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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세계최초의 우표, 영국에서 발행
← 영국에서 발행된 세계최초의 우표, 페니블랙 원페니(왼쪽)와 펜스블루 투펜스.
1840년 5월 6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표가 영국의 교육자 로랜드 힐에 의해 탄생했다. 우표가 탄생되기 전에도 공식, 비공식으로 우편증지를 사용했지만 그때는 주로 편지를 받는 사람이 우편요금을 부담했고 거리별, 무게별로 요금도 모두 달랐기 때문에 몹시 번거롭고 복잡하여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때 마침 힐이 우편제도 개혁의 실효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각계의 큰 호응을 얻었다. 힐은 거리와 지역에 관계없이 보내는 사람을 부담자로 하며, 24g에 1페니의 기본요금을 정하고, 그 이상 초과분에 대해선 낮은 비율의 실질 배달요금을 계산하는 우편제도 개혁을 제안, 1839년 영국 의회에서 채택된 후 빅토리아 여왕의 서명을 받아 1840년 1월 1일부터 정식 발효됐다.
하지만 최초로 붙이는 식의 우표를 구상해낸 사람은 로랜드 힐이 아닌 스코틀랜드의 한 책방주인이자 인쇄소의 주인이었던 제임스 찰머스였다. 이 제안이 로랜드 힐에 의해 받아들여진 후 우표 디자인을 고심하던 힐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 기념 메달을 소재로 디자인해 이날 1페니 짜리 흑색 우표가 발행됐다. 이것이 바로 세계최초의 우표 ‘페니블랙 원페니(One Penny)’이다. 이틀 후인 5월 8일에는 2펜스 짜리 우표 ‘펜스블루 투펜스(Two Pence)’가 발행됐다. 이는 우표의 색깔이 흑색과 청색이어서 붙여진 이름들이었다.
최초로 우표를 탄생시킨 힐은 1846년부터 1864년까지 영국의 우편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수행하며 근대우편제도를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해 후에 기사작위까지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는 또한 새로운 우편제도의 실시에 따른 우편업무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우편함이 설치되도록 했다.
이 우편제도는 1843년 스위스와 브라질에 도입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세계 최초의 우표가 탄생된 지 44년 후인 1884년 11월 18일 홍영식 선생에 의해 5문과 10문(문(文):당시 화폐단위) 2종의 우표가 발행됐다./조선
[1963년] 아동 문학가 강소천 선생 별세
← 아동문학에 한 획을 그은 강소천 선생
수많은 동요와 동화를 창작하고, 아동문학 진흥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등 일생을 어린이를 위해 바친 강소천 선생이 1963년 5월 6일 별세했다. 함남 고원군에서 태어난 선생의 본명은 용률. 소천은 필명이다.
선생은 24세 되던 1939년, 동화 ‘돌멩이’로 본격적인 아동문학가로 나서 조선일보와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 등에 동화를 게재했다. 광복 후 고원중-청진여중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아동문학 활성화에 애쓰던 선생은 6.25가 터지자 월남, 문교부 편수국에서 교과서를 만들면서 아동 교육에도 관심을 두었다. 1957년 어린이 날, 선생이 기초해 아동문학가협회 이름으로 발표한 어린이헌장은 어린이 사랑운동의 결실이었다. 선생은 1959년 이후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아동문학 강좌를 맡아 어린이 신문발간 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동요 시집 ‘호박꽃 초롱’,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 ‘꿈을 찍는 사진관’, ‘인형의 꿈’ 등이 있다.
1965년 선생이 한국의 아동문학에 남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천아동문학상이 제정되었고 이후 제6회 시상 뒤부터 강소천 아동문학상 운영위원회가 발족돼 연간 발표된 작품 중 우수작을 선정,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 시상했다. 1972년부터 선생의 기일(忌日)인 5월 6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1953년] 기번, 인공심폐장치 시술 성공
1953년 5월 6일 미국의 외과의사 존 H. 기번이 인간의 수술에 처음 인공심폐장치를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1868년부터 심장수술을 하는 동안 환자의 혈액 순환을 유지시켜 주는 인공심폐장치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왔다. 뇌·신경조직·간·신장·부신 등 혈액을 많이 요구하는 곳에 전혈(全血)의 혈세포나 혈장의 손상 없이 심장의 펌프 작용을 대신할 수 있는 장치가 계속 개발되었고, 1970년대에는 의학적인 결점을 대부분 극복한 합성물질이 개발되었다. 로버트 K. 재빅이 고안한 인공심장의 장치 중 하나를 1982년 윌리엄 C. 드브리스가 환자에게 이식했다. 아직 원래의 심장만큼 기능하는 영구인공심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재의 인공심장은 적당한 인간심장을 이식할 때까지 일시적인 대체물로서 사용하고 있다.
