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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가 말하는 진정성이란 곧 중독의 심각성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는 인생의 밀도이다. 이를테면, 바둑계의 고수인 “그”는 오로지 바둑의 행마를 통해서만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춤의 고수인 “그”는 오직 “스텝”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 오로지 실천과 행동으로 증명되는 중독의 진정성, 지극한 몰입은 “피”의 미학으로 구체화된다. 즉 “피”는 “비장한 투쟁(‘꽃피우는 시간’)”의 증거이자, 경지를 재는 척도이며 그야말로 중독의 “꽃”이다. 중독되는 분야의 시시함이 암시하듯 성석제의 소설에서 중독의 대상은 지극히 세속적인 “통속”적인 세계이다. 중독과 도취는 ‘왜’라고 스스로 묻고 답하는 순간 이미 망실에서 벗어나 각성에 이르게 된다. ‘중독’이야말로 근대적인 이성이나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원근법적 현실 질서와 동떨어진 세계라는 사실을 암시하며 중독은 해방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로 구체화된다. 허무와 허공으로 귀결되는 중독적 삶의 끝이라는 성석제적 소설의 전언은 “똥”과 “오줌”과 같은 배설의 이미지들로도 변주된다.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는 점에서 배설의 이미지는 결국 소모되고 마모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체념적인 제유가 된다. 그러나 성석제는 반복이 숙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역설적인 재생성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거름이 되어 생명을 움트게 하는 똥의 힘, 배설물이 생의 근간이 되는 저항과 전복은 한편 삼류 인생, 통속적 인간을 통해 조형된 성석제 소설의 의의이기도 하다. 성석제에게 있어 소설은 곧 인생에 뚫린 창조적 구멍이며 피의 꽃이자 “중독”의 대상이다. 인생은 허공이며 유랑이다. 소설은 이렇듯 정해진 허무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의 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끈질긴 시지푸스들의 우문이자 자기시험의 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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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모두 나, 지극히 이기적이며 폐쇄적인 “나”에게 있었다. 그랬더니 성석제 소설에서처럼 지극한 경지가 보였다. 청음(聽音)이 아니라 관음(觀音)하라는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아주 조금 알게 된 셈이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다. 예민하고 몸도 약하고 게다가 표정은 어두우면서 말도 없는 딸 곁에서 전전긍긍하시던 엄마 그리고 아버지. 부모라는 이름 앞에 난 언제나 부끄럽다. 고려대학교의 은사님들, 지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문을 던지는 제자의 맹랑함에 그분들은 늘 관대하셨다. 흠집이 미덕보다 많았을 글을 공들여 읽어주셨을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앞으로 더 큰 비평가로 자리매김하라는 따끔한 격려이리라 믿는다. 함께 공부하는 동학들에게도 인사하고 싶다. 그들의 자극과 격려, 위안과 질타는 나를 늘 새롭게 해주었다. 사사롭게 붓을 휘두르는 소인배가 아닌 공기(公器)가 되어, 이젠 세상과 대면하고 소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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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작 가운데 정확한 문장 구사력과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선정하는 안목, 대상작품에 대한 일관된 논리와 비교적 납득할 만한 관점에 바탕을 둔 논지전개라는, 심사위원들이 나름대로 설정한 심사기준에 부합하는 글들은 많지 않았다. 1차 심사결과 가까스로 추려진 것은 ‘지극한 반복, 중독의 미학’과 ‘존재의 업과 숙명의 형식’, ‘비생산성의 정치학과 탈파시즘적 글쓰기’, ‘이상적 사회를 향한 “말”을 위한 말하기’ 등 4편이었다.
