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항 [정진혁]
돌아오는 모든 날들은 방풍림 후박나무 사이를 지난다
모르는 생각을 베고 누우면
미조항 골목 어디엔가 버리고 떠나온 옛집이 있을 것 같다
오래된 마당 오래된 우물 오래된 부모 오래된 대추나무
봄에는 미조항에 가서
입 잃고 눈 잃고 길 잃기를
아름다운 생 하나 후박나무 아래 서 있기를
어느 생으로부터 눈물이 흐른다
온 생을 밀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야
미조항은 있는 것일까
미조(彌助)가 피었다
전생처럼
-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20
* 올해는 장마가 아주 길어서 길을 나서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떠나면 남해쪽으로는 장마가 걷혀서 다닐만은 하겠지만
아직 중부지방의 폭우로 머뭇거리고 있다.
미조항은 남해의 남쪽에 자리한 항구 마을이다.
물건리에서 시작해서 미조항까지의 물미해안은 내가 즐겨 드라이브 하는 길이다.
꼬불탕꼬불탕 돌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다는 늘 청량하다.
미조항까지 가서 스치듯 우회전하다보면
전복죽을 파는 집이 있다.
갈때마다 꼭 들러서 전복의 내장까지 넣어서 끓인, 초록빛 바다를 닮은 죽을 먹곤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은 잃는 것도 많고 잊는 것도 많고 왜 가는지도 모르고 가는 길이지만
돌아오는 길엔 신의 도움이 있었구나,를 느끼며
가벼운 마음으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장마가 끝나면 하루 전복죽을 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