[1856년] 프로이트(Sigmund Freud) 출생
1856년 5월 6일 태어남 / 1938년 7월 23일 죽음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빈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부터 신경학에 강한 흥미를 느꼈던 그는, 빈 종합병원에 근무하면서 점차 정신의학과 신경병리학에 몰두하게 되었다. 1885년에는 파리의 신경학자 장 샤르코 밑에서 공부했는데, 신경증 환자들을 최면요법으로 치료하는 샤르코의 방법은 그의 관심을 정신병리학으로 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정신과 개인병원을 개업하는 한편, 의사인 요제프 브로이어와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1895년 브로이어와 공저로 <히스테리 연구 Studien über Hysterie>를 발표해 신경증 증상들이 성적 욕망과 그에 대한 방어 사이의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1899년 <꿈의 해석 Die Traumdeutung>에서 꿈은 무의식적 갈등의 표현이며, 따라서 꿈의 분석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갈등을 이해하고 해소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개진했다. 인간활동의 근본 에너지를 성적 욕망에서 찾고 인간의 심리적 발달을 성욕의 단계적 성숙에 근거해 설명하는 본능이론은 적지않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1900년대초부터 그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연구 영역을 예술·인류학·사회학·종교·문명 등으로 넓혀갔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920년] 법학자 김증한(金曾漢) 출생
1920. 5. 6 충남 부여~1988. 10. 7 서울.
1937년 평양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를 졸업하고, 193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법대 전임강사를 역임했으며, 1951년 무성무공화랑훈장(無星武功花郞勳章)을 수상했고, 1953년 미국 튤레인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60년 녹조소성훈장(綠條素星勳章)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5월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 12월에는 특별재판소 심판관에 임명되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 법제사법위원회(法制司法委員會) 자문위원, 1962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장, 1963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같은 해 12월 홍조소성훈장(紅條素星勳章)을 받았다. 1976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문교부차관을 역임했으며, 1972년 서울대학교 법대 학장, 한국민사법학회 회장, 1972년 법제처 법령정리위원회(法令整理委員會) 위원, 대한법률구조협회(大韓法律救助協會) 이사 등을 지냈다. 1975년 서울제일변호사회 제7회 법률문화상을 수상했고, 1976년 한독(韓獨) 법률학회 회장, 1985년 정년퇴직 후 동아대학교 법대 학장, 1987년 동(同) 대학 부총장을 역임했다. 〈물권적 기대권〉·〈소멸시효론〉 등 130여 편의 논문과 〈법학통론〉·〈민법총칙〉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1911년] 원예학자 유달영(柳達永) 출생
1911. 5. 6 경기 이천~.
1936년 수원농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원예학을 공부했다. 1972년 건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76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79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학회 및 사회활동으로는 1964년 재건국민운동본부중앙회 회장 및 고문, 1967년 가족계획협회장, 1975년 한국원예학회장,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5~91년 한국적십자봉사회중앙협의회장, 산업 카운슬러 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2년 현재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 유기자연농업연구회장·인간교육원회장·한국무궁화연구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등근무공로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덴마크 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유달영인생논집〉·〈협동과 복지사회〉·〈자연과 사랑과 인생〉·〈나라꽃 무궁화〉 등이 있다.
[1893년] 한학자 정인보(鄭寅普, 담원) 출생
시조시인·한학자·교육자·언론인.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국사학·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본관은 동래(東萊). 아명은 경시(景施). 휘는 인보(寅普).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수파(守坡)·담원(薝園).
