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에 각인된 몇가지를 끄집어내 보면
먼저 중고딩 생활에서도 남들이 별로 하지 못한일들, 주말이면 어김없이
배낭를 메고 야영을 떠났다. 생물반 활동이라지만 노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냇가에 텐트를 치고 막걸리 큰통, 모닥불, 키타를 튕기며 별이 빛나는 밤을 지샛다.
냇물을 떠서 밥을 하고 꽁치 통조림이면 훌륭한 메뉴였다.
산위에서 눈을 녹여 끓여 먹는 라면은 지금도 군침이 돈다.
그 연장선상에 서있는 시험에서 해방된 대학 일년의 생활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것은 다했다.
무릎 아래 내려오는 당시 유행하던 두툼한 코트를 너나 없이 걸치고 명동바닥을 쓸었다
축구를 좋아하던 11 명의 멤버는 한명을 이민 보내고 열명의 멤버가 재수하던 두넘을 종로와 광화문 학원에서 불러내어
좁은 명동 바닥을 어깨동무하고 휘저었다.
명동의 몽쉴통통, 쉘부르, 종로의 음악다방에서 죽치고 다방 테이블엔 성냥개비 탑이 쌓이고,,,,,,반으로 분질러지며
시간이 죽었다.
긴머리가 명동파출소로 개끌리듯 끌려가게하고
중부경찰서 유치장의 밤샘은 김밥을 먹으면 지금도 묘한 향수에 젖게 만든다.
그나마 아침에 뚝섬 재판소까지 까마귀 닭장차에 실려 r끌려가지 않고 빽 든든한 친구 덕에
서장실에서 머리에 고속도로를 뚫리고 풀려나와
이발소 의자에서 졸며 출소한 사람 마냥 스포츠 머리를 했다.
학교 앞 당구장엔 오센치 두께의 금을 당구 다이에 깔아 주었지 싶다.
아마도 당시 명동 땅 한평을 살 수 있는 액수였을 거이다.
왕십리에서 시작한 일차는 명동으로 이차, 그리고 광화문, 종로 뒷골목에서 기어나와
막차를 타고 졸다가
수유리 종점에서 내려 통금시간 걸리면 또 닭장차 신세이니
차도 없는 거리를 100 미터 달리기로 달려 수유리에서 미아리까지 뜀박질로 마무리되거나
장위동 종점에 떨어지면 골목길을 스파이 영화 같이 방범대원을 피해 월곡동 고개를 넘어 종암동으로 스며들어서야 끝났다.
시대는 시위로 물들었었다.
스크럼을 짜고 학교 후문으로 치달아 내리다가 앞에선 대열이 다 흩어지면
전혀 자의적이지 않은 앞장을 서게된다.
맨 몸으로 맨 앞에 서서 무장한 경찰들의 방패와 곤봉앞으로 치달아 내린다.
암만 발로 삣대어도 뒤에서 떠밀려 오는 힘에 내리막길은 무지막지한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으니
학교당국에서 내 보낸 체육과생들과 정체불명의 어깨들이 대열을 흩트리기 위해
우리의 스크럼한 어깨를 끊으면 맨 앞에 서게 된 나는 풀어 주던 어깨들에 못 이긴척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는 선동에 뛰어 나갔엇지만
앞장서서 선동하고 난 후엔 옥상위의 카메라에 찍히지 않기 위해서 뒤로 물러선다는 그가
나중에 공인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사실을 안 후에야
'민주주의는 내 피가 아니라 네 피를 먹고 산다' 였음을 알았다.
그 네 피 위에 386 은 귄력를 잡았고 수구꼴통처럼 잔보골통이 된 사람도 많다.
겨울 12월 27일 전날 후배 고3 애들 예비고사 발표후 주머니 돈, 반지 시계까지 다 주점에 맡기고
빈털털이가 되어 광화문 교육회관 지하 다방에 모인 토요일 오후
먼지나는 주머니에 50원 하나, 쩐 없으면 각자 찢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
터덜 터널 정처없이 걷다가 문득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하나 자각하고
좋아하던 후배가 다니는 금호동 산동네 골짜기, 솜틀집 이층 다다미방 교회에서 모인
토요 학생 예배에 참석했다.
그 후 삼개월지나 부흥회에 오신 나이든 강사 전도사님의 말씀이 어찌 그리 내 생각의 의문들을 플어 주던지,
그 해 유월 6.25 산상집회에 가게되었고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2시간여쏟아 낸 회개의 눈물은 찌는 여름 날의 땀과 콧물과 범벅이 되어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었다.
