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온다. 애니메이션의 계절이다. 해마다 관객들을 환상과 모험의 세계로 안내해온 애니메이션 명가들이 올해 역시 슬슬 야심찬 극장 입성을 준비하고 있다. 꼬마 소녀의 모험에서부터 빙하기 짐승들의 좌충우돌 여행기까지, 동양과 서양, 2D와 3D를 망라한 다섯 편의 막강 애니메이션. FILM2.0이 그 속을 미리 들춘다.
떠나라, 얼음 나라로!
<아이스 에이지 Ice Age> 2002
감독 크리스 웨지 | 각본 마이클 J. 윌슨 외 | 목소리 출연 레이 로마노, 존 레귀자모, 데니스 리어리 | 수입, 배급 20세기 폭스 코리아 | 시간 81분 | 개봉 8월 9일
누구도 본 적 없는 2만 년 전 빙하시대 지구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아이스 에이지>의 제작을 맡은 ‘블루스카이 스튜디오’팀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감독 크리스 웨지를 비롯한 제작진은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고민을 거듭했다. 물론 빙하시대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다.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시대를 3D로 재현하는 만큼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스 에이지>는 빙하시대 동물들이 외톨이가 된 인간 아이의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야생에 버려진 인간의 아이가 동물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타잔> <늑대인간>에서 익히 봐왔던 것 아닌가. 그러나 마이클 J. 윌슨을 비롯한 시나리오팀은 그 어떤 애니메이션에도 나오지 않았던 매력적인 동물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여기에는 크리스 웨지가 자료 수집 당시 자문을 구했던 인류학자 랜달 화이트의 조언이 한몫을 했다. 화이트 박사는 “빙하시대 3억5천만 년 전에 멸종한 공룡만은 제발 등장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결국 웨지는 맘모스와 나무늘보, 검치 호랑이를 주요 캐릭터로 선정했다.
영화의 배경은 거대한 빙하가 온 지구의 표면을 뒤덮기 시작하던 때. 모든 동물들은 따뜻한 남쪽나라로 이동을 시작하지만, 염세적인 털북숭이 맘모스 만프레드(레이 로마노)만은 유별나게 북쪽으로 향한다. 만프레드는 우연히 떠버리 나무늘보 시드(존 레귀자모)를 만나고, 인간의 아이 로샨을 발견한 뒤 가족을 찾아주기로 한다. 이들은 여행길에 검치 호랑이 디에고(데니스 리어리)와 동행하게 되지만, 디에고는 비밀스런 임무를 맡고 있는 처지다. 바로 호랑이 무리의 두목으로부터 끼니를 때울 만한 인간의 아이를 납치해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과연 로샨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이스 에이지>에는 기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바로 동물들은 모두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반면 인간은 오히려 동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제작진이 처음부터 영화적 재미를 위해 염두에 둔 부분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동물들의 성격에 뚜렷한 개성을 불어넣은 덕분에 영화는 한결 윤택해졌다. 시큰둥해 보이는 만프레드는 따뜻한 심성을 드러내며, 허풍쟁이 시드는 계속 사고를 친다. 용맹스런 디에고는 영화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묵직한 캐릭터다. 이들이 펼치는 모험은 속도감 넘치는 스펙터클로 채워져 있다. 맛깔스런 유머와 황홀한 볼거리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고 있는 셈이다.
<죠의 아파트> <에이리언 4> <파이트 클럽> 등을 작업하면서 입지를 다진 블루스카이 스튜디오는 독창적인 컴퓨터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했다. ‘레이트레이싱(raytracing)’이라 불리는 테크놀로지가 바로 그것. 1999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크리스 웨지의 <버니 Bunny>에도 사용된 이 조명 소프트웨어는 실제의 빛과 그림자를 애니메이션에 표현하는 기술이다. 자연광의 미묘함과 섬세함을 그대로 흉내냄으로써 사진처럼 깨끗한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덕분에 <아이스 에이지>는 주변 배경뿐 아니라 동물들의 털 하나까지도 사실적인 느낌을 갖게 됐다. 이는 <아이스 에이지>의 영상이 <몬스터 주식회사> <슈렉> <토이 스토리> 등 기존의 3D 애니메이션보다 유려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블루스카이 스튜디오는 픽사를 위협하는 막강한 애니메이션 업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한선희 기자
볼까? 쥬라기와 백악기를 뛰노는 공룡들이 식상하다고? 이 환상적인 얼음나라는 전혀 색다른 재미를 안겨줄 것이다.