이 중 ‘비생산성의…’와 ‘이상적 사회…’는 나름대로 일관된 논지전개능력은 갖추고 있었으나 간혹 드러나는 미숙하고 부적절한 문장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먼저 제외되었다. 한강의 소설을 분석한 ‘존재의 업…’은 안정된 문장과 능숙한 논지전개로 주목을 끌었지만, 논의의 구도를 너무 크게 잡은 데다 관점 또한 다소 진부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에 비해 중독과 해방, 허무라는 논의의 틀로 성석제의 소설을 조명한 ‘지극한 반복, 중독의 미학’은 정확한 문장과 정연하고 촘촘한 논지전개가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한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문학평론 당선작 전문 지극한 반복, 중독의 미학 - 성석제론 강유정
1. 잠언과 유희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겪다보면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가령, “왜 가을이면 단풍이 드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을 뒤지면 찾아볼 수 있지만 “왜 넌 그녀를 사랑하느냐” 따위의 질문에 대면하게 되면 대답은 궁색해지기 마련이다. 개념으로 분석되는 과학의 세계와 달리 실제의 경험세계에서 “왜”라는 질문은 논리가 아닌 비약으로 귀결되기 쉽다. 성석제 소설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성석제의 소설 안에서 “왜”라는 질문은 대답이 아닌 의혹으로 증폭되곤 한다. 질문에 대한 지혜로운 답변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성석제의 소설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성석제의 소설 안에서 다양한 인생사와 사람살이에 얽힌 잠언들을 만나게 된다. 일차적으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성석제 소설의 매력은 활달한 언어구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밑줄을 그어 간직하게 되는 구절들은 소설 곳곳에서 발견되는 잠언들이다. 가령, “인생은 게임이고 게임이 곧 인생이다(「꽃의 피, 피의 꽃」)”, “춤판은 인생의 축소판이고, 인생은 춤판과 같다.(「소설 쓰는 인간」)”, “오늘은 어제의 동어반복이며 나는 남의 반복이다 (『호랑이를 봤다』)”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규정들 말이다. 삶을 숙명적인 것으로 파악할 때 잠언적인 진술이 가능해진다는 평론가 김 현의 말처럼 성석제의 잠언적인 인생론은 세상사에 지친 독자들의 밑줄로 교감된다. 중요한 것은, 성석제의 잠언이 고귀한 예술적 경지나 철학의 심연이 아니라 시시하고 천박한 세상사의 “통속”을 통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성석제는 “도박”, “춤”, “알콜 중독”, “내기 바둑”에서 숙명의 지도를 읽어낸다. 그렇다면 “왜” 성석제는 통속에서 잠언을 길어내는 것일까?
90년대 이후 소설은 세계의 애매모호함을 규명하고자 하는 개인의 내면적 모색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 “왜 이토록 삶이란 고단한 것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천착해 온 동시대 소설이 만성적 위기론과 공생하게 된 근원적인 까닭이기도 하다. ‘위로’라는 말의 사전적 뜻이 “괴로움을 잠시 잊게끔 어루만져 준다”라면 90년대 이후 주류를 이루어 온 소설들은 독자에게 위로라기보다 허무와 좌절의 포즈를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윤대녕 류의 결핍된 개인이라든가 삶을 유희로써 탕진하고자 하는 김영하의 소설적 주인공 그리고 파멸을 생성하는 도착적인 성욕을 통해 부권적 상징계의 음모(陰謀)를 적시(摘示)하고자 했던 천운영과 같은 작가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이후 동시대 작가들에게 있어 소설이란 삶의 어둑신한 피폐를 노출하는 나르시시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라는 협소한 틈바구니에 유폐된 채 서사의 소재는 점차 고갈되어왔고 소설은 생활세계의 먹고 자는 현실과 점점 멀어져갔다. 성석제의 서사적 전략은 바로 “자아”라는 유폐적 공간에 고착된 편집증적 환상을 폐기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성석제가 “자아”를 버리고 선택한 소설의 대상은 바로 생활세계의 다양함이다. 이는 곧 성석제가 “왜 사느냐”라는 오래된 소설의 질문을 “어떻게 사느냐”로 대체했음을 뜻한다. 이에 소설은 질문과 대답이 아닌 일종의 탐사 형식으로 거듭난다. 이를테면, “왜 우는 거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왜 우는 거요?”라는 반복된 질문으로 끝나는 소설 ?해방?은 “왜”라는 질문에 시효만료를 선고한 성석제 소설의 속내를 짐작케 한다. ?해방?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다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린 여자에게 “왜 우는 거요?”라고 묻는다. 그녀가 운 까닭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는 그 날 저녁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를 되짚어 본다. “그”는 한 때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술집 작부인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에게 완전히 미쳐버린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로부터 숱하게 도망치고 게다가 언제나 잡힐만한 곳으로 도망쳐서 남자를 애태운다. 남자는 매번 그녀를 쫓아가 잡아오고 여자는 또 다시 도망가는 과정이 반복된다. 