생애와 활동
조선 말기 영의정을 지낸 원용(元容)의 4대손으로 아버지 은조(誾朝)와 어머니 달성서씨(達成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5년 성계숙과 결혼하고 대한제국 말기의 양명학자인 이건방의 문하에서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했다. 1910년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등지를 왕래하면서 홍명희·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규식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3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공부하다가 부인 성씨의 부음(訃音)을 듣고 귀국한 뒤, 1922년부터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했다. 〈시대일보〉·〈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동아일보〉에 연재한 〈5천년간 조선의 얼〉에서 조선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조선역사는 곧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국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국학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1946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를 펴냈으며,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고자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고,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양명학연론 陽明學演論〉(1972)을 펴냈다. 8·15해방 후 우익 진영의 문인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국학대학 학장, 1948년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묘향산 근처에서 죽었다고 한다.
조선사연구(1946. 9), 정인보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한 저술 →
문학세계
일찍이 문학에 전념한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조 〈가신 님〉(동광, 1927. 1)·〈자모사 子母思〉(한빛, 1928. 3) 등에 노래했고,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조부흥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때 발표한 시조는 해방 후 시조집 〈담원시조〉(1948)에 묶어 간행했다. 1930년대에는 순수시 운동에 앞장섰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했으나 작품은 발표하지 않고 주로 중국의 한시를 번역했다. 〈담원시조〉에 실려 있는 시조들은 주정적·내향적인 특징을 지니며, 토속어를 개발하고 옛말을 새롭게 풀어씀으로써 고유의 멋과 정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현대시조의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시조문학의 문학적 가치를 새롭게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입드는데/가신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살뜰히 기르신 아희 옷품준 줄 아소서"로 시작되는 대표시 〈자모사〉에서 '입드는데'의 '드'(떨어지는데), '살뜰히'(정성이나 恩愛가 肌肉 속에 사무치도록), '옷품'(胸背의 圍度) 등은 옛말을 풍부하게 살려 고상한 분위기를 만드는 시어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님'은 자신의 '어머니'만을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한용운의 '님'과 같이 '잃어버린 조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주의기사 영송신곡 晉州義妓詞迎送神曲〉 가운데 "예(禮)맞고 문 닫으니 물너머는 산들이라/이 강산 못잊기야 죽어 살아 다르리까/돗단 배 어이 섯는고 님이신듯 하여라"에서의 '님'은 논개의 지조와 애국정신을 통해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염원과 뜨거운 민족애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다듬는 것이나 격조의 변화에는 관심없이 회고적 취향에서 오는 고어를 남용함으로써 재래의 시조작풍만을 고집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저서로 〈조선사연구〉(1946)·〈담원시조〉(1948)·〈담원국학산고〉(1955)·〈담원록〉(1967) 등이 있고, 1983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담원정인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1996년] 전 합참의장 한신(韓信) 씨 별세
1922 함남 영흥~1996. 5. 6 서울.
군인·관료.
청렴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한평생 군 발전에 헌신해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온 참 군인의 표상이었다.
한신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6년 12월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임관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7사단 9연대장으로 포천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1950년 8월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 낙동강 교두보 확보를 위한 경상북도 안강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북진의 발판이 된 이때의 전공으로 군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던 낙동강 방어 전투에서 침착한 부대 지휘로 승리를 거두어, 방어에는 한신을 당할 인물이 없다는 평을 듣는 등 6·25전쟁 동안 야전지휘관으로서 용맹을 떨쳤다.
5·16군사정변 당시 모의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의 권유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의원을 맡았다. 이 후 군정 기간에 내무부장관과 감사원장을 지냈고, 1964년 군에 복귀해 군단장·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67년에는 전전선에 대전차방벽 설치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수도사단장·훈련소장·6군단장·전투병과 사령관 등으로 재임했을 때 각 부대별로 간부교육대를 만들고 혹독한 교육훈련을 시켜, '한신대학'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군부대의 부패가 만연하던 시절 철저한 부대급식관리로 한신 장군의 부대에서는 배를 곯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청렴결백했다. 합동참모회의 의장을 끝으로 1975년 대장으로 예편한 뒤 1976년 아세아자동차 회장, 1977~85년 대한중석사장 등을 지냈다. 태극무공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회고록 〈신념의 삶 속에서〉가 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여의도서 우리나라 천주교 순교자 103명 성인으로 시성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
1984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뒤 그렇게 한국말로 인사를 보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논어에서 인용한 이 말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과 한국민을 벗으로 생각하며 사랑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교황의 기도 목록에서는 늘 ‘한반도’가 빠지지 않았다. 교황으로는 처음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4년 전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광주에서 미사를 집전해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교황은 한국인 순교자 103명을 성인(聖人)으로 시성하며 “여러분의 감탄할만한 선조들”을 치하하며 “너그럽고 굳세고 참되라”고 뜻깊은 말씀을 던졌다. 1989년에는 서울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에 참석, 북한 주민과 신자들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며 평화를 기원해서 또 한 번 세계의 관심을 한반도로 모았다.
