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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옥의 그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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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이야기 스크랩 미술에 대한 오해 / 심규섭
유명옥 추천 0 조회 80 11.04.06 20: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1. 왜 전시를 하는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타의 다른 일처럼 기본기를 성실히 익히면 된다. 그림의 기본기는 운동선수가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이나 패션모델이 몸매를 만들기 위해 다이어트와 운동을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통 수준의 인식능력과 성실과 노력이 있다면 타고난 재능을 탓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의 기본기를 익혔다고 곧바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습작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과나 꽃 따위의 정물을 그리고, 나무나 들판, 산이 있는 풍경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다고 작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연습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들에게 자랑은 할 수 있어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그림의 기본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조형적 언어이다. 이 조형적 언어는 물감과 붓 따위의 재료를 다루는 기술과 형태, 명암, 구도, 색채, 질감 따위를 말한다. 대부분의 입문자들은 이 습작단계를 작품창작단계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이것도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뭐, 할 수 없는 일이다.

 

앞 얘기는 이 정도에서 그치도 본론으로 들어가자. 화가가 전시를 하는 목적이 뭘까? 당연히 자신의 작품을 사회화시켜 존재가치를 높이고 다 넓고 깊은 소통을 하기 위해서이다. 쉽게 말하면 대중과 미술계로부터 자신의 능력과 작품세계를 인정받기 위함이다. 더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미술작품을 사회적 가치로 환원시켜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말은 원론적이다. 씨앗을 심은 것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씨앗을 뿌렸다고 저절로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에서는 모든 공주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모든 공주가 아름답지도 않고 왕자가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지 않으며 그들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과 그것을 구현하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 씨앗을 뿌리고 영양분을 공급하고 병충해를 막고, 가지치기를 하면서 제대로 자라게 하는 과정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습작이나 연습작품을 전시해 놓고 좋은 가치를 얻고자 하는 것은 무리이고 시기상조이다. 화가가 작품을 가지고 사회와 관계를 맺을 때는 작품이 완성되어야 한다. 작품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하나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세계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세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그 보편성과 객관성을 누가 만들어 주는가?

 

그림에 입문한 초급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 할지 잘 모른다. 어떤 주제와 소재를 선택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기법을 구사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또한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 지, 방향은 맞는 지도 잘 모른다.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초급자가 괜히 초급자이겠는가. 주제나 소재에 대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도 있고, 작품의 방향이나 흐름을 주변 사람들, 선생이나 동료에게 힌트를 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똑같은 선생 밑에서 똑같은 지식을 얻었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하여 구현하는 일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예술작품은 사회 속에서 수용되고 소통된다. 무인도에서 완벽한 작품을 창작해도 소용이 없다. 그 완벽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제멋에 화려한 옷을 입고 노는 여성은 약간 맛이 간 사람이다. 여성의 화장과 패션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사람들에게 확신과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빠른 길이다. 작가가 전시활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끔 단체전을 하는 것을 보면 한 작가 당 한 두 점 정도의 작품을 출품해 전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전시는 목적이 의심스럽다. 한 두 점의 작품으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전혀 알 수가 없을뿐더러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런 방식의 단체전을 하는 목적은 사회적 발언을 위한 주제전이거나 혹은 미술집단의 규모와 위세를 떨치기 위함이나 현시대 작품경향을 알기 위한 기획전 정도가 대부분이다.

 

사회적 발언과 시각 환기를 위한 전시는 최대한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참여 작가도 많아야 한다. 이럴 때 작품은 높은 완성도나 수준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기획의도에 맞고 시각적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원한다. 이 전시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과 위치를 확인하는 성과를 얻는다. 미술운동 차원에서 특별한 사조와 이념으로 무장한 그룹이 기존의 미술계에 반발해 집단적으로 미술활동을 펼치는 단체전의 경우... 요즘은 없다. 넘어가자. 이것이 아니라면 동문회나 친목회, 취미작가모임 따위가 조직의 규모나 위세를 떨쳐보려는 전시도 있는데, 작품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조직이 목적이고 작가는 그 조직의 조직원임을 확인하고 확인받는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 박물관, 시립, 공립 따위의 공공미술공간에서 현대 미술이나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흐름을 정리하고 경향을 알아보고자 여는 기획전이 있다. 혹은 지역 미술관서 지역민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근 경향의 작품이나 특정 사조, 유파 따위를 정리해 전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전시의 목적은 공공성에 있다. 이 흐름에 작품이 선정된다면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작품세계가 완성된 작가를 선발한다.