급기야 남자는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술을 끊어서 여자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고 이에 여자는 “담배 한 갑을 다 피우면서 그 담뱃불로 여기 오른손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빈자리가 거의 없게 지”져 다시는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해 보인다. 자, 그렇다면 둘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을 맞게 된 것인가? 아니다. 바로 그 날, 그러니까, 여자가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날 밤, 남자는 자신의 “팔목을 네댓 번” 그어 스스로 “도마”가 되고 “재떨이”가 된 여자를 멀리 쫓아버리고 만다. 둘은 그렇게 헤어지고 “도마”는 일년에 한 번 “재떨이”가 될 정도로 만취해 떠나보낸 여자를 추억한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여자는 이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순간부터 흐느꼈고 마침내 통곡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울었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재떨이”는 왜 거듭 그에게서 도망갔던 것일까? 떠나지 않겠다고 팔까지 지져 보인 “재떨이”를 왜 굳이 “도마”는 쫓아 보냈던 걸까? 남자는 왜 일년에 한 번은 재떨이가 되어 그녀를 추억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그 이야기를 그 날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도마”도, “재떨이”도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도, 우리도, 그 누구도 모른다. 아니 알 수가 없다. 세상은 미로와 같아 아무도 그 입구와 출구를 알 수 없다. 이는 “왜 우는 거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해방」이라는 소설이 “왜 우는 거요”라는 반복된 질문으로 끝나는 까닭이기도 하다. 성석제는 “왜”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소설의 앞뒤에 내세움으로써 해답도 없고 어떤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생유전의 심연을 제시한다. 성석제는 불확정성과 애매성이란 세상살이의 한 특성이라기보다 본질이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로 교체되어야 한다. 성석제의 소설에서 사소하고 덧없는 일상적 인물들의 시시한 삶, 다양하고 구체적인 삶은 수평적 현상학으로 재탄생한다. 마치 황만근이 버려지는 똥에서 거름을 얻고(?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조동관이 똥물 튀기는 하수구 옆에서 장사로 성장했듯이(?조동관 약전?) 성석제는 버려지는 시시한 이야기를 흡수해 소설로 재창조해낸다. 이에 “전(傳)”처럼 이미 사장된 서사 형태는 동시대적 소설의 형식으로 갱신되고 “춤꾼”, “알콜 중독자”, “내기 도박꾼”, “바보”, “깡패”처럼 “똥” 취급을 받던 이들은 문제적인 주인공으로 재탄생한다. 성석제의 서사 전략을 통해 생활세계의 비루하고 구체적인 감각은 삶과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관조의 순간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석제가 보여주는 다채로운 삶이 동시대인의 삶에 결락된 무엇을 은연중에 음화(陰畵)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성석제는 각기 다른 삶과 고통, 사소한 인간들의 생존에 가치를 부여하고 새롭게 서사의 영역에 끌어들임으로써 합리적 사고로 운용되는 원근법적 세계의 한계를 가시화한다. 이에 사소한 인간들을 통해 구축한 성석제적 서사는 이오네스코의 말처럼 ‘우스운 것과 무서운 것의 경계를 넘어’ 삶을 재고(再考)케 하는 충고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문제는 이 지독한 삶을 “왜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가 되는 것이다.
2. 진정한 통속, 지극한 피의 미학
성석제가 제시하는 “어떻게 사느냐”의 첫 번째 유형은 바로 무엇인가에 빠져 그것도 “갈 데까지 가(「홀림」)”, “끝장을 보(「소설 쓰는 인간」)”고 “도(賭)로써 도(睹)하고 도(蹈)하여 도(道)에 도(到)”하는 중독과 외곬의 삶이다. 성석제가 말하는 진정성이란 곧 중독의 심각성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는 인생의 밀도이다. 이를테면, 바둑계의 고수인 “그”는 오로지 바둑의 행마를 통해서만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춤의 고수인 “그”는 오직 “스텝”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 오로지 실천과 행동으로 증명되는 중독의 진정성, 지극한 몰입은 “피”의 미학으로 구체화된다. 성석제의 소설에서 중독의 극한까지 가본 자들은 모두 “피”를 본 자들로 묘사된다. ‘취생옹’이라는 별 볼일 없는 한량에게 중독되었던「유랑」의 도미코는 흥건한 핏덩이를 하혈하고 돌계집이 되고 내기바둑에 미친「고수」의 바둑꾼들은 일생일대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노리며 “피똥”을 싼다. 한편「소설 쓰는 인간」의 춤꾼은 “쌍코피가 터지도록 노력”해 자기만의 스텝을 갖고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기다림에 중독 된「협죽도 그늘 아래」의 여인은 “피가 흘러내리도록 입술을” 깨물어 기다림을 완성한다. 피로 완성되는 경지라는 성석제식의 문법은 “경혈(經血)”을 그 흔적으로 남기고 죽는 작가라는 모티프로도 변주된다(?방?). 즉 “피”는 “비장한 투쟁(「꽃피우는 시간」)”의 증거이자, 경지를 재는 척도이며 그야말로 중독의 “꽃”이다. 노름과 내기의 세계에 모든 것을 걸어 본 사내의 이야기인「꽃의 피, 피의 꽃」라는 제목에서 “피” 혹은 “꽃”이란 바로 중독의 “극한까지 가 본(「책」)” 자들의 경지를 표상함에 분명하다. 이렇듯 “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은 가히 서사적인 굴곡을 갖고 “꽃”을 피운다.