1984년 5월 교황은 김포공항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며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을 되뇌며 한국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시했다. 김대건 신부 등 한국인 순교자 103명을 성인(聖人)으로 시성한 이 방한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 두 가지 파격을 베풀었다. 시성식은 교황청에서만 이뤄지던 전례를 깨고 직접 한국을 방문해 시성식을 가진 점과, 순교자들의 ‘기적 심사’를 면제해 준 것이다.
교황은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여러분 마음과 영혼에 아픔을 주는 깊은 상처가 극복되기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바로 그렇기에 여러분에게 화해의 은혜가 내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주를 거쳐 소록도를 방문, 한센병 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통해 국내외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북한 관심도 남달랐다. ‘북녘 형제와의 연대’를 강조해온 그는 1995년 북한에 식량 부족사태가 발생하자 교황청 국무원 외무부 대표단을 북한에 직접 파견해 구호식량과 의약품, 의료장비를 전달하도록 함으로써 국내외에 북한 식량·인권상황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과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방북 건의’와 본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북한 방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전 세계 130여개국을 방문하며 타종교 지도자, 공산정권 지도자들과 만났던 교황이 방문하지 못한 나라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극소수 국가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임 중 고 박석희 주교(전 안동교구장) 등 모두 22명의 한국인 주교를 임명하였다.
[2007년] 여성 작곡가 김순애씨 별세
← 여성 작곡가 김순애씨
박목월의 시(詩)에 곡을 붙인 ‘4월의 노래’를 비롯해 ‘네잎 클로버’‘그대 있음에’ 등의 가곡을 남긴 여성 작곡가 김순애(金順愛·88)씨가 5월 6일 밤(한국 시각)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1941년 이화여전과 1957년 미국 이스트만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30여편의 성악곡, 바이올린 소나타, 교향곡 등을 작곡하며 왕성하게 활동해 ‘한국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 평가된다.
이화여대 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조선
[1952] 이탈리아의 교육자 몬테소리 사망
← 마리아 몬테소리
1952년 5월 6일 이탈리아의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가 82세로 작고했다. 몬테소리는 안코나에서 태어나 로마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 부속병원의 정신과 조수로 직업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자 의대생이었고, 최초의 여성 의사였다. 19세기 말까지도 이탈리아의 의과대학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던 터라, 몬테소리는 왕과 교황에게 탄원한 끝에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아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몬테소리는 다시 로마대학에서 심리학 및 교육학을 전공한 뒤 1907년 3세∼6세까지의 노동자 자녀를 위한 유치원인 `어린이의 집`을 열어 몬테소리법에 의한 교육을 실시했다. 몬테소리는 어린이의 권리를 존중하고 어린이가 스스로 자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상태에서의 자유로운 교육을 강조했고, 특히 어린이의 독립심과 지적발달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환경이 필요하다고 보고 감각교육에 치중한 구체적인 교구를 연구하고 개발했다.
1913년에 정식으로 국제 몬테소리 교원양성 코스가 창설됐고 1929년에는 국제몬테소리협회가 독일 베를린에 설립됐다./조선
[1965년] 서민들의 질박한 삶 그린 화가 박수근 사망
← 한국 현대 회화사의 전설 박수근(1914~1965) 화백.
새벽에 일어나 이불 개고 청소한다. 오전부터 시작한 작업을 오후 서너시쯤 얼추 끝내고 아내 일을 돕는다. 하루 서너마디뿐, 말도 없다. 오후 늦게나 돼서야 발걸음을 시내로 돌려 전시회 등을 돌아보고 동료 화가들과 대폿집에서 한잔하면 어느덧 늦은 밤이다. 비라도 내리는 날 과일을 사러 나가면 가족들은 답답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팔아주기 위해 이집저집을 드나들다보니 늦었단다. 아기를 업고 뜨거운 뙤약볕 속을 다니는 아내가 측은해 양산을 훔친 적도 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아내로부터 핀잔을 들으며 돌려주긴 했지만…. 평생을 궁핍 속에서 살면서도 정직하고 우직하게 그림만을 그려온 박수근의 하루다.