 

이것 말고도 개인 화랑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화랑 따위에서 여는 단체전이 있다. 대부분은 작품판매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약간의 공공성을 띠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도 화랑이나 미술관 운영과 홍보 따위에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가끔은 단기적인 행사나 이벤트 따위를 홍보하거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단체전을 기획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목적은 명쾌하다. 작품성이나 작품의 소통, 혹은 작가의 작품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작품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작가의 경우는 다양한 형태의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세계를 완성시켜 가고자 하는 신진작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위에서 언급한 단체전에 참여 할 수도 설사 참여한다고 해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형식의 외피를 쓴 단체전이 난무하는 것은 작가에게 경력을 팔아 장사를 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한 두 점의 작품으로 그럴듯한 경력을 얻을 수 있으며, 전시를 기획하는 자는 자신의 기획능력과 경험을 쌓으며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이득이 있다.

 

작가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관심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전시회를 통해 대중과 미술현장에서 인정받아가면서 서서히 객관성을 획득하며 완성되어 간다. 전시는 단체전이든 개인전이든 대중과 미술 현장에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내어 보이는 자리이다. 전시경력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전시경력에 집착하는 것은 미술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폼을 잡기 위한 행위이다. 겁을 주고 위세를 보여 그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미술현장-미술계, 혹은 업계의 동료. 미술현장이 곧 화단이다. 미술협회, 미술대학, 화랑 따위는 화단을 이루는 일부의 요소이다. 수 십 개의 미술협회와 그만큼의 미술대학과 수 백 개의 화랑과 수 백 명의 평론가과 수 천 개의 미술학원과 수 천 명의 미술학도와 수 만 명의 화가와 또 그만큼의 취미화가와 전시장과 미술 관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단체전을 하는 이유는 비교적 부담을 줄인 시연회나 시사회, 혹은 시음회 같은 것이다. 일종의 테스트를 받는 일이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작품을 출품해야 한다. 한 두 점의 작품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단체전을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자신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요구와 대중의 요구, 혹은 미술현장의 요구를 가늠하고 조정할 수 있다.

 

개인전은 이것의 보다 적극적인 행동이다. 수 십 점의 작품을 대중과 미술현장에 드러내 보이면 작품의 앞뒤를 가늠할 수 있는 흐름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장점을 명확하게 찾아 낼 수 있다. 수 십 번의 이런 단체전과 최소한 3번 이상의 개인전을 통해 작가와 작품은 완성되어 간다. 작품세계가 완성되어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다. 마치 제품을 불량 없이 완성시켜야 유통하고 판매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위생적이고 맛있는 음식을 완성해야 손님에게 내놓는 일과 같다.

 

화려한 전시경력에 속지 마라.

한 두 점 달랑 출품하는 전시를 하지 마라.

단체전보다는 개인전을 많이 해라.

경력으로 대중 위에 군림하거나 폼을 잡지 마라.

 

화가는 겸손한 사람이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전시는 자신을 온전히, 발가벗고 드러내는 자리이다. 그 이후에 대중의 판단과 미술현장의 소리를 겸손하게 들어라. 내가 뭘 그려야 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가르쳐준다. 나에게 창조적 영감을 준다. 나의 존재를 높이고 사랑받게 하는 곳이다. 대중과 미술현장은 나를 먹이고 키우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다.     

 

 

 

 


 

 

 

 

3-2.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화가들에게


가끔 그림이 어렵다며 짜증을 내면서 하는 말. 하지만 대화는 짧은 시간에 끊어졌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무슨 방법을 알아야 그리죠?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방법은 이미 기초에서 다 배웠습니다. 나머지는 작품을 하면서 터득해야 합니다.”

“안 되는데 어떡해요? 원하는 데로 그릴 수가 없어요. 무슨 방법이 있을 거 아니예요? 그것을 가르쳐 주세요.”

“직접 그려보시면 압니다.”

“그릴 수가 없다니까욧!”