“피”를 보아서 중독의 “꽃”을 피우는 경지는 한편 “홀림”과 “해방”으로 변주된다. 중요한 것은, 중독의 세계에 미쳐 “최소한의 존엄성”을 버리고 자신을 완전히 망실하는 상태가 존재의 궁극적 초월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성석제가 말하는 “해방”의 경지는 완전히 “내”가 사라진 상황이다.
나는 권태를 이기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춤을 추러 갔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춤을 추러 갔다. 나한테는 춤이 직업이고 취미였고 이상이었다. 춤 말고는 나의 고뇌를 잊어버릴 방법이 없었다. (「소설 쓰는 인간」)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존엄이라는 게 있다고 하지. 안락사처럼 자기 의지대로 죽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거. 중독은 그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하는 거야. 자기 맘대로 죽고 자기 권리로 살고 하면 그게 무슨 중독이냐구. -중략- 진짜 중독자에게는 술이 술이고 안주이자 마약이고 인생의 극치이며 일상생활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일세. 자네들은 이해 못해. (「해방」)
성석제에게 있어 중독의 미학은 집착이 곧 해방이 되는 역설의 공간이다. 이 때 해방은 자유와 책임 혹은 논리성과 같은 인과관계를 주관하는 자아의 의지를 탕진해버린 상태이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해방」)” 외재적인 어떤 대상에 전적으로 홀려 “나”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곧 해방인 셈이다. 따라서 일년에 딱 하루 “도마는 재떨이가 되고 재떨이는 도마가” 되는 두 남녀나 책 모으기에 열중한 나머지 “책과 당숙, 두 존재”를 합치면 “2”가 아니라 “0”이 되는 책 수집중독자 당숙(「책」)과 같은 인물들은 중독의 지극함을 통해 죽음 이후에나 맛볼 수 있는 완전한 자기망실의 상태, 해방을 맛본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홀림”의 상태라고 부를 수도 있을 “해방”은 성석제의 소설에서 춤, 내기, 연애, 책 모으기, 기다림, 출도 등의 다양한 인간사로 변주된다. 성석제는 이 다양한 범사(凡事)를 통해 예술이나 철학과 같은 고귀한 형이상학적 주제가 아니더라도 중독되고 매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초월”의 지점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추상적인 논리가 아닌 감각적 중독과 체험적 몰입이 있을 때 비로소 현상학적인 관조, 해방의 순간은 생활세계에 현현한다. 중독의 대상이나 그것의 가치가 아니라 중독의 강력함과 집착 자체가 그 삶의 진정성을 가능케 할 뿐인 셈이다.
중독 되는 분야의 시시함이 암시하듯 성석제의 소설에서 중독의 대상은 지극히 세속적인 “통속”적인 세계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석제가 분명 “통속”과 “통속적인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석제의 대표작 중 하나인 ?통속?은 “통속”과 “통속적인 것”의 차이를 중독의 깊이 혹은 진정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통속?의 줄거리는 “기역”과 “미음”의 바람피우기로 요약된다. 기역과 미음의 바람피우기는 분명 “통속”적인 사건이지만 이미 모든 것을 걸어버린 일생일대의 도박이라는 점에서 즉 “바람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영혼의 코털까지 속속들이 태”우는 자기망각이라는 점에서 중독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연애”로 인생의 지극한 기쁨과 진정성을 맛보는 중독자들이다. 반면, “통속적인 것”의 형편은 그들과 달리 “적당히 <엔조이>해 가면서 <해피>하게 살”기 위해 바람을 피우는 “치우”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치우는 비서와 사랑에 빠져있으면서도 공직 때문에 몸을 사리고 술집 호스테스의 가슴을 주무르면서도 “멸사봉공의 자세”를 운운한다. 바보친구, 치우(痴友)로 한역(漢譯)될 법한 그는,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피똥 싸는” 중독의 세계에 다가설 수 없다. 중독으로 세상과 통하는 통속의 세계에서 ‘적당히 해피한 엔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해피한 엔조이’란 통속을 흉내 내는 “통속적인 자”들에게나 통하는 모토이다. 중독으로 “통속”하는 자들은 “도(賭)의 바다로 무작정 헤엄쳐 들어”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인생이 허물어지(?꽃의 피, 피의 꽃?)”는 것도 모를 정도로 미치는 자들이다.