한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박수근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을 뿐 천재들에게서 흔히 목격되는 정열과 광기,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박한 소시민이었고 보통사람이었으며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림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질박한 삶이 묻어 나온다.
가난과 전란 속에서 춘천, 평양 그리고 서울의 창신동을 떠돌며 때로는 도청 서기로, 때로는 미군부대 초상화가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언제나 꿈을 잃지 않았고 화필을 놓지 않았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 1965년 5월 6일 그가 숨지면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조선
[2002년] 최경주, 한국인 첫 PGA 제패 - PGA 컴팩클래식 우승
← 한국인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미국 PGA투어 챔피언에 오른 최경주선수.
최경주 선수가 컴팩클래식대회에서 우승함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PGA투어 챔피언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최경주는 2002년 5월6일(한국시각) 뉴올리언스의 잉글리시턴골프클럽에서 끝난 대회 최종 라운드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 4라운드 합계 17언더파 271타로 우승, 상금 81만달러를 차지했다. 최경주에 앞서 동양인으로는 일본의 아오키 이사오(1983년)와 마루야마 시게키(2001년), 대만의 첸지충(1987년)이 PGA투어에서 우승한 바 있다.
1970년(실제로는 1968년) 전남 완도에서 출생한 최경주는 화흥초등학교 시절부터 역도 선수를 하다가 완도수산고 1학년 때 생긴 골프부에 뽑혀 난생 처음 골프라는 운동을 접했다. 완도의 한 연습장에서 볼을 치던 그를 눈여겨본 서울 한서고 재단이사장 김재천씨가 다시 한서고 골프부에 스카우트했고, 거기서 골프에 본격 입문했다. 1993년 프로테스트를 단번에 통과, 직업 골퍼의 세계에 뛰어든 최경주는 1995년 팬텀오픈에서 첫승을 거머쥐며 상금랭킹 7위에 오른 데 이어 1996, 1997년에 2년연속 상금 1위에 올라 국내에선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9년까지 국내에서 7승을 거둔 뒤 일본에 진출, `꿈의 무대`라는 미국PGA투어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혔다. 1999년 말 가족을 데리고 플로리다주 잭슨빌로 이주한 최경주는 2000년 1월 소니오픈에 턱걸이로 참가했다. 결과는 컷오프. 투어 카드만 있으면 될 줄 알았던 미국PGA투어 벽은 높았다. 에어캐나다챔피언십에서는 톱10(공동8위)도 한번 경험했지만 그해 상금액 30만5745달러(랭킹 134위)로는 2001년 출전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뚝심의 최경주는 좌절하지 않았다. 두 번 가기 싫다는 `지옥` 같은 Q스쿨을 또 거쳤다. 2년차의 여유를 찾은 그는 2001년 29개 대회에 참가, 19개 대회에서 상금을 받았고 톱10에 다섯 차례 들었다. 80만326달러로 상금랭킹 65위. 2002년 출전권은 자동 확보됐고 출전대회의 격도 달라졌다. 미국그린에 적응이 빨라지면서 그의 성적도 일취월장했다.
2002 시즌 들어 첫 대회인 소니오픈에서 공동7위로 톱10을 장식한 최경주는 마침내 컴팩클래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0년 계획이라지만 내심 5년을 바라보고 있던 그로서는 최소 2년은 앞당긴 우승이다. 1m72의 크지 않은 키이지만 82kg의 탄탄한 체구에 역도로 단련된 강한 다리힘과 어깨 근육을 바탕으로 외국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스윙을 갖췄다./조선
[1994년] 영국-프랑스간 해저터널 개통
← 해저터널이 관통하는 순간 영국과 프랑스 기술자들이 국기를 교환하고 있다.
1994년 5월 6일 영-불간 도버해협을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이용한 특급 열차 `유로 스타`가 개통했다. 부슬비 뿌리는 워털루 역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함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쏜살같이 달린 `유로 스타`는 시속 300㎞로 3시간 만에 런던과 파리를 이었다.
영국 신문은 이날 "말고기를 먹는 나라와 육지로 연결됐다"고 썼다. "나치에 협력한 땅과 이어졌다"고 쓴 곳도 있었다. 프랑스라고 가시돋힌 반응이 없을리 없었다. 언론의 독설을 즐거운 배경 음악으로 깔고 이날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명실상부하게 연결됐다.