 

입시학원에서 생긴 일이다. 결과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이 있고, 못 그리는 학생이 있다. 강사는 어느 학생에게 신경을 쓰겠는가? 당연히 둘 다 신경 쓴다. 하지만 그림을 가르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에게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느낌 따위를 말해준다. 그리고 세부적인 부분을 손봐주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거의 100% 자신의 힘으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그림을 못 그리는 학생에게는 눈이며, 코, 입술 따위를 그리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실제로 세부적인 부분을 손봐주고 따라하라고 한다. 결국 선생이 70%, 학생이 30%로 완성한 작품이 나온다. 실력은 선생만 향상된다. 학생은 자신의 힘으로 완성한 그림이 거의 없어진다. 물론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못 그리는 학생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한 것을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강사와의 친근감도 높이고 최선을 다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 -더욱 안 좋은 교육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전시회를 끝내고  찾아온 작가와 나눈 이상한 대화.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 순간 멍하게 됩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를 모르겠어요. 의욕도 안 생기고,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하지만 뭔가를 해야 하는데...”

“조금만 쉬고 곧바로 그림을 그리세요. 그리다보면 알게 되겠죠.”

“방향을 못 잡겠어요. 그렇다고 예전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순 없잖아요.”

“답습을 하든, 새로운 것을 찾든 관계없이 그림을 그리세요. 그림을 그리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게 잘 안 된다니까요!! 왜 자꾸 윽박지르기만 하세요? 저도 잘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무슨 노력을 한단 말입니까? 머리로 생각만 한다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림에 관한 문제는 그림 그리기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입시공부나 여타의 단순한 기술체계들은 하나의 단계 위에 다음 단계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 단계가 부실하거나 잘못되면 다음 단계로 진행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최소한 예전의 시스템은 이 방식이 효율적이었다. 왜 예전에 이 방식이 맞는가에 대한 긴 설명은 하지 않겠다. 옛날 시스템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책을 읽는다고 치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개념이 나오고 생소한 지식들이 튀어 나온다. 이것을 모르면 답답하다.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몇 장을 못 넘기고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모르고 낯선 개념이 있더라도 그냥 진도 나간다. 일단 책을 끝까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관련된 많은 책을 읽고 나면 난해한 부분들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된다.

 

음식을 만든다. 요리를 한다. 요리사는 좋은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양념을 하고 조리방식을 선택한다. 조리시간과 각 재료간의 궁합, 영양소, 맛의 어울림 따위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서 음식을 만든다. 그런데 원하는 재료가 준비되지 않았다. 재료의 다듬음이 어설프다. 양념이 부실하다. 하지만 훌륭한 요리사는 원하는 재료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요리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재료가 부실해도 다음 단계에서 재료의 한계를 보완한다. 썰기, 다듬기가 부족하다고 요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양념이나 조리 과정에서 보완해 최종의 요리를 완성시킨다. 모든 요리는 항상 이런 식이다. 훌륭한 요리사는 수많은 변수에 대해 대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책에 나오는 대로 똑같이 하는데도 요리에 실패하는 이유는 변수와 우연이라는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변수와 우연성은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몸으로 경험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근의 경제 원리 중에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즉, ‘솔루션’보다 ‘위기관리능력’을 더욱 높게 생각하는 것도 이 원리와 비슷하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운다. 일단 균형을 잡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만 굴리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1단계-균형 잡기, 2단계-앞으로 나가기. 하지만 이렇게 자전거를 배우는 사람은 없다. 그냥 패달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몇 번 넘어지고, 무릎이 깨어지면 어느새 균형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균형을 잡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움직이면 균형은 쉽게 잡힌다. 

 

그림을 배우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 면이 있다. 또한 나는 그림을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 취미생과 전문가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다. 취미생을 가르치나 전문가를 지향하는 사람을 가르치나 똑같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취미생을 가르치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미술학원에서 초보자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연필 사용법. 종이 사용법, 선 사용법, 형태 잡는 법, 명암 넣는 법 따위의 기본을 가르치는 데 3개월을 넘지 않는다. 그런 다음 곧바로 석고상을 그려보라고 한다. 초보자는 황당해 한다. 이제 고작 걸음마도 떼지 못한 사람에게 작품을 완성하라니...원래 그림 그리기가 그렇다. 나도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 미술시간에서도 기초과정 3개월 만에 자화상 완성해 오라고 한다. 회원들은 다소 황당해 하지만연필화 중급 5개월 정도 되면 인물이고 풍경이고 혼자서 잘 그린다. 수채화 기초과정 2개월 정도 진행하고 중급 넘어가면 곧바로 작품에 들어간다. 그래도 회원들은 잘 그린다. 아니, 이런 방법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잘 그리는 것이다.

