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덕 교수의 용기(1)
우리 들이 어려워하고 땀을 흘릴 때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고, 선의든 악의든 우리들을 기쁘게 해주던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황선덕 교수의 일화이다. 내가 대학 일학년 때 구름다리를 넘어 법과대학에 넘어가, 친구들과 함께 법학개론을 도강할 때이다.
당시에는 요즈음 마냥 교수가 언론사 논설위원 직을 겸직하고 있어 겸직교수라는 별칭이 유행하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 직을 겸직하고 있던 황산덕 교수는 1962년 말, 정부여당이 홍보를 잘하면 국민투표가 부결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박정희 의장이 자신의 정치행위를 국민투표에 부치려던 일에 대하여 ‘국민투표가 능사만은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쓴다.
이 일로 인해, 황산덕 교수는 ‘정치교수’라는 낙인이 찍혔고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1964년 말 파면처분을 받고, 서울법대를 떠나게 된다. 그런데 황 교수의 명언 중 “행위란 어떤 의지와 동작이 있어야 하는데, 이승만 박사의 안면경련증은 의지가 없어서 행위가 아니다” 라고 간접 규정 지은 경우가 있었다. 물론 당시의 학생들은 포복절도하였고 이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그러나 황교수는 평남 양덕 출신으로 본래가 소탈하고 강의내용이 유머가 있어서 학생 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엊그제 박경재 변호사가 고시모임인 “69동지회” 점심석상에서 또 이 이야기를 하여 혼자 옛일을 생각하고 웃은 적이 있다. 박 변호사가 옛날 일을 remind 한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 같던 “이승만 박사의 전유물인 안면 경련증은 의지가 없어서
어떠한 행위, 즉 정치 행위가 되질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웃고 강의를 같이 듣던 내 친구들도 따라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혁명세력인 김종필 씨가 국무총리를 할 때, 황 교수가 입각하였다. 법무부 장관(1974년)으로 입각하셔서 복도에서 만난 황 교수께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그러자 황 교수의 답변은 준비하였다는 듯 나왔다. “짜식아. 너도 해봐! 자리 offer를 거절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즉 국가가 필요하다고 부르는 데에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큰 배신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역대 교육부장관(1976년 임명)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장관을 뽑는 기사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 장관이 1위였다. 그 이유는 황 장관 재임 기간 중 한 건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전부터 내려오던 문교정책을 그대로 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위라는 것이다. 이는 황 장관 같은 분들의 입장에서는 용기 있는 결단 중에 하나였다. 얼마나 아이디어가 많던 분이었던가. 요즈음 같이 문교정책이 조령모개 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웅변같이 말해 주는 바가 크다.
그러던 분이 돌아 가신지도 10년이 넘는다. 내 기억에 89년엔 돌아가셨으니 21년째 된다. 정말이지 세월은 빠르다. 어쨌든 이런 선배님들이 계셔서 좋든 싫든 바른 소리를 하여 왔고 용기 있는 실천을 하여와,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자꾸 소매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황 교수가 남긴 이야기가 21년 후에 되살아난다. “정치행위란 의지와 동작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 시 문제라든지 4대강 문제 그리고 금번 서울시장 사퇴문제는 그런 요인이 없다. 그래서 정치행위가 될 수가 없다? 그대신 곽 교육감 문제는 원천적 의지가 있었다.”.... 이렇게는 안 될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야당 정치인들을 보고, 나는 혼자 웃었다.
<권영민/전 주(駐)독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