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그의 아들은 여호수아더라
본문 역대상 7장 20-29절
찬송 430장
지금은 족보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저만치 밀려났지만 얼마 전만 해도 족보는 모든 집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다루는 물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족보를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했을까요? 그가 어떤 집안에 속해 있는지 기억하고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처음에야 족보가 없어도 그의 조상들이 누구며 그의 형제자매들이 누군지 다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모든 것들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염려한 사람들은 족보를 만들었고 그것을 자자손손 전해주어 후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그가 속한 집안에 크게 자랑할 만한 조상들이 있으면 더 좋았습니다. 족보를 꺼내 보며 후손들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까요. 지금도 제 귀에는 어렸을 때 아버님 무릎 앞에 앉아 들었던 제 조상들의 이야기, 항상 본받고 싶었던 그 자랑스러운 이야기들이 쟁쟁합니다.
역대기상은 이스라엘의 각 가문에 대한 족보이야기를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무익한 것처럼 보이는 족보이야기를 길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처럼 그들이 어떤 가문에 속하여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얼마나 위대한 조상들인지 잊어버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족보를 남겼고 그 족보이야기가 성경에 들어와 오늘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족보를 통해 자랑하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한 분 삼위일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자기와 자기 집안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속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보존하여 자랑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이 소원을 따라 그들은 족보를 기록하였고 후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보다 더 자랑할 만한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시라는 사실보다 더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내 속에 없습니다. 이 사실보다 더 크게 우리가 자랑할 만한 다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의 후손들이 자랑하는 것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신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에브라임 가문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다른 어떤 가문보다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집안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 요셉은 너무나 뛰어나고 훌륭하여 그 형제들 가운데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그 요셉의 아들들 가운데서 또 다시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브라임은 온 이스라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 가운데 장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에브라임과 그 후손들은 얼마나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까? 에브라임과 그 후손들이 받은 복을 성경은 에브라임의 할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창48:20)
이렇게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신 복 때문에 복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위해 복을 빌고자 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에브라임 같기를 바라노라. 에브라임과 그 후손들이 얼마나 큰 복을 받았으면 사람들이 속담처럼 이렇게 말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들도 이 땅에서 이와 같이 되기를 사모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님 때문에 이미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사람들인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를 함부로 대하고 멸시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주님의 영광과 권능의 우편에 앉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칠 것입니다. 나도 너와 같기를 원하노라.
이 복된 믿음을 따라 로마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 왕과 수많은 고위 관리들과 왕족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인생입니까? 이 고백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의 입에 항상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26:29)
그런데 역대상에 기록된 에브라임과 그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과 조금 다릅니다. 창세기를 통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과는 달리 에브라임의 후손들은 가드 사람들에 의해 크게 살육을 당했습니다. 이 일은 에브라임에게 너무너무 큰 슬픔이고 아픔이었습니다. 그때 에브라임이 당한 슬픔과 아픔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은 사밧이요 그의 아들은 수델라며 그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으나 그들이 가드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그의 아버지 에브라임이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의 형제가 가서 위로하였더라(대상7:21-22)
하지만 아무리 형제들이 찾아가서 위로해도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에브라임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자식들을 잃은 슬픔과 아픔이 어떻게 말 몇 마디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에브라임이 겪은 절망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일로 말미암아 에브라임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끊어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에브라임에게 이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은 없었습니다. 자식이나 재물을 잃었으면 다시 얻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집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소망의 빛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내를 통해 아들을 얻었을 때 그 이름을 브리아라고 하였습니다. 브리아라는 이름의 뜻은 내가 재앙 가운데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에브라임은 그가 만난 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도 무효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기는 재앙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였고 형제들이 와서 위로하여도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에브라임과 그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가 되었고 그 결과 에브라임과 그 후손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돌아보니 에브라임의 할아버지 야곱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37:35)
야곱에게 요셉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이 있는 아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구원을 위해 특별하게 쓰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야곱과 그 집안의 꿈이고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은 야곱에게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절망하였던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진리를 따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11:33-34)
다시 에브라임의 족보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지금까지 나눈 말씀이 여기 이렇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들은 눈이요 그의 아들은 여호수아더라(대상7:27)
여기 여호수아가 누굽니까? 모세의 뒤를 이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 위대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이 땅에서 만난 잠깐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처럼 보였던 에브라임 가문, 그래서 스스로 재앙 가운데 있다고 했던 에브라임 가문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에브라임 가문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수아를 세상에 오게 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에브라임과 그 후손들이 여호수아를 세상에 오게 하는 통로였다면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게 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아멘입니다. 에브라임 가문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선물하는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큰 일을 누가 이루셨습니까? 천지의 대주재이신 한 분 삼위일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에브라임 가문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이 일보다 더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족보 이야기를 통해 이 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문을 통해 이렇게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가문은 이런 가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때로 우리는 우리와 우리 가정이 처한 현실을 보며 절망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꿈과 소원을 다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에 빠져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재앙 가운데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생각하십시오. 또 그 약속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와 우리 후손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얼마나 위대하고 강합니까?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들며 왕께 찬앙해!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에브라임 가문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일으키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 교회와 가정에서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기를 사모합시다.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여 쓰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을 향해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후손은 반드시 우리 몸을 통해서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낳는 영적 자녀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주신 약속대로 부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십시오. 육신으로 낳는 자녀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복음을 통해 낳는 자녀들을 통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십시오. 이 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람에게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복이고, 그러므로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복입니다.
우리 자녀세대를 위한 여름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한 아이를 사랑으로 품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내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세대를 통해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품고 함께 섬기며 나아가는 순천새중앙교회 위에 영광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