중독과 도취는 ‘왜’라고 스스로 묻고 답하는 순간 이미 망실에서 벗어나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는 곧 ‘중독’이야말로 근대적인 이성이나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원근법적 현실의 선조적 질서와 동떨어진 세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중독의 경지란 합리적 제도로 규율되는 근대적 일상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에게 근대적 삶이란 개인의 수많은 다양성을 속박하고 일정한 소실점에 감금하는 획일성의 세계이다. 근대적 삶의 원근법적 질서는 획일성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황만근”이나 “남가이”, “곽영출”, “조동관”과 같은 이들이 바보나 문제아로 호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석제는 반복적으로 “통속”과 “홀림”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선조적인 질서로 이루어진 근대성과 역사를 위배하는,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는, 개체적인 개인의 삶을 권장한다. 우리는 바야흐로 “중독”을 통해 진정한 “해방”을 맞볼 수 있는 것이다.
3. 구멍, 허공에서 맞는 해방의 역설
중독과 해방은 분명 이율배반적인 개념이다. 중독이란 자아를 망실할 정도로 무엇인가에 빠져드는 것이고 해방이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즉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석제의 서사적 자아들이 빠지는 중독이 삶의 비밀인 죽음, 허무, 허공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성석제의 인물들이 펼쳐보이는 광대무변한 중독의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중독에의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허무와 죽음을 미리 맛보게 된다. 중독된 자들이 급기야는 맞게 되는 허공, 죽음은 성석제의 소설에서 “홀림”과 “해방”의 경지로 묘사된다. 즉 성석제의 서사적 자아들은 중독과 홀림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중독의 세계에 기꺼이 투신하는 자들이다. 이에 성석제가 그려 보여주는 다양한 인물들의 중독은 현실의 위계적 질서의 무의미와 허무를 반증하는 교란의 유인자가 된다.
이제, 중독은 해방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로 구체화된다. 성석제의 소설에서 지독하게 홀려 피를 본 중독적 인물들은 역설적으로 지독하게 홀림으로써 허무를 직관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이러한 직관의 내용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가 조우하는 세계가 허공, 구멍의 이미지로 구체화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조동관이 죽는 “똥간이굴”, 황만근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려는 빈 공간,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그가 죽음의 순간 보게 되는 펄럭이는 마사오의 빈 소매, 그들은 모두 절정의 순간에 환희가 아닌 빈 공간, 구멍을 발견한다. 눈치 챘다시피 구멍의 이미지는 모두 존재를 “빨아들이려는” 넓고, 허전하고 또한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죽음과 허무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중독의 끝, 경지의 깨달음, 해방이 죽음의 이미지로 채워지는 것이다.