 

원리를 알고 다음 단계를 진행시키는 것은 기본이나 초기단계에서 사용한다. 일단은 전체 과정에 대한 시물레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각 단계는 다음 단계를 전제하고 있다. 한 단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단계가 조금 어설프더라도 계속 진도를 나간다. 한 단계가 어설프다고 몇 번씩 반복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 그림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양(量보)다는 질(質)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높은 질은 나오지 않는다. 운전면허시험을 잘 봤다고 운전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도로에서 운전 경험이 많은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것이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옷을 잘 사고 코디를 잘 하는 사람이다. 직접 물어봤다. 하는 말이 이렇다.

 

“처음에는 실패를 많이 했어요. 마음에 들어 옷을 샀는데 직접 입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그냥 버렸어요. 패션에 관한 책도 참고하면서 직접 남대문이며 동대문을 뒤지고 다녔지요. 고생 많았어요.”


그림을 제법 그리는 사람들의 경우 어설픈 작품이 많은 것보다는 신중하게 그려 좋은 작품을 창작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것이다. 질 좋은 작품은 수많은 습작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이지 한 방에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초과정에서는 습작을 많이 하다가 고급반이 되면 왠지 많이 그리면 촌스럽다고 느껴지기나 한 걸까?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과정에 대한 집착이 들어있다. 나름대로 효율성을 높이는 잔대가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정이 어설프면 결과도 어설프다고 생각한다. 어설픈 과정으로 어설픈 작품을 완성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나의 수준이 높은데 어설픈 결과가 나와서야 쓰겠는가. 일단 창작한 작품은 버릴 수도 없고 미치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은폐하려는 사춘기적 심리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각 과정에 대한 충실성으로 이어진다. 앞의 과정이 완결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천재의식이나 명작주의에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림을 포기해야 한다.

 

원칙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중요하다. 그림을 가끔 그리는 것보다 완성을 많이 해보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다보면 전체 과정을 이해한다. 창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는 일이다. 전체공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전부를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구도와 전체적인 얼개는 크게 잡는 것이 중요하다. 세세한 부분을 계획하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림 그리는 과정에은 수많은 붓질과 물감 섞기와 즉흥적 판단이 들어간다. 이걸 처음부터 모두 예상하고 그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하더라도 그림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착수하지는 않는다. 예측 가능하고 완벽한 계획에 의해 그려진다면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밑그림은 그야말로 큰 얼개를 만드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밑그림은 그저 밑그림일 뿐이다. 밑그림 과정에서 완벽한 소묘를 하면 다음 단계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사실적인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 어설프면 형태나 명암을 잡는데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기에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은 힘들어진다. 그래서 형태나 명암의 흐름이 밑그림에 들어가는 것이다. 거꾸로 형태나 명암이 필요하지 않는 밑그림 과정은 최소한으로 그린다. 소묘나 밑그림 과정은 채색과정에서 붓질, 색상 따위와 수많은 즉흥성과 변수를 통해 그 역할이 완성된다. 

 

작품내용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의 계획은 큰 얼개를 잡는데 만족해야 한다. 완벽한 계획이 잡혀있지 않다고 해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그림그리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완벽한 계획이 우선이 아니라 어설픈 계획이라도 일단 그려봐야 자기 속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계획을 머리로 세우지 말고 몸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그 기본과 초심이 뭘까? 그것은 그림에 대한 사랑,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 자기의 존재를 드높이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열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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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자신의 미술세계를 만드는 빠른 방법

 

