의 금품을 빼앗으며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세상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도 예언의 은사를 얻기를 기도하고 있다. 예언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 큰 은사인 예언을 사모하라는 바울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예로는, 사역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꿈으로 경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몇 해 전에는 주일 예배 시에 설교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성만찬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동시에 성도들에게 전달해준 적도 있다. 또한 남아공에 이민을 가서 이십여년간 아주 잊어버렸던 교회선배를, 어느 날 아침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강력한 생각이 놀랍게도 정확하게 그날 오후에 이루어 진 일도 있다. 그렇지만 아직 필자가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예언으로 알려주셨을 뿐이다. 어째든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를 열심히 하다보면 영적 능력이 생기고 다양한 은사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는 예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적지 않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교회의 여목사는 예언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해주었다고 주장하면서 교인들에게 엄청난 헌금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교회를 떠난 교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필자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두 번 찾아간 기억도 있다. 한번은 평신도시절이고 또 다른 한번은 최근의 일이다. 성경지식이 별반 없던 평신도 시절에 찾아간, 예언한다는 목사는 성경구절만 한 20개 적어주었다. 그렇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는 그 말씀들이 무슨 메시지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거짓 예언자였던 것이다. 최근에 찾아간 예언은사를 받았다는 권사는, 주변의 교인들이 참 예언자인지 분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산골에 위치한 기도원을 찾았다. 그 권사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문제나 처지에 대해 전혀 암시를 주지 않는 필자를 곤혹스러워했으며, 횡성수설하다 예언이 끝이 났다. 이 역시 거짓 예언자에 불과했다. 또한 예로, 언젠가 우연히 예전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는 여집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지금은 예언의 은사가 그쳤지만, 그 당시에는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해줄 것을 주문했었고 자신은 생각에 떠오른 대로 말해주었는데, 그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거나 사업이나 투기 등의 탐욕적인 예언을 부탁하거나 목회자들이 핍박을 해서 괴로워하다가 결국 예언의 은사를 거두어가 주시기를 기도해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겪은 그분의 성품을 고려하면 그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많았으며, 그 말대로라면 예언에 대한 성경적인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아 은사를 사장시켰음이 틀림없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이라면 성경에 비추어 한 치의 어긋남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잘되며 성공하는데 초점을 맞춘 예언이라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예언일 확률이 높다. 또는 점쟁이처럼 일상의 삶에서 사소한 결정을 예언하는 경우도 그런 경우이다. 성도를 세우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며 이득을 목적으로 예언하는 경우도 거짓예언자일 것이다. 설령 예전에 예언의 은사를 받았을 지라도 교만한 성품으로 변질되었다면 하나님이 떠나가셨을 거다. 그런 예언자들은 예전에 자신에게 임했던 은사가 지금도 유지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예언할 때마다 헌금이나 금품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예언자라면 재고할 여지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고압적인 태도로 자기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자라도 되는 양 온갖 폼을 다 잡으며, 자신을 통해 나간 말이 무조건 다 지켜져야 할 것으로 착각한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벌이 임하지도 모르며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예언자이다. 성경적인 예언의 목적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금전적인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담임목사라면 자신을 말을 듣게 하고 헌금을 유도하는 목적으로 예언을 사용할 것이 분명하므로 교회를 떠나야 할 것이며, 기도원 원장이라면 금품을 위해서이므로 다시는 찾지 말 것이고, 평신도라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므로 만나지 말아야 한다. 말세가 가깝고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거짓예언자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최고의 계시는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거나 재물의 유익을 위해 예언자를 찾는다면 이들의 올무에 걸려들어 시련과 환난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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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습관적방언을 말하는것입니다.성령이 감동하실때의 방언과 습관적으로 하는 방언은 역사가 다릅니다.
예언도 성령안에서 예언이 아닌 생각을 통해 받은 감동을 예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훈련때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통해 훈련된 사람들은 정확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훈련된 분들이 많지않음을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사람을 분별하느냐 그 사람의 인격을 보고 둔문제를 보면 대부분 맞습니다.
또한 일반성도들의 예언은 대부분 훈련단계나 은사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주고자 주신 경우가 많기에 오래 못갑니다 그러나 선지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훈련된 사역자 즉 직임을 받는 사역자는 정확합니다.
선지자를 가장한 분들이 많아서 문제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