허무와 허공으로 귀결되는 중독적 삶의 끝이라는 성석제적 소설의 전언은 “똥”과 “오줌”과 같은 배설의 이미지들로도 변주된다. 죽을 때 까지 반복된다는 점에서 배설의 이미지는 결국 소모되고 마모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체념적인 제유가 된다. 그렇다면 성석제의 소설은 인생이란 끊임없는 “반복”임을 인정하는 허무주의적 포즈이자 종용인가? 결국 “죽음”과 “허무”로 귀결될 것이라면 “피”흘리며 중독 될 필요는 무엇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성석제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반복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인 셈이다. 그러나 성석제는 반복이 숙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역설적인 재생성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즉 인생은 지독한 반복이기에 허무하고 쓸쓸한 것이지만 한편 모든 것이 반복이기에, 어쨌든 “운이 돌”아 “계속 따는 사람은 없고, 계속 잃는 사람도(?꽃 피우는 시간?)” 없는 공평무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가능성은 그 공평무사가 “내기에서 이기는 자는 세월의 주인인 조물주 밖에 없(「꽃 피우는 시간」,「꽃의 피, 피의 꽃」)”고, “하긴 우리 모두 천천히든 빨리든 죽어(「붐빔과 텅빔」)”갈 수밖에 없는 숙명과 조우함으로써 전복적 힘으로 실현된다. 즉, 죽음과 허무로 일상을 사유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부단한 개발과 발전을 거듭하리라는 근대적 계몽주의는 교란된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질서가 구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성석제는 “반복”이라는 명제를 통해 구분을 무화한다. 신분, 재산, 학벌, 지방색 등 차이로 구별되는 위계적이며 권위적인 삶의 방식은 반복이라는 절대명제 앞에서 쓸모를 잃는다. 이에 역사에 남을만한 영웅적 행위를 한 위인의 삶이나 한낱 “시골 길가의 버들, 담 위의 꽃(「유랑」)”처럼 유명무실한 존재나 모두 평등한 존재로 다시 호명된다. 구분과 체계가 무의미한 역설의 세계는 “인생은 게임이고 게임이 곧 인생이다(「꽃의 피, 피의 꽃」)”, “춤판은 인생의 축소판이고, 인생은 춤판과 같다.(「소설 쓰는 인간」)”와 같은 수많은 체념의 유사명제를 가능케 한다.
이 허무와의 조우는 다시 한 번 “왜”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허무와의 대면은 죽음 이후의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나 맛볼 수 있는 존재론적 인식 너머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독된 자들은 중독의 깊이로 인해 범인들이 죽음의 경계에 임해서야 보게 될 허무의 구멍을 만나게 된다. 오히려 허무와의 직면은 폐쇄적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세계 속으로 주체가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실존적 열망을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성석제가 그려내는 통속의 세계, “똥”과 “오줌”으로 채워진 “구멍”의 세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하위 영역의 가능성이 된다. 마치 황만근이 “인분”을 모아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거름”을 만들고(「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냄새나는 수챗물 옆, 아이들이 누런 똥을 뻐득뻐득 싸대는 더러운 곳에 사는 조동관이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지독한 반복과 권태에서 구원하듯이 중독을 통해 허무를 맛본 자들은 허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다. 남가이가 “동네 사람들의 똥을 받아먹”은 엄마와 “쓰레기”같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천하제일의 미남”이 되듯이 현실의 황막함을 허무로 인식한 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되돌아온다. 이에 조동관이 퍼부어 대던 “○물에 튀겨서 ○물에 식혔다가 ○물을 채워서 ○순대 만들어 먹을 놈들아”와 같은 욕설에서 구멍은 무이자 한편 다양한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즉, 그 비어있음으로 인해 팔푼이로 소외되었던 “황만근”이나 “남가이”, “곽영출”과 같은 인물들은 성석제의 소설에서 그 빈 공간으로 인해 오히려 가능성 있는 인간으로 갱신된다. 반복과 허공, 그리고 배설은 존재를 무한한 가능성의 구멍, 개방된 빈 무대로 전복된다.
4. 허구의 힘, 인간의 힘
거름이 되어 생명을 움트게 하는 똥의 힘, 배설물이 생의 근간이 되는 저항과 전복은 한편 삼류 인생, 통속적 인간을 통해 조형된 성석제 소설의 의의이기도 하다. 성석제에게 있어 소설은 곧 인생에 뚫린 창조적 구멍이며 피의 꽃이자 “중독”의 대상이다. 허무란 곧 뒤따라오는 순간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망각되는 세계를 의미한다. 성석제에게는 이 덧없는 순간의 반복을 멈추게 하고 포착해내는 것이 곧 소설이며 허구이다. 버려지는 똥에서 거름을 얻듯 성석제는 버려지는 시시한 이야기들 속에서 소설이라는 창조적 세계를 창조해낸다. 인생을 견디게끔 하는 소설, 거짓말, 허구의 가능성은「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미학적 현상학과 서사적 혁신으로 구체화된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시간이 아닌 생각에 의해 흐르고 진행되는 새로운 서사공간을 조형해냄으로써 서사가 시간의 흐름을 조율하는 역전의 세계를 선보인다. 소설은 잔인무도한 시골 칼잡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추락하는 4.5초의 절대적 시간의 선상에서 진행된다. 성석제는 4.5초라는 절대적 시간의 간격을 무수히 쪼갬으로써 죽음까지의 숙명적 시간을 상대적으로 늘리는 혁신을 선보인다. 그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이야기로 윤색함으로써 소멸로 가는 일로(一路)에 수많은 구멍과 우회로를 만들어 나간다. 무한히 쪼개진 성석제의 4.5초는 서사의 주인공인 깡패가 살아온 일생의 시간 즉 기억에 의해 채워지고, 조율되고, 연장된다. 그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우여곡절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그의 행동과 행위가 다양하고 지난할수록 기억은 확장되고, 따라서 4.5초의 상대적 시간 역시 늘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성석제가 보여준 4.5초에 대한 무수한 분절은 “생”을 수평적으로 연장하고 죽음을 모면하는 죽음의 연기술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시간을 수직적으로 재편하는 기억의 연금술에 가깝다. 기억과 함께 생은 시작되고 이야기는 기억의 끝에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생도 함께 끝난다.