말까? 너무 익숙한 스토리, 예측 가능한 결말에 기운이 빠질 수도 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千と千尋の神隱し> 2001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 작화 안도 마사시 | 미술 다케시게 요우지 | 음악 히사이시 조 | 수입 대원 C&A 홀딩스 | 배급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 시간 125분 | 개봉 6월 28일
“♬아루코, 아루코, 와타시와 겡키~(걷자, 걷자, 나는 건강해).” 행진곡풍의 경쾌하고도 앙증맞은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이웃집 토토로>의 가슴 벅찬 행복감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면, 당신은 월드컵 16강보다 더 큰 선물을 올 여름에 만날 수 있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만 토토로 할아버지가 지난해 만든 또 한 편의 걸작 애니메이션이 마침내 한국에 상륙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만 2천3백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까지 거머쥐었으니, ‘얼마나 대단하길래’라며 잔뜩 호기심을 곧추세울 분 많겠다. 그 호기심 미리 풀어드릴 수 없어 안타깝지만, 한마디는 대답할 수 있다. 뭐냐고? 이 영화,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선 몇 가지 워밍업이 필요하긴 하다. 우선 제목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니 주인공이 두 명인가,라고 생각할 여지가 많다. 센과 치히로는 동일 인물이다. 신령들의 세계에 빠져든 열 살 소녀 치히로(千尋)가 새 이름을 얻게 되니, 그게 센(千)이다. 사실 치히로에서 끝의 한자 尋을 뺀 千인 것이다. 왜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인공에게 두 개의 이름을 선사했는지는 여기서 다룰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소녀는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왔던 주인공 캐릭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게 관심 포인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가장 최근의 <원령공주>까지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을 관통하고 있는 용기와 의지력의 화신들은 치히로와 관련이 없다. 치히로는 다만 핵가족 시대의 심약한 어린이일 뿐이다. 이사가는 게 못마땅해 부모님에게 잔뜩 심통을 부리는데다 겁도 많다. 그러다가 일하지 않으면 돼지가 돼버리는 신령들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인다. 치히로, 아니 센은 이제부터 신령들의 온천장에서 일을 하며 돼지가 돼버린 부모님을 어떻게 해서든 사람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진가는 사실 여기서부터다.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가 창출해낸 독특한 캐릭터에 덧붙여 기상천외한 캐릭터들의 시끌벅적한 잔치가 정신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토토로가 슬쩍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며, 사츠키와 메이 자매를 놀려대던 꼬마 숯검댕이들이 다시 캐스팅돼 지하 보일러실의 팔 여섯 개 달린 가마 할아범을 도와 석탄을 나른다. 얼굴 크기와 몸이 정비례하는 온천장 주인 ‘유바바’ 할멈과 그의 애지중지하는 거인 아기 ‘보우’, 유바바의 심복들인 돌머리 삼총사, 다른 신령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얼굴 없는 요괴 ‘카오나시’ 등을 보고 있노라면 미야자키의 지칠 줄 모르는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야기 자체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SF 액션 어드벤처의 전형이다. 치히로가 돼지가 된 부모를 구하기 위해 온천장에서 일하다가 온천장의 위기와 갈등까지 해결해낸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어린이다운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일관적인 세계관을 덧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일하지 않으면 돼지가 되는 신령들의 온천장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암시되는 낭만적 사회주의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금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앞세워 다른 신령을 먹어치우는 얼굴 없는 요괴 카오나시는 부도덕한 착취 계급의 은유로 받아들일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런 골치 아픈 해석을 지워내더라도 관객은 충분히 행복하다. 그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던가. 하물며 이 작품은 그가 이룩해온 모든 성과물들이 총망라된 종합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최광희 기자
볼까? 보는 이를 어린이의 감성으로 끌어당기면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무한 행복을 선사하는 마야자키 하야오의 마력은 이 작품에서 훨씬 더 강력하다. 보지 않을 이유? 당연히 없다.
