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아서.
답사일: 2020년10월31일(토)
지 역: 경주 소금강산 일대
참가단체: 울산문화아카데미
참가인원: 17명
현장해설: 김래성교수
천년의 고도 경주, 우리는 희미한 곳에서 흔적을 찾으며 답사의
묘미를 느낀다.
경주는 그 면적이 1,324㎢이다, 크기로는 특별시, 광역시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안동시 다음으로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이렇게 큰 노천박물관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그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역사 도시라고 한다.
사실 경주를 제대로 둘러 보려면 최소 한달 동안 답사만 해도 모자란다.
게다가 어떤 유적은 또 보고 보아도 그리운 법이라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다시 가게 된다.
만약에 타 지역사람이 해마다 3박4일을
답사만 한다 해도 죽을 때 까지 해도 다 못 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는 김래성 교수님을 모시고 답사를 다녀 왔다.
소금강산은
경주시 북쪽에 있는 높이 280m의 산이다.
특히 이곳은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산의 색채가 매우 아름다우며,
산 꼭대기에서 보는 경주 시가의 경치가 뛰어나 예부터
많은 문인과 식객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특히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의 성지로서 더욱 이름이 높아졌다고
한다.
오늘 그 현장을 놓치기 싫어 렌즈 속에 순간을 담기 시작했다.
순간은 지나가면 잊히지만, 그 순간을 잡은 사진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1.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제121호)
이 불상은 경주의 북쪽 산인 소금강산(小金剛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3m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四方佛)형태다.
불상은 서쪽 면에는 아미타삼불존, 동쪽 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쪽 면에는 삼존입상, 북쪽 면에는 보살상 두 분이 새겨 져 있는데,
특히 북쪽 면의 보살상 중 한 분은 얼굴이 열하나에 팔이 여섯 달린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 한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답사 장면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2. 백률사(경북 문화재 제4호)
백률사는 창건당시 이름은 자추사(刺楸寺)였으나 어느새 백률사(栢栗寺)로
바뀌었다고 하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그 후 다시 지었다.
굴불사터사면석불
위쪽에 상당히 길게 뻗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현재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뿐이다.
이 곳은 이차돈의 순교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대웅전 동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유적지 관찰 장면

동쪽 암벽에 삼층탑(음각) 설명장면

3.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경북문화재 제194호)
백률사 뒤쪽 소금강산 정상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상은 보존 상태는 별로 좋지 않으나 얕게 돋을 새김한 조각솜씨는
매우 뛰어나 환상적이다.
마애삼존불좌상

마애삼존불좌상을 설명하는 김래성교수

4.이차돈의
묘
백률사에서 서남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산 능선의 등산로
바로 곁
사당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초석

이차돈 묘터(도굴 흔적)

5.포암유허비 & 광림대의 석혈(경북기념물 제54호)
유허비는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이
하늘로부터 내려 온 곳, 광림대의 석혈은 알천공 목욕한 곳.
신라건국의 씨족장 포암유허비


6.헌덕왕릉(사적 제29호)
이곳은 신라 제41대 헌덕왕(809~826)의
무덤이다.
상대등으로 있을 때 동생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능은 영조18년(1742년)에 북천이 범람하면서 능의 절반이 유실 되었다고 한다.
현재 5개의 상(쥐, 소, 범, 토끼. 돼지)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5개의 상중 하나 ‘쥐’

헌덕왕릉 앞에서 기념촬영

7.동천동 사방불탑신석(경북유형문화재 제95호)
이 석조물은 탑에 사용된 몸돌로 여겨지며, 네 면에 조금 파
들어간 듯이 조각된 불상은 좌상으로
각각 다른 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두광과 선광을 무두 갖추고 있다.
사방불 탑신석 답사장면

사방불탐신석

8.용광동 고분(사적 제328호)
이 고분은 ‘개무덤’, ‘고려장’으로 불리던
폐고분으로, 파괴가 심하여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발굴 하였다.
본 고분에는 사람의 치아와 함께 토용, 흙으로 만든 말, 청동제 십이지신상, 토기, 구슬, 돌배개
등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용광동고분을 설명하는 김래성교수

용광동 고분앞에서

답사는 언제부터 인지 내 삶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되어왔다.
답사에서
주는 1차적 의미는 권태로운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답사에서 주는 이러한 즐거움은 감성의 해방에서 비롯 된다고 하지만 결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즐거움과 동시에 새롭게 느끼고 배우는 지적 충만으로도 이어진다는데 답사의 미덕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더 큰 미덕은 좋은 사람들 속에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설렘 이었다.
문화재 등록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