허구의 힘으로 조율 가능한 세계의 상대성이란 소설, 허구가 삶과 죽음, 현실과 초월, 세속과 신성성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소설을 통해 삶의 경계 너머 절대적 원본으로 존재하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안전하게 인생을 연습한다. 평론가 정과리가 “홀림”을 통해 섬세하게 분석한 ‘분신 만들기’ 혹은 “오입까기”의 의미는 바로 허구를 간접적 성숙의 행위로 보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불행히도 실제의 행위와 행동은 실제의 목숨과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소설이라는 간접성의 세계 덕분에 목숨을 잃고 나서야 닿게 되는 일정한 경지를 안전하게 맛볼 수 있게 된다. 홀림은 “오입을 깐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오입까기”는 곧 생의 시간을 조작하는 이야기의 위대함이며 여기서 이야기란 고달픈 인생의 복잡성을 위안하는 일종의 “엔돌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순정한 짜가”, “허무”가 있기에, 즉 허구와 거짓말이 있기에 인생은 살만한 것이 된다. 이치도의 평생 목표였던 “태자관”이 순정한 “짜가”였던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순정」). 그런 의미에서, 성석제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힘”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일상의 반복과 패배의 운명을 겁내지 않고 끝없이 행동하고 실천하는, 무모한 도전을 반복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제 발로 심양의 적굴로 끌려간 것만으로도 그는 조선의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실행 이상의 실행을 했다. 죽음을 각오했고,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절의를 충분히 보였다. 배움이 아닌 독실한 실행으로 스스로와 세상을 환하게 깨닫고 난 뒤, 자신이 정한 방식에 따라 스스로를 남김없이 불태울 줄 아는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을 그는 보여준 것이다.(『인간의 힘』)
『인간의 힘』의 채동구는 자신이 왜 거듭 출도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양광한 놈”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네 번이나 출도를 감행한다. 역사가들이나 정치가들에게는 완전히 잊혀지거나 거론의 대상이 될 법하지 않은 채동구의 무모한 열정은 “인간적 차원”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무릇 실존의 힘이란 바로 가능성의 영역에서 판단되어지기 때문이다. 사유나 내면이 아닌 행동이야말로 기억과 개인사를 차지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삶은 그의 화려한 행위와 행동의 축적된 양만큼 늘어나고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의 삶 또한 길어진다. 채동구는, 놀이나 도박, 내기에 빠진 인물들처럼, 내면이나 고백이 아닌 언행과 행동으로 인생을 채워나간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인간이다. 작가는 이 “미시적이고 아름다운 수많은 단초들”이야말로 “사람다운 어떤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말한다. 채동구의 무모는 곧 성석제가 소설을 통해서 찾으려는, 갈피지어지지 않는 인생의 비의이며 한편으로는 무한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인생의 허무를 견디는 가능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인생은 허공이며 유랑이다. 소설은 이렇듯 정해진 허무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의 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끈질긴 시지푸스들의 우문이자 자기시험의 무대가 된다. 성석제의 소설에서 삶에 대한 의문, 아이러니는 해소가 아닌 더 짙은 의혹으로 확산될 뿐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중독에 빠지고 유랑하는 인간을 통해 세상을 재인식하게 된다. 이 인식은 곧 “아무리 멀리서 봐도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천하제일 남가이」)”을 가진 인간, 세상과 격리된 인간이 아닌 세상과 상통하는, 통속의 인간이 되는 길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