말까? 일본영화와 일본어 대사에 경기를 일으키는 열혈 애국 투사이거나 애니메이션이 유치한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치부하는 사람이라면야….
소년은 울지 않는다. 다만, 발명할 뿐이다.
<지미 뉴트론 Jimmy Neutron: Boy Genius> 2001
감독 존 A. 데이비스 | 각본 존 A. 데이비스, 스티브 오데커크 | 목소리 출연 데비 데리베리, 패트릭 스튜어트, 마틴 쇼트 | 수입, 배급 UIP 코리아 | 시간 82분 | 개봉 6월 6일
발명왕 에디슨은 천재가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천재 소년 지미 아이작 뉴트론에 한해서 말이다. 이 닦고 옷 입고 머리 다듬고 학교에 가는 따위의 귀찮은 일은 모조리 그가 발명한 오만 가지 기계 장치의 몫이다. 외계인과 교신하기 위해 제빵기 메신저를 만드는 엉뚱한 상상을 하거나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통과하려다 집 지붕에 추락해 가산을 축내는 일이 더러 있지만. <지미 뉴트론>은 솔직담백하게 아동 관객층에게 호소하는 영화지만 어른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을 건 없다. 자유의지를 속박하는 부모들이 사라졌을 때 기뻐 날뛰던 아이들이 방종으로 인한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부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대목을 보면 제법 기특한(?) 교훈도 전해주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영화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서 수백억을 들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둬야겠다. 그래야 이 무모한 상상력에 동화될 수 있을 테니. 화려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별천지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지미 뉴트론> 역시 전 공정을 컴퓨터로 처리한 3D 애니메이션이지만 '버추얼 리얼리티'를 화두로 누가 더 실사에 가깝게 갈 것인가를 다투는 최근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테크놀로지 경쟁에서 한 걸음 비껴서 있다. 감독 존 A. 데이비스가 ‘포토 쉬르리얼리즘’이라 칭한 것처럼 제작진의 지상과제는 ‘드라마와 그림을 최대한 만화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TV, 영화를 아우르는 엔터테인먼트 컨텐츠 그룹 니켈로디온의 <지미 뉴트론>은 <러그래츠> 시리즈나 <스폰지밥 스퀘어팬츠> 등의 고색창연한 니켈로디온 영화들처럼 수다스런 큰바위 얼굴 아이들의 예기치 못한 모험을 그린다. 내용만 본다면 <스파이 키드>의 애니메이션 버전이라 할 만하다. 악의 소굴에 붙잡힌 부모를 구출하기 위해 나선 꼬마 특공대들의 활약을 다룬 것도 그러하거니와 007을 방불케 하는 기상천외한 발명 장치들의 즐비한 행렬도 영락없다. 천재 발명 소년 지미를 위시한 지구의 어린이들이 부모를 납치해 괴물의 제단에 바치려는 외계 무리 요키안 일당에 맞서 부모를 구출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못 만드는 것이 없는 발명왕 지미 뉴트론은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소한 발명품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켜 수많은 발명가들에게 영감을 준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를 닮은 캐릭터다. 이 용감무쌍한 꼬마 영웅의 탄생은 어린이 관객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똘망똘망한 지미 뉴트론 못지않은 이 영화의 스타는 지미의 애완견 로봇 ‘고다드’다. 이름마저 의미심장한 이 팔방미인 로봇 개는 저 유명했던 80년대 만화영화 <케산>에 나오는 사이보그 개에 필적하는 충견으로 절체절명의 순간 메시아처럼 구원의 손길을 던진다.
디즈니나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처럼 목소리 연기자 가운데 이름난 스타는 없다. 외계 종족 요키안 제국의 대마왕 '구보왕' 역에 <스타트렉>의 피카드 함장 패트릭 스튜어트, 아첨꾼 앞잡이 '우블라' 역에 코미디언 마틴 쇼트 정도가 알 만한 배우들이다. 첨단 3D 테크놀로지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주무대인 레트로빌 마을의 성냥곽 같은 가옥이나 지미의 엘비스 스타일 머리, 고풍스런 자동차들은 죄다 50년대 복고풍이다. 아이들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를 염두에 둔 애초의 기획대로 손에 잡힐 듯이 고안된 캐릭터들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초록색 달걀 괴물 요키안들조차 앙증맞은 모습이니 선, 악의 쟁투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용감무쌍한 아이들의 승리는 이미 보장된 것이니까.
