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제자 삼으소서
마태복음 4:18-2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부터 창조절이 시작된다. 9월 첫 주일부터 대림절 직전주일까지다.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질서, 창조의 신앙을 고백하고, 회복하려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창세기 1-2장에서 창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새로운 창조로 끝을 맺는다. ‘창조’를 빼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구원의 메시지는 ‘창조와 창조 사이’에 있다. 유대교에서 랍비는 인간을 가리켜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 창조의 동역자로 부름받았다.
잠언에서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30). 여기에서 1인칭 ‘나’는 지혜를 의인화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창조정신에 따라 거룩함을 상실한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전쟁과 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오늘 이 세상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늘 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새롭고,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1)
본문은 예수님이 자신의 동역자로 사람을 찾는 모습이다. 당시 별 볼일 없던 갈릴리 사람들이 첫 제자로 부름 받아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참 의외의 사건이다.
복음서에서 가장 생기가 넘치는 말씀은 제자를 부르신 일이다. 시작은 늘 생기 있고, 창조적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학교를 여셨는데,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사역에 참여할 사람을 부르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눈에 띄는 두 형제를 만나서 그들을 부르셨다. 아마 예수님과 그들은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이전부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갈릴리는 어디인가? 촌놈들이 사는 곳이다. 천대받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이라고 하면 무조건 불한당 취급을 받았다. 무식한 촌놈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랬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탈출구가 없었다. 죽으나 사나 바다를 온 세상 삼아서 살던 그런 젊은이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물을 깁고,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올리며 살았다. 그물인생이었다. 그런 그물로는 평생 가난을 이길 수 없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어렵다.
그리스 어부들은 하늘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나의 배는 너무나 작고 바다는 너무나 큽니다.”
인간의 욕망에 비해 그들이 가진 배는 얼마나 적고, 바다의 위험 속에서 그 작은 배는 얼마나 자주 풍파에 흔들리던가? 내가 가진 그물로는 고작 일용할 양식을 얻기도 힘들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오셔서 영 다른 말을 하신다. “인생의 그물을 내리고, 하늘그물을 소유하라!”
본문을 보라.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그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는 중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의 따름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들은 재고, 따지고, 수지타산을 계산할 새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곧”,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얼마나 즉각적인가? 그 만남과 부르심을 놀라운 사건이었다.
갈릴리 해변에 살던 그들은 밤낮없이 바다만 바라보았지, 별다른 꿈을 꾸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런 어부들은 큰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갇혀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즉각 그물과 배를 포기하였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의 초대는 드라마틱하다. 처음 제자들은 단순히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처음 제자들이고, 제자단 핵심 그룹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소박하게 출발하였다.
2)
예수님은 본래 그들의 훌륭한 점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 걸까? 그렇지 않다.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님은 선생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고, 암기 잘하며, 지식의 양을 자랑하는 수신형의 엘리트를 뽑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창의성 있고, 개성이 뚜렷한 사람, 불량스러우나 의리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학교에서 우등생인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보라. 그들은 사회의 엘리트 코스를 수료하거나, 자수성가한 젊은이들이 아니다. 그 대신 삶을 진지하게 붙잡고, 고난을 이겨낸 경험이 있으며 특히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는 마음이 젊은이들이다.
어부, 세리, 혁명당원등으로 불린 그들은 성격이 겁이 많고, 욕심이 많고, 성질도 급했지만 뜨거운 가슴과 가난한 진실을 가진 이들, 특히 부르심에 과감히 응답했던 장본인들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예수님의 말씀은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은 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겨자씨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잉태한다, 나를 버리면 살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이 처음부터 공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였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으며,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제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물을 택하였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그것은 인생의 전환점이며, 이전 삶의 청산이며, 삶의 목표에 대한 완벽한 수정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것은 몸만 쫒아 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것이다. 누가 참 제자인가? 과연 나는 주님을 쫒아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가?
제자들의 삶을 보라.
지금 포기하는 자는 나중에는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현실을 포기하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얻었다.
