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비운의 왕들이 어찌 하나 둘이었을까
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화도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 한 많은 생을 산 능력있는 임금이었다.
창의문 정선의 그림같다. 인터넷에서 펌
아득히 먼 세월을 의미하듯 물 흐르는 상봉에 아주 작게 보이는 창의문이 보인다.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이문을 통과해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피 묻은 칼을 세검정에서 씻었다고 해 그 이름이 지금도 세검정이라고 한다죠?
그래도 왕이었기에 질질 끌려가지는 않았나?
죄인인데도 가마로 모셨나? 가마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마 나온 것이 생소에 올려본다.
제주도 이런초가에서 귀양을 살았을 것이다. 사진 네이버 펌
그래도 67세 까지 이런 곳에서 살았고 주위에 많은 핍박을 받았어도 의연하게 넘겼다 하니 아마도 만고 풍상을
미리 겪었기에 그리 초연한 삶을 살았다고 본다,
못난 인간은 못난 짓만 한다고 늦게 뭐하러 장가는 인복대비와 영창대군인 갈등 요소를 만들었는지
정말 선조는 예쁘게 볼래야 볼 수가 없는 분이다.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영특하고 영리한 한 광해왕은 이렇게 처참하게 쫓겨나고
역시 무능한 인조 때 청일전쟁으로 백성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죽음의 길로 만든 장본인은 선조라고 생각이 든다.
따뜻한 햇살아래 누워있는 왕 조선 제15대 임금이며 불운을 운명처럼 걸머지고 살았던 광해군묘
늙었어도 그리운 것은 어머니
어머니 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히신 것 같다.
왕비의 묘
광해군 마음 만큼이나 쓰리고 아프고 스산하고 상처로 얼룩진 듯 비석이 검은 색깔로 사선으로 드러나있다
오죽했으면 쫓겨난 뒤 아들인세자와 세자빈도 죽고 강화도에서 일년후에 돌아가셨을까
모든 것을 잃고 하루하루 쓸쓸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광해군의 모습처럼 묘지나마 적적한 곳에서 부부가 나란히 있어
평범한 범부의 생활상처럼 정겸기도 하다
꿈을 펼치지 못해 한스럽기는 해도
오히려 지긋지긋한 왕의 자리보다 마음은 편했을 지고 모른다.
몸체는 헐었으나 지붕의 조각들은 꽃핀 것 같지 아니한가? 아름답다.
묘 앞에는 석상과 향로가 각각 따로 놓이고, 망주석과 문인석이 양쪽에,
4각 석등은 깨어지고 헐어져 광해군의 심정만큼이나 엉망이나 그래도 돌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꽃으로 보인다
광해군의 업적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도망갔지만,분조를 결성하여 피난가고 없는 궁궐을 지키면서 전란수습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외적과 싸웠으며,군량미를 모아 백성들에게 신망과 지지를 받음.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면서 부왕 선조는 경계와 심하게 견제
즉위 초기 왕권 강화를 하면서 임진왜란때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세웠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
서적간행에도 힘써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신속삼강행길,등이 간행되었고,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완성된 시기입니다.(얼마나 빛나는 문화이던가)
임진왜란 때 위기의 나라와 백성을 보살핌 혁신적인 대동법 시행으로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였고,
실리외교(중립외교)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지혜와 백성을 배려했던 왕 중에 왕이다.
국방과 외교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되면서 군사를 양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1619년 명나라와 후금이 전쟁이 발생하여 명나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으로 하여금 명군을 원조하면서
후금과 싸우면서 전세가 불리하면 항복토록 하였다 이처럼 절묘한 중립외교를 펼친다.
조선의 가장 무능한 왕 선조와 스스로 인조반정의 주역이 된 인조는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린 40년에 걸쳐 2번이나 나라를 빼앗기는 믿기지 않는 일을 일으킨 선조와 인조에 비해
윤리도덕에 어긋난다하여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위대한 업적이 사라지고 폐모살제만 남아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는 광해군 과연 우린 지금 이 왕에 대해 재 조명해야 한다는 것은
감추어진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알 필요성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제주도
제주도에서 한 많은 생을 산 광해군
광해군이 어렸을때 25세에 가신 꽃다운 어머니
퍠세자가 되어 26세에 간 저 세상으로 간 아들 그리고 며느리
다시 태어날 때에는 여자로 특히 궁궐의 여자로 태어나지 않겠다며 비통한 심정으로 폐위된 남편따라
강화도에서 일년 지낸 뒤 스러진 왕비
아버지의 질시를 받아가며 컸고
왕이 되어 오랜꿈을 다 펼치기도 전에 비운을 맞아 강화도에 쫒거나고
이 제주도 물을 바라보며
혼자서 쓸쓸히 69세 까지 살아가는 동안 그 고독한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래도 왕들 중에 장수를 누린 것을 보면 내 생각에 삶에 대해 달관한신 모양이다.
인간 세상사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
찰랑거리며 밀려 왔다 가는 비취빛 바닷물결
해녀들의 싱그러뭄
비릿한 미역냄새
유난히 푸른 창공에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
이 모든 자연을 가졌기에
어찌보면 호위호식하면 산 왕보다 못한 삶이 아니기에 69살까지 장수하지 않으셨을까(낭만씀)
광해군이 읊은 시를 이곳에 올려본다.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는 백척루에 가득찬데
창해 거친파도가 땅거미를 뒤덮고
시퍼런 산 근심어린 기운은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왕손의 풀을 바라보고
떠돌이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아른거린다
고국 존망 소식은 들을 수도 없는데
안개 자욱한 강위 외딴 배 누웠구나./
인터넷 글 펌
글중 사진과 내용의 글 중 네이버 다음에서 펌함(
네이버나 다음에 글 사진 올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낭만 2015 3 21
첫댓글 낭만님 글 읽으면서 엊그제 갔었던 광해군 묘를 떠 올려 봅니다.
마음이 쨘해지네요. 그래도 두 분 부부께서 한 자리에 계시니 그만이라도
불행중 다행이십니다.
낭만님의 글을 보면서 광해군의 삶을 다시 한번 음미 해봅니다
늘 많은 역사공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낭만님 고맙습니다...
힘들게 살아가신 광해군,그의삶을 그리며,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낭만님,감사합니다
낭만님의 글을 읽으며 지금이나 옛날이나 옮은 정치는 생각지 않고 자리에만 탐하는 인간들이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