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감자가 엄마 감자에게 “엄마, 나 감자 맞아?”라고 물었습니다. 엄마 감자는 “당근이지!”라고 대답했죠. 그 길로 꼬마 감자는 가출했습니다. 엄마 감자가 자기보고 ‘당근’이라고 말하자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출 했다가 돌아온 꼬마 감자가 할머니 감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길로 꼬마 감자는 자기를 오이라고 하는 줄 알고 또 다시 집을 나갔답니다.
웃기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과 사명을 지닌 존재인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책임과 권리를 지닌 존재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삶의 보람보다 자기 만족과 재미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공동체를 위한 유익보다는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찬양 사역자 스캇 브레너가 하나님 예배자란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 성취와 야망에 매달려서 사는 것이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학벌, 인맥, 스펙 같은 작은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으로 생각하며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어떤 조각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귀담아 들어야할 이야기입니다. 형을 속여 장자의 명분을 뺏고,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하란으로 도망친 뒤에 20년동안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자기의 기업으로 말할 수 았는 많은 가축과 하인들을 둔 성공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에는 힘이 잔뜩 담겨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아내들과 자녀들, 짐승의 떼, 하인들”로 짜깁기한 누더기가 자신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얍복강에 이르렀을 때 그는 혼란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가 얻은 모든 것들이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은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고 아무도 그를 구해줄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씨름해주셨습니다. 그 밤을 지새우며 환도뼈가 뒤로 물러나 다리를 절어야 하는 아픔을 견디면서 그는 자신이 남을 속여 복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비로서 깨닫고 되고 본래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나다.”
요나는 불순종의 아이콘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욥바로 가서 배를 타고 배의 가장 밑바닥에 들어가 숨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을 거역한 사람이 요나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요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사기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요나이고,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요나입니다. 정말 간절히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의 비중, 여러분의 말과 행동에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만 잠깐 정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앞으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겠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들이고, 겉으로 비쳐지는 신앙생활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아밋대란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아밋대는 자신의 아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길렀고 하남님께 바쳤습니다. 어려서부터 그에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니느웨는 멸망당해야 한다. 니느웨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나는 반대한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는 선명하게 자기 생각을 고집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봉사를 했어도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크심을 알지 못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안경을 쓰고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다는 사실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해야 맞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는 반대해서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에 모두 아멘하고 그렇게 살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생각대로 선택하고 행동하십니까? 새벽묵상에 계속해서 산상수훈의 이야기가 묵상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을 대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내주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우리가 과연 순종하고 기뻐하고 감사할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마음속에 어느 정도까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을 갖는 사람 모두가 요나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심합니다. “과연 그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까?”그렇게 살수 없는 자신을 회개하는 대신에 그렇게 살아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준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처럼 “너희를 위해 준비된 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거라, 다만 한가지 동산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 열매를 먹으면 너희가 죽는단다.”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하와가 먼저 그 열매를 먹었고 아담도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기준을 파괴한 것입니다. 요나는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정말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이 모르시고 속으시리라고 믿었을까요?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속성, 무소부재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시편139편 1-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분명 요나도 이 시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알고, 행동을 알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앞에서 이 선지자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예신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행동의 의도를 아시고, 내 모든 말과 행동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눈앞에 살면서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 사람처럼 탐욕을 숨기고, 교만을 숨기고, 음란과 모든 더러운 생각들을 숨기고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주장과 자기 만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요나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당부합니다.
나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른 길로 이끌어주셔서 인생이 실패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편한 개입은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 부모는 그 자녀가 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주는 것과 동일합니다. 때로는 꾸중과 회초리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개입은 풍랑으로 배를 위험에 빠지게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불순종은 자신은 편할지 몰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는 위험한 일입니다. 가정을 위기에, 직장을 위기에, 심지어 나라를 위기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큰 위기를 느낀 선장은 요나를 깨우면서 당신의 신에게 기도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래도 풍랑을 잠잠하게 할 수 없어, 결국 이 재앙이 누구때문인지 제비를 뽑았을 때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코로나를 겪으면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요나가 들었던 이 말을 뼈아프게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이 다른 모습을 보이자 세상은 교회에 자녀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사라지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을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가 아이들을 보낼만한 곳이라고 부모들이 생각했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도 밝게 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중성을 버리고 신앙과 생활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비난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야 하는 거룩한 사명자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저술가 트루먼트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불행해질 수 있는 조건은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면 불행해진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 사업가’는 교회에 다니면서 사업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사업을 하면서 성경의 원리를 그 사업에 하나도 반영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기 생각과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경영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 다니면서 사업하는 사람이지 결코 ‘크리스천 사업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 사업가’는 사업의 원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원리를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 직장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 생활의 원리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직장 생활을 하며 교회에 출석하는 크리스천들은 많지만 정작 일터의 현장 속에서 크리스천답게 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기대대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변화되려면 우리의 삶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살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 밑바닥에 숨어 있던 요나처럼 말입니다.
요나의 행동이 과연 그가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동이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실제 행동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거역했습니다.
한국유리의 창업주 최태섭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해방 당시 만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지방 공산당원들이 인민재판을 벌였습니다. 기업체 사장을 비롯해 부자들을 전부 운동장에 모았습니다. 그 밑에 있던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인민재판을 시작했습니다. 현장 분위기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죽여야 한다’고 하면 그냥 처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난 이제 죽었구나.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 드디어 최 장로님이 등단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갑자기 군중이 침묵했습니다. 그때 한 중국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분은 우리 집 형편이 어려울 때 아이들을 학교와 병원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은 살려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람들도 좋은 사람이라고 거들었답니다. 최 장로님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 와서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사업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원들을 돕고 그들이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도록 해주는 게 사업의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입술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요나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말과 행동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