민주주의 가 내피를 먹고 살든 네 피를 먹고 살든
새로운 세계의 몰두는 현실에서 회색분자로 만들었다
술과 담배를 끊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대신 강의 끝나면
교회 여전도사님 따라 금호동 산동네를 누볐다.
병들어 누워 삐적마른 몰골 위에 안수기도하면 다큰 어른의 눈에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추운 겨울 교회 기도실에서 밤새 엎드려 기도하다 잠들면 발치에 뜨거운 물이 가득든 탄약통이 놓여 있었다.
격동의 세월 속에 군에 입대하고 제대한 그해 박통이 죽었다.
동생은 대학생이 되고 운동권에 몸담아 잇었다.
동생과 안암동에 야학을 열었다
건축일 하시는 교회 후배 아버님이 와서 하나인 창고를 벽을 쌓아 세개의 교실을 만들고
하나는 교무실,두 개 교실은 한 학년 6개월 과정으로 중학교 검정고시 준비 반을 만들었다.
초등학교도 중퇴하고 올라온 시골 소년 소녀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밤에는 야학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공부했다.
동생 친구들과 후배들 몇명과 같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 교무실에 모였다.
철필로 기름종이에 시험문제를 긁어서 가리방으로 먹을 찍어 인쇄했다.
일년반의 중학 과정을 졸업시킨 얼마 후인가
동생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군대로 잡혀가고 같이 야학을 한 동기들 후배들, 여학생들 집까지 수색을 당했다.
제대한 동생은 서울 인천의 공장을 오가며 초딩 졸업이라하고 위장 취업해 있었다.
회사가 동원한 깡패들에게 귀가 길에 얻어 맞으면 신혼살림을 차린 우리집에 와 숨어 치료했다.
YH 사건등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 신문에 지명수배 명단에 올랐다.
집과 아버지 상점에는 인천, 성북,강동,영등포.경찰서와 기관에서 번갈아 찾아 왔다.
아버님은 스트래스로 당뇨병이 더 심해지셨다.
수배 당하고 잡히거나 자수하면 숨겨 준 친구들이 공범이 되기에 우리 집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가족이 숨기면 공범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늘 신혼의 보금자리 종암동 산동네 17 평 아파트 경비실엔 늘 감시의 눈길이 머물렀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회색분자였다.
진정한 정의와 진리는 무엇이었는가
헷갈리는 시대 속에서 나는 삶의 자리는 음성으로 옿겨 졌다가 다시 서울로 왔고
첫째가 태어나고 생활전선은 무난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없는 포니2 를 몰고 다니고 저녁 값을 내가 계산했다.
그러나 어느날 오래 고민하고 생각하던 신학교에 등록했다.
삼개월지나 아버님께 이실직고했다
사업을 물려 받든지 신학을 하든지 택일하라는 불호령에 '신학 공부해야 겠습니다'
하였더니 한마디 말씀"그럼 나가라' 하셨다.
먹고 살라고 트럭 한 대를 주셨다.
낮엔 일하고 밤에 신학교에 갔다.
2년을 견디고 휴학했다. 삶은 아파트를 팔게 했다.
4년 후 복학, 아니 재입학했다. 일 년 반, 한학기를 남기고 휴학, 또 4년이 지나 한학기를 마저 하고 졸업,
다시 2년이 지나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드디어 지난해 졸업하고 두번의 시험 끝에 지난 8월 4일 목사 고시 합격자 발표에 이름이 올랐다.
몸은 십이지 궤양으로 10년을 고생하고 당뇨합병증으로 폐결핵을 앓아 한 쪽 폐만 가동하고 있다.
이젠 한쪽 눈도 희미하고 체력이 약하다.
담 주 화요일 레이저 수술을 받으면 좀 나아질까나?
8년동안 우리들 이야기 카페에 머물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간접 경험으로 들여다 보았다.
내 삶의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년 삼월이면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종교를 가지지 않거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야 그저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나 개인은 20년의 결실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 없음이 나를 위축시킨다. 세월이 가고 연륜이 쌓이면 자신감이 높아져야 하건만,
아직도 난 자신이 없다.
주여! 도우소서 할 따름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회색분자이다.정치적으로 회색분자가 되었지만
종교적으로 기독교 안에서도 회색분자이다.
난 그들의 하는 일에 동의 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이제 남은 세월을계속 회색분자로 남을 것인가는 내 숙제이다.
내가 말하는 회색분자란 아웃사이더이다.
이 카페 에서도 난 아웃사이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