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부산 근현대 미술 태동기를 돌아보고 있다.(국제신문 지난달 6일 자 22면 보도) ‘개관 20주년 특별전’은 1부 ‘모던·혼성 : 1928~1938’을 통해 일제강점기 부산 미술의 흐름을, 2부 ‘피란수도 부산_절망 속에 핀 꽃’에서 피란기 부산 미술의 역할을 되짚는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 미술사 태동기 부산 미술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된 적은 없다. 이에 이번 전시가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진철 학예연구관, 박진희 학예연구사가 1회씩 개관 20주년 특별전을 안내한다. 전시는 오는 7월 29일까지.
- 부산미술전람회 주도 日 화가
- 조선인의 일상 세심히 관찰·표현
- ‘평등하지 않다’는 미묘한 시선도
- 부산 청년서양화가 8명 ‘춘광회’
- 日 4명 주도 단체로 알려졌지만
- 넷 중 3명이 창씨개명한 조선인
- 다루기 꺼렸던 일제강점기 작품
- 한국 근대미술 재구성 토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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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 요시시게 1928년 작 ‘시장 풍경’(9×15㎝).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장 풍경을 생생하게 그렸다. 일본 마쓰야마시 호조 후루사토관 소장 |
일제강점기 부산에는 일본인이 발간하던 ‘부산일보’가 있었습니다. (현재 부산일보와는 관계 없습니다) 부산일보사는 연례 미술전 ‘부산미술전람회’를 1928년부터 1942년까지 열었습니다. 많은 재부산 일본인 화가와 부산 화가가 작품을 출품했죠. ‘부산미술전람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일본인 화가 안도 요시시게(安藤義茂, 1888~1967)였습니다.
■ 일본인 화가, 안도 요시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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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응구의 1930년 작 ‘장미’(45.5×33.5㎝).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
안도 요시시게는 일본 에히메현 마츠야마 출신입니다. 1927년 부산 본정(本町, 지금의 창선동)에서 악기상을 하던 아버지를 돕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기 위해 부산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동경예술학교 출신이자 제국미술전람회 입선작가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당시의 부산 미술인을 선도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물과 풍경, 드로잉을 잘하던 안도 요시시게는 부산에 머물던 10여 년 동안 시장 풍경(1)을 비롯해 부산 사람 생활을 담은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그의 고향인 마츠야마에는 그가 그린 유화 몇 점도 남아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그가 남긴 유화 2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소녀’와 ‘시장 풍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얀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조선인 소녀 모습을 투박한 붓 터치의 인상파적 양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당시 화단을 풍미하던 ‘식민지의 향토색’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을 ‘계몽’하고자 초청된 경성의 일본인 화가들과는 달리, 조선인의 일상을 같은 생활인으로서 담담하게, 하지만 세심한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그렸다는 점을 주목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부산 사람과 ‘평등한 입장이 될 수 없다’고 느낀 미묘한 타자의 시선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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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식의 1939년 작 ‘도라지꽃과 글라디올러스’(37×45㎝).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
어린 시절부터 일본을 오가며 서양화를 배운 부산 대신동 출신 임응구(林應九, 1907~1994)는 1933년에 부산일보사 전시장에서 첫 개인전 ‘임응구 양화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때 일본인 화가의 영향을 받으며 독학으로 그림을 연마하던 우신출(禹新出, 1911~1992)이 임응구를 찾아가 개인 지도를 청하고 본격적으로 유화를 접하게 됩니다. 임응구는 우신출에게 유화 지도를 하면서 견본으로 삼을 그림을 하나 선물했습니다. 우신출은 그 그림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임응구가 1930년에 그린 정물화 ‘장미’(2)가 바로 그 그림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종식(金種植, 1918~1988)은 1937년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동래고보 시절 그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본 미술 교사 이치이 다메치로의 권유에 따라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해 홀로 유학길에 올라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습니다. 임응구 우신출과 달리 김종식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아카데미즘 회화가 아니라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였습니다. 1939년 작품 ‘도라지꽃과 글라디올러스’(3)는 반추상에 가까운 표현주의적 양식을 추구했던 김종식의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줍니다.
■ 부산 최초(?) 서양화 동인 ‘춘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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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달석 1940년 작 ‘나루터’(54×22㎝).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
1939년 말 김남배 서성찬 서태문 우신출 등 부산 청년 서양화가 8명이 서양화 단체 ‘춘광회’를 결성했습니다. 춘광회는 일본에서 받아들인 서양화 양식을 기반으로 ‘최신 감각’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어두운 시대였지만 자신만의 문화를 향유하고자 했던 부산 미술인의 ‘모던 정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40년 10월 25일부터 3일간 부산 최초 백화점으로 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있었던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5층 홀에서 제1회 작품 발표회를 열었습니다. 1942년 5월에는 새 회원 양달석(4)을 포함해 3명의 회원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람회를 열었습니다.
오랫동안 부산 최초 서양화 동인은 ‘토벽’으로 알려졌습니다. 춘광회가 일본인이 주도하고 일부 조선인이 참여한 서양화가 단체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이름을 쓴 4명 중 3명이 창씨개명한 부산 미술인으로 밝혀졌습니다. 나머지 1명도 조선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으로 연구 결과에 따라 부산 최초 서양화 동인이 수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부산 미술 살피기까지
일제강점기는 한국의 전통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의 욕망에 의해 서양식 근대 문화를 강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시기입니다. 일제강점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추어내는 일은 껄끄러운 일이었고, 금기였습니다.
그러나 있었던 과거를 말하지 않고는 현재를 올바르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부산의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는 부산의 근대미술이 어둠에 덮여있는 미지의 세계일 수 없습니다. ‘부산미술전람회’는 경성에서 개최됐던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와 비교해, 더 자유롭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들이 출품됐습니다. ‘모던·혼성 1928-1938’ 전은 ‘부산미술전람회’ 관련 자료와 부산 최초 서양화 작가 그룹 ‘춘광회’ 관련 자료 등 새로 공개되는 자료를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부산 미술사가 새로이 쓰여지기를, 나아가 한국 근대미술사를 재구성하는 기회가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
부산시립미술관 이진철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