처음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은 연필화 기본기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수채화를 배우고, 유화나 아크릴화, 파스텔화 따위를 배우고 싶어 한다. 다양한 매체를 다루고 싶어 하고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심지어는 추상화까지 그려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알아야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린 학생들은 대부분 이런 형식으로 그림을 배운다. 하지만 미술을 제외한 여타의 예체능 분야는 어린 나이 때부터 하나의 전공을 정해서 연습을 한다.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현악기, 금관악기, 목관악기에 속하는 모든 악기를 배우고 나서 하나를 전공하는 경우가 있는가? 운동선수가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따위를 모두 해 본 다음에 하나의 전공을 선택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 소설, 수필, 시 따위를 모두 배우고 하나를 정하는가? 건축하는 사람이 교량, 아파트, 공공건물, 토목까지 섭렵한 다음에 원하는 전문분야를 다루는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나 음악가, 혹은 김연아나 박지성 같은 운동선수, 피카소, 신윤복 같은 화가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한길을 팠다. 이것저것을 배우며 두리번거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의 세부적인 전공을 결정하여 연습하는 것이 기능 완성에 이르는 훨씬 빠른 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전공을 어떻게 정해집니까?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선택해 준 전공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양하게 배운 다음 선택해도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너무 구체적으로 배우면 영역이 좁아져서 다양한 세계를 모를 수도 있잖아요."

 

말은 그럴싸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질문이다. 재능보다는 관심이다. 어린 아이가 관심을 보이고 몸을 움직여 해 보고자 하는 것이 재능보다 훨씬 중요하다. 실제 미술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는 화가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부모나 교사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어린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부분을 80% 정도는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전공은 어른들이 선택해 주는 것이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열대지방에서 김연아 같은 피겨선수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아이가 크리켓이라는 영국식 야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당연히 미국식 야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음악을 처음 접한 선생이 만약 바이올린을 전공했다면 그 선생에게 배우는 학생은 바이올린을 전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억울하다고? 그럼 하필 분단된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그렇고 그런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을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럭저럭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어진 환경과 자원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그냥 운명이고 환경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인생은 길다. 늦게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거꾸로, 사기를 당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일반적인 것을 특별나다고 여기는데서 걸려든다. 나이가 들면 인생이 복잡해진다.의무사항도 많고 일도 많아진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상상력이 고갈된다. 상상하는 놀이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20세 전에 형성된 알맹이를 가지고 평생 동안 풀어내며 창작한다. 그러기에 빠를수록 예술적 상상력은 풍성하기 마련이다.

 

또한 몸으로 하는 전문적인 기능은 육체적인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생물학적인 한계가 빨리 온다는 말이다. 몸에 의한 기술적인 최고조는 대략 30~40세 전후이다. 40세 이후는 기술적인 발전은 거의 멈추고 숙련에 의한 세련미와 예술적 넓이를 확장하는 시기이다. 한 분야를 시작해 약 20년 정도를 숙련하면 기술적으로 가장 전성기가 된다. 청소년기에 예술을 시작한다면 30~40세 전후로 기술적인 전성기를 맞을 수 있다. 그러나 25~30세 전후로 예술을 시작한다면 기술적 완성도를 보지 못하고 고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예술분야는 반드시 육체적인 기능을 동반한다. 상상이나 이미지는 몸을 사용하여 매체라는 도구를 통해 구현된다. 예술분야는 워낙 전문성이 높아서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술실기 박사는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실기에 정통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저것 조금씩 잘하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초등학교 교육에나 통할 수 있지 전문가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한 사람이 평생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인구의 0.1%도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두개의 세계를 완성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유화를 매체로 사용해 인물화를 완성한 사람이 같은 매체로 풍경화를 시도해서 완성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바이올린을 완성시키고 난 후 피아노를 쳐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더 쉽게는 미국의 전설적인 농구선수 마이클 조단은 농구를 완성했지만 은퇴 이후 야심차게 시작한 골프에서 참담하게 실패한 실화도 있다. 지금은 다시 농구계로 돌아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모든 예술가들은 그 분야의 '박사'이다. 넓이를 중심으로 깊이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중심으로 예술세계를 넓혀나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훨씬 효율적이다. 깊이를 더해서 극한까지 갔다면 결국 전부와 통하는 것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미래를 예측해 보자.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은퇴하는 나이가 30세 전후로 보면, 다른 나라 혹은 국내 리그에서 몇 년을 더 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성기가 지난 선수생활은 더 나은 전성기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벌거나 인맥관리 차원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국내 프로리그에서 몇 년을 뛰면서 다양한 체육인들, 정치인, 경제인들과 인맥을 만들고 화려하게 은퇴를 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유소년 축구교실도 만들고, 영국프로축구팀을 초청해 국내 친선경기도 기획할 것이다. 더 나아가 주요 축구경기의 해설자로 나오고, 무슨 홍보대사 역할도 하고 TV예능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내밀 것이다. 이런 경험을 쌓아 프로팀의 코치를 맡거나 축구협회의 기술이사 직함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피겨선수 김연아나 골프선수 박세리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예술분야라고 다를까. 태백산맥과 아리랑이라는 소설을 쓴 조정래 선생은 평생 소설을 쓰겠지만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문인협회 일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후학을 기르고 다른 예술인들과 다양한 교류를 통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김지하, 황석영 선생 또한 마찬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세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배우는 어린 학생들이 미술학원에서 이것저것을 배우는 것은 그 학생의 재능을 모르기 때문이다. 재능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을 해 본 다음, 가장 강점을 보이는 부분을 전공으로 삼는 것이다. 교사나 부모가 해야 할 일을 어린 학생 스스로에게 떠맡기는 꼴이다. 어른의 체계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학생이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확률을 별로 없다. 원래 예술 따위의 극한적인 전문분야는 독학자체가 불가능하다. 독학을 할 수 있는 분야는 그냥 달달 외우는 검정고시나 공무원 고시 밖에 없다.