금세기 최대의 토목공사인 이 해저터널은 세계 첨단기술이 총동원된 기술혁신의 상징이자 지금까지 항공편이나 배편으로만 건널수 있던 도버해협을 사상 처음으로 육로로 연결한 것이었다.
영-불해저터널은 지난 1986년 미테랑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가 서명한 건설협정에 따라 총공사비 1백50억달러(약 12조원)를 투입, 약 7년 만에 완공한 것으로, 도버해협의 최단거리인 프랑스 칼레와 영국 폭스톤 사이의 해저 약 50㎞를 3개의 지하터널로 연결하고 있다.
철도전용의 이 해저터널은 영-불합작 그룹인 유로터널사가 오는 2052년까지 운영하며 르셔틀 이라고 불리는 관광객 및 화물용 왕복열차와 파리~런던과 런던~브뤼셀 노선을 왕래하는 초고속열차 유로스타가 운행된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지금까지 배편으로 최소한 2시간 걸리던 것이 35분으로 단축되었고, 유로스타는 파리~런던을 3시간에 런던~브뤼셀을 3시간15분에 주파할 수 있게 됐다./조선
그밖에
2005년 간호사들의 ‘신생아 학대’ 사진 논란
2004년 한국산 토종늑대 30년 만에 재탄생
2003년 미국 싱가포르와 아시아 국가 최초로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2001년 이형택 선수,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ATP (세계남자프로테니스선수협회) 공식 투어 결승 진출
2000년 아일랜드공화군 무기사찰 수용
1999년 인류최고(最古)로 추정되는 ‘돌 연장’ 케냐서 발견 후 공개
1999년 임진각에 21톤 ‘평화의 종’ 건립
1999년 이승엽, 최연소 100호 홈런 달성
1997년 광주시 5.18묘역 유골서 탄두 발견
1997년 교육부, 1998년부터 교원 차등보수제 도입
1996년 호주, 사상 첫 원주민 판사(보브 벨레어) 탄생.
1996년 콜비 전 미국 CIA국장, 실종 9일만에 시체로 발견-CNN방송.
1991년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훈련차 서울에 도착
1990년 러시아 공화국, 사회민주당 창당
1987년 중국 서북부 산림 대화재, 사망 193명 피해면적 1만1000km2
1987년 제9차 한국.미국 안보회의 워싱턴서 개막
1986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민주화위한 시국성명서 발표.
1985년 5월 6일이던 성년의 날을 5월 3째주 월요일로 변경
1985년 도시가스 연쇄폭발사고 발생
1983년 호남고속도로 대전∼광주 4차선 확장 기공식.
1981년 한국 아르헨티나 무역해운협정 체결
1981년 공정거래위원회 발족
1981년 미국, 국제테러행위 지원혐의로 미국주재 리비아외교관에 추방령
1977년 서울대, 여주군에서 석기시대 농경기구 발견
1976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서 해방후 최초 남북대결. 1 : 0으로 패배
1975년 성년의날 5월 6일로 변경
1974년 정부 정부미 혼합곡으로만 방출한다고 발표
1974년 브란트 서독 수상 보좌관의 스파이사건으로 인책 사퇴
1971년 유진산 신민당수 지역구 출마 포기, 전국구1번 등록. 당내반발 유발 (진산파문)
1969년 경제기획원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지침 발표
1968년 프랑스 사상 최대의 학생 데모
1965년 신아일보 창간
1955년 서독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1952년 서울-부산간 민간전화 개통
1952년 장택상, 제3대 국무총리 취임
1950년 여성 저널리스트 아그네스 스메들리 사망
1949년 변호사 시험령 제정
1948년 김구-김규식, 남북협상에 대한 공동성명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무기휴회
1941년 스탈린 소련 수상에 취임
1937년 독일 호화 비행선 ‘힌덴부르크’ 미국 상공서 폭발
1932년 프랑스 대통령 두메르 암살
1921년 독일-소련 통상조약 조인
191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경기장인 YMCA실내경기장 신축
1910년 영국 에드워드 7세 사망, 조지 5세 즉위
1906년 러시아 헌법 공포
1904년 독일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 사망
1856년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출생
1758년 프랑스 혁명가 로베스피에르 출생
1618년 조선조의 무신 강항 사망
973년 신성로마황제(1002~1024) 하인리히 2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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