장병원 기자
볼까? 테크놀로지에 앞선 상상력의 힘. 이런 아들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통방통한 지미 뉴트론의 재주를 보고 있노라면 이 천재 소년의 고성능 로켓과 만능 로봇 애완견이 너무 탐난다.
말까? 노골적인 설교를 하지는 않지만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라. 다 늬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일지니’라는 고리타분한 메시지는, 어째 좀....
슈렉만 인기야? 스피릿도 영웅이야!
<스피릿 Spirit: Stallion of the Cimarron> 2002
감독 로너 쿡, 켈리 애즈버리 | 각본 존 푸스코 | 목소리 출연 맷 데이먼, 제임스 크롬웰 | 수입, 배급 CJ엔터테인먼트 | 시간 75분 | 개봉 7월 5일
<스피릿>의 국내 마케팅을 담당한 CJ엔터테인먼트의 한 관계자는 괜한 걱정을 털어놓는다. “지난해 <슈렉>의 코믹한 캐릭터와 화려한 테크놀로지에 맛들인 관객들이 <스피릿>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요.”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미국 서부시대 야생마의 모험담을 다룬 <스피릿>은 드림웍스의 출세작 <슈렉>과는 다른 길을 가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디즈니의 뿌리 깊은 동화를 전복하려는 당돌함도, 3D 애니메이션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화려한 비주얼도 없다. 게다가 “말(horse)이 말(word)을 하면 코미디가 된다”며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가 고집을 부리는 통에 스피릿은 말조차 하지 않는다. 시네마스코프를 캔버스 삼아 펼쳐놓은 옐로스톤, 브라이스캐니언 등 국립공원의 풍광과 힝힝거리는 소리, 브라이언 애덤스의 노래, 맷 데이먼의 내레이션만으로 의사 표현하는 동물 히어로의 매력 지수가 국내에서는 과연 어떻게 매겨질까? 총천연색 비주얼과 재잘거리는 대사로 여름을 난타할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틈바구니에서 동급 최강의 자리를 꿰차는 것, 그것이 <스피릿>의 최대 과제다.
지난 5월 3일 LA에서 열렸던 첫 시사회에 참석했던 관객 역시 <스피릿>의 진가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릿>은 서부 시대 광야를 질주하던 용감한 야생마 스피릿이 나고 자라는 과정과 모험을 따라가는 애니메이션이다. 스피릿은 말을 못할 뿐 인간들이 하는 건 다 할 줄 안다. 어느 날 스피릿은 백인 기병대에게 다가가다 이들의 포로가 된다. 문명이 자연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기병대장(목소리 제임스 크롬웰)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스피릿에게 재갈을 물리고 군마로 길들이려 한다. 안간힘으로 버티던 스피릿은 포로로 잡혀온 인디언 청년 리틀 크릭(목소리 대니얼 스투디)과 함께 요새를 탈출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암말 레인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물론 더욱 버라이어티한 역경이 호시탐탐 영웅 스피릿을 노리고 있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이런 모험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를 능가하는 스피릿은 급류에 휩쓸리고 화염에 둘러싸이면서도 더욱 살아 있는 액션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제프리 카첸버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트래디지털(Tradigital)’이라는 개념 역시 애니메이션답지 않게 중량감 있는 스펙터클 장면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감독 로너 쿡과 켈리 애즈버리는 언덕으로 굴러 내려오는 기차에 쫓기고 떼를 지어 강을 건너는 등의 장면에서 3D와 2D 기술을 결합한 트래디지털 기술이 효자 노릇을 했다고 자랑했다. 한 프레임 안에서, 스피릿의 눈빛, 발길질, 바람에 날리는 털 등은 2D로 그려 생명감을 살리되 광활한 배경은 3D로 처리한 의도는 일반 관객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모래바람 이는 벌판에 잘 어울릴 법한 웅장한 한스 짐머의 음악과 브라이언 애덤스의 거친 로큰롤이 이 서사극에 고상한 매력을 더한다.