 

만약 내가 어렸을 때, 조금만 더 훌륭한 선생이나 어른을 만나 배웠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풍성한 예술세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별것 아닌 문제를 풀기 위해 몇 년을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다. 선배나 선생들이 몇 마디만 조언해 주었다면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이유는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미술학원의 이윤추구 때문이다. 사설 미술학원은 미술교육이 목적이 아니라 영리추구가 목적이다.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미술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영리를 추구하다보면 미술교육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먼저는 좋은 선생을 초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선생은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을 가르치기 어려워 경제적 손실이 아주 크다. 또한 이것저것을 배우면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수강료를 많이 받을 수 있다.

 

30세 전후로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미 늦었다. 그럼에도 주로 이 정도의 나이에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미술시간 회원들이다. 이들에게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방법과 다양한 기법을 가르치는 일은 그냥 취미활동으로 몇 작품 그리다가 그만두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기본기를 빠르게 익히고 기본적인 조형기법을 중심으로 매체를 확정하고 풍경이나 인물, 정물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결정이 되었다면 풍경화 안에도 도시풍경, 농춘풍경, 숲속이나 나무, 집 따위의 구체적인 소재를 결정하고 그에 맞는 기법도 한정시켜야 한다. 인물화를 그린다면 모든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령대에 맞는 소재와 손에 잡히는 주제와 익숙한 기법을 확정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정해놓은 다음 숙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숙련하는 과정에서 서로 연계하며 정해지는 것이다. 일단 매체와 기법과 구도와 소재와 주제가 습작과정을 통해 정해지고 전시를 통해 확신이 서면 곁눈질 하지 말고 오로지 한길을 파야 한다.

 

그림공부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좁혀야 한다. 다양한 매체를 안다고 해도 결국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수용된다. 그림그리기의 모든 기법은 기본기에 추상적으로 녹아있다. 자신의 조형세계를 만드는데 여러 기법은 불필요하다. 사물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술을 가질 필요도 없고, 완벽한 명암이나 형태, 혹은 모든 색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서양 음식조리법을 김치찌개에 접목할 것이 아니라 그냥 김치찌개를 잘 끓이면 된다. 창작활동은 돈을 버는 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것저것 잘하는 사람들과 놀지 마라. 이들은 몸이 아닌 입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사람을 약 올려 돈벌이를 하거나 폼만 잡는 잡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전문가는 전문가를 금방 알아본다.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 사람은 척보면 안다.

 

한길에 매진하다보면 자신만의 양식과 틀이 완성된다. 군더더기와 필요 없는 요소는 빠지고 핵심만 남으면서 세련미가 더해 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의 작품을 좋아할 것이라는 연예인 같은 생각은 버려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슈퍼맨 같은 생각도 필요 없다. 내 작품과 나의 세계를 알아주는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10명을 감동시키면 나아가 10만 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 미술적, 조형적으로 완성된 세계를 가지고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나의 세계와 사람들의 세계는 결국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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