지금 부르심을 받는 자는 나중에는 부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당장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랐으며 장차 세상 사람을 부르는 전도자가 되었다.
지금 복음을 듣는 자는 나중에는 전파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며 장차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
3)
예수님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예수, 학교에 가다>라는 책이 있다. 참교육 활동을 시작한 이수호 선생이 쓴 이 책은 예수님을 참교육 운동의 모델로 삼고 있다. 그는 예수님만큼 좋은 교사가 없다고 평가한다.
예수님은 가르치는데 뛰어난 분이다. 그래서 ‘위대한 이야기꾼’(The great Story Teller)이란 별명이 붙었다. ‘들에 핀 꽃, 공중의 새, 물고기 잡는 그물, 무화과 열매, 한 알의 밀알’ 등 별의 별 것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셨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다.
가장 훌륭한 교사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그렇게 사셨다는 점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서 섬기는 교사로, 진리를 위해서 십자가형까지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서 삶으로 보여주는 참 교사가 되셨다. 완벽한 스승을 향해 마침내 제자들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잠간 교사 노릇한 적 있다. 1982년도에 봉천동의 불량주택으로 빽빽이 들어선 무허가 산동네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대학생교사 12명에, 노동자 대학생 30여명. 그들은 17,8세 되는 젊은이들로 교복 입은 또래의 아이들을 가장 부러워하는 영세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공장 일에 치여서 야학에 다닐 엄두도 못 냈다. 점심 때 공장 앞에 가서 하드를 사주면서 구슬렸다.
지금도 인상에 남는 것은 ‘희망야학’에서는 교사와 학생이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교사인 우리들의 이름은 강학, 그리고 학생인 노동자들의 이름은 학강이었다. 즉 강학은 가르치며 배운다는 의미이고 학강은 배우며 가르친다는 뜻이다.
강학은 지식을 가르치고 노동자들의 삶을 배우고, 학강은 대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받되 그 대신 자신의 고달픈 삶일망정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뭘 가르쳤을까? 한문이다. ‘배울 학, 학교교’, 그 경험 때문에 지금도 한자를 더 배우고 싶어 기웃거리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당당할 것을, 후회가 된다.
일찍이 예수님은 어리석은 인간에게서 강학노릇을 하셨다.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셨다. 순진한 어린이들과, 사람취급에서 거리가 멀던 거리의 여성들, 땅의 사람들인 농부와 노동자들, 심지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던 불구자들, 문둥병자들, 들의 백합, 공중의 새에서도 하늘의 뜻을 찾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간격, 하늘의 평화와 땅의 평화의 차이를 일치시키려고 오셨다. 내 발을 씻겨 주시는 선생님, 종에게 무릎을 꿇는 주인,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은 의인, 이쯤 되면 이런 고백이 절로 난다.
“주님! 나를 제자 삼으소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얼마나 신이 날까? 얼마나 든든할까?
사실 이미 우리는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학교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수한 학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불량스럽지만 나를 불러주셨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미련한 나를 지명하여 택해 주셨다는 기쁨, 이것은 신앙인들이 드릴 감사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별다른 표식이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제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물을 택하였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그것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전 삶의 혁신이며, 삶의 목표에 대한 완벽한 수정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부르신다.
“나를 따라 오라”(19).
그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것이다. 누가 참 제자인가? 나는 과연 내 낡은 그물을 새 그물로 교체하였는가? 내 옛 그물의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으로서 새 그물을 받아 들였는가?
제자가 된 우리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신해야 한다. 그물을 포기한 자에서 하나님 나라를 얻는 자로, 제자로 부름 받은 자에서 제자를 부르는 자로, 복음을 들은 자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희망한다. 이미 위대한 스승을 만난 우리는 훌륭한 제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내게 “당신은 제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직 제자의 길을 고민 중에 있다면 “나를 제자 삼으소서”라고 결심하고, 헌신할 것인가? ‘인생의 그물’ 대신 ‘그물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는가?
주님은 나를 제자 삼으신다. 그리고 하늘 그물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 사역에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주님의 사람으로 부르셔서, 차원이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바라게 하신다. 그런 제자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