판타지보다는 리얼리티에 가까운 소박한 필체의 <스피릿>은 일견 고루한 도덕주의를 설파한 <이집트 왕자> <엘도라도> 등과 비슷한 모양새지만 이들 전작과는 엄연히 다르다. 기병대장은 스피릿을 놓아주고 인디언 소년은 작은 배신을 저지른다. 적은 영원히 악당이 아니며 우방 역시 영원히 친구가 아니다. “삶은 애매모호한 것”이라는 철학을 담아내려 했다는 카첸버그의 호언장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틀을 고수하며 애니메이션의 관습을 뒤엎으려는 모험 역시 범상해 보이는 <스피릿>에 범상치 않은 의미를 더한다. 이 영화를 보면 브래드 피트, 캐서린 제타 존스, 미셸 파이퍼 등이 목소리 출연하는 드림웍스의 차기작 <신바드>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스피릿>은 <신바드>를 비롯한 미래 2D 애니메이션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윤혜정 기자
볼까? 아이들과 함께 즐기고 싶거나, 한스 짐머와 브라이언 애덤스의 음악을 좋아하거나, 미국 서부시대 모험담을 선호하거나.
말까? <슈렉>의 수다쟁이 동키와 <뮬란>의 떠버리 뮤슈의 열혈 팬은 피해가시길.
<릴로 & 스티치 Lilo & Stitch> 2002
감독 딘 데블로이스, 크리스 샌더스 | 각본 크리스 샌더스 | 목소리 출연 데이비 체이스, 크리스 샌더스, 티아 카레레, 빙 레임스 | 수입, 배급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 시간 미정 | 개봉 7월 19일
매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화려한 뮤지컬과 스펙터클을 앞세웠다면 올해는 좀 다르다. 열정의 땅 하와이로 관객을 초대하되 애니메이션의 ‘기본’에 충실한 볼거리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릴로 & 스티치>의 주인공은 하와이에 사는 외로운 소녀 릴로와 외계에서 온 꼬마 악동 스티치. 활달하고 명랑한 릴로는 자연을 돌보기를 좋아하지만 주변에 친구가 없다. 어느 날 릴로는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한 뒤 ‘스티치’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사랑으로 보살핀다. 하지만 스티치는 원래 유전자 실험 대상으로 만들어진 외계인으로, 은하계 감옥으로 이송 도중 지구에 불시착한 상태다. 은하계 본부에서는 스티치를 체포하려 하고, 스티치는 갖은 꾀를 써서 이를 피하려 한다.
애초 이 영화를 구상한 크리스 샌더스는 공동 연출과 각본, 그리고 목소리 연기(스티치)까지 1인 3역을 도맡았다. 그는 애니메이션계에 처음 뛰어들었던 17년 전부터 스티치와 유사한 캐릭터를 개발했다. 그리고 <뮬란>의 각본을 쓰던 97년 딘 데블로이스와 함께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그들의 목표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자랑하거나 애니메이션의 새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샌더스는 “우리는 디즈니의 뿌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덤보> <밤비> 같은 영화의 단순함과 따뜻함에 주목했으며, 순수함과 노스탤지어를 찾으려 했다”고 말한다. <릴로 & 스티치>는 2D를 기본으로 하되 캐릭터의 개성과 탄탄한 스토리 라인으로 승부를 거는 셈이다. 하와이 원시 문화와 우주 기계 문명의 만남, 선량한 릴로와 장난꾸러기 스티치가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훈훈하고 인간적인 메시지도 담았다.
<릴로 & 스티치>에 흥을 더하는 것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이다. 제작진은 엘비스의 음악이야말로 릴로의 캐릭터와 영화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데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영화에는 ‘Heartbreak Hotel’ ‘Burning Love’ 등 엘비스의 히트곡 6곡이 삽입된다. 음악감독 앨런 실베스트리는 여기에 하와이 민속음악에 바탕을 둔 두 곡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했다. <릴로 & 스티치>는 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그러나 디즈니가 초심으로 돌아가 만든 따뜻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한선희 기자
볼까? 3D 애니메이션의 인공적인 색채에 질렸다고? 밤비가 그립다고? 그렇다면 지나치게 건전한 이 애니메이션을 과감히 선택하라.
말까? 지나치게 아동 취향일지도. 눈과 귀가 까다로운 관객이라면 성에 안 찰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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