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제타 존스
Success Story 춤 솜씨, 노래 실력,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미모의 삼박자를 무기로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차근차근 밟아 올라간 전형적인 야심가 타입. ‘마스크 오브 조로’로 할리우드 스타덤에 올랐고, 마이클 더글라스와의 결혼으로 배우 생활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안정 궤도에 진입했다. 이후 ‘시카고’로 ‘연기도 되는’ 배우라는 평가를 얻어냈고, 영국의 ‘헬로’지가 실시한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여성’ 설문조사에서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에 이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마이클 더글라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딸 하나씩을 둔 채 별 문제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중.
(1969)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다
1969년 영국 웨일스의 작은 어촌 마을, 스완시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인 재봉사인 어머니와 캔디 공장에 다니던 웨일스인 아버지를 둔,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가정의 자녀였다.
(1980) 11세 때 뮤지컬 ‘애니’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주로 인근 가톨릭 교회의 아마추어 악극단에서 활동하던 그녀가 본격적인 데뷔 기회를 얻은 것은 14세 때. 합창단 코러스에서 노래하던 그녀는 한 에이전트의 눈에 띄었고, 곧바로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덕션에 발탁되었다.
(1991) 악극단 소녀에서 TV의 섹스 심벌로
TV 드라마 ‘The Darling Buds of May’가 히트하면서 영국 TV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도 진출해 탄탄한 연기 기반을 다졌다. 덕분에 영국 내에서는 상당히 인지도 있는 여배우로 자리잡을 수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고상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섹스 심벌에 가까웠다.
(1995) 라틴계 이미지로 할리우드를 공략하다
영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무렵, 할리우드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TV 시리즈로 제작된 ‘인디애나 존스’등 몇몇 드라마에 일회성으로 출연하고 ‘세라자드’ ‘캐서린 더 그레이트’ 등 크게 성공하지 못한 시대극 영화의 주연을 맡기도 하며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냈다.
(1998) 행운이 한꺼번에 터졌다. CBS 미니시리즈 ‘타이타닉’의 주연으로 발탁되며, 미국에서도 TV 스타의 위치에 올라섰을 뿐 아니라, 이 드라마를 우연히 본 스티븐 스필버그의 눈에 띄어 ‘마스크 오브 조로’에 전격 캐스팅되기에 이르렀다. 라틴계로 착각할 만큼 이국적인 이미지 덕분. 이후로는 눈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2000) 남자로 부와 명예를 얻다
당시 55세인 할리우드의 바람둥이, 마이클 더글라스와 25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돈과 명예 때문에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손톱을 걸었다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많았지만, 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어지간히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몸이 달았던 건 틀림없는 사실. 95년부터 별거에 들어간 전부인과 이혼 절차를 마무리짓기 위해 전 재산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천만 파운드(약 8백20억원)의 위자료를 지불하는 배짱을 보였다. 11월 18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거행된 그들 커플의 결혼식 비용은 무려 2백만 달러(약 24억원). 이날 캐서린 제타 존스가 걸친 웨딩드레스의 가격 또한 10만 달러에 육박했다.
(2003) 걸출한 미모와 유명세에 비해 연기면에서는 별반 눈길을 끌지 못한 그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시절부터 다져온 춤과 노래 실력을 무기로 ‘시카고’에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도 역전시켰다. 카리스마 넘치는 댄서 ‘벨마 켈리’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대가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았다.
심은하
Success Story 청순하고 단아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 무엇보다 발군의 이미지 메이킹 능력을 발휘해 수직 상승한 케이스. 노래방 모니터에 등장하는 무명 모델로 활동하는 등 어려운 시절을 겪었지만, 데뷔 이후로는 시기적절한 이미지 변신과 일취월장하는 연기력을 무기로 순식간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최상의 위치에서 홀연히 떠남으로써 더욱 우아한 이미지로 만인의 기억 속에 남았고, 이후 시작한 그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다재다능한 아티스트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은퇴 이후 컴백설은 늘 대두되고 있지만, 언제쯤 복귀할지는 미지수.
(1972)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3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때 변변찮은 모델 노릇으로 호구지책을 삼기도 했다. 일설에는 놀이 공원의 퍼레이드 걸로 일했다고도 한다.
(1993) 고생 끝에 TV에 데뷔하다
세경필름이라는 영화사에서 실시한 신인배우 겸 모델 모집에 공모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때 영화사가 내건 조건이 독특했다. 응모자 중에서 진선미 세 명을 뽑아 이 회사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캐스팅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심은하가 만장일치로 진에 당선되었다. 당시 영화사에서 제작을 추진하던 작품은 ‘게임의 법칙’. 하지만 영화사가 경제적 으로 어려워져 영화 제작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는 바람에 심은하는 3개월 동안 영화사 사장의 비서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 세경필름이 부도를 내며, ‘게임의 법칙’은 다른 신생 영화사에서 제작하게 되었고, 심은하의 첫 영화 출연은 무산되었다. 이에 실망한 그녀는 같은 해, MBC 22기 탤런트 공채에 응모해, 브라운관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데뷔작은 ‘한지붕 세가족’.
(1994) 다슬이로 스타 되다
트렌디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청순 가련한 이미지의 ‘다슬이’를 연기하며 하루 아침에 스타덤에 올랐다. 같은 해에 출연한 후속작 ‘M’에서는 선과 악을 오가는 1인 2역을 소화해냄으로써 기대 이상으로 가능성 있는 연기자라는 평가마저 얻어냈다. 짙은 화장에 갈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가 이 당시 심은하의 트레이드마크.
(1998) 심은하 전성시대의 개막을 알린 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미술관 옆 동물원’을 통해 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제 춘사영화제 등의 여우주연상을 모두 거머쥐었다. 이후 2000년까지, 충무로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배우로 군림하게 된다. 탁월한 시나리오 해석력으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배우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미지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입술에만 살짝 포인트를 준 메이크업에 검은 생머리로 고급스럽고 단정한 느낌을 강조하기 시작.
(1999) 화제의 드라마 ‘청춘의 덫’으로 잠시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변심한 애인을 향해 이글이글한 눈빛을 보내며 내뱉은 한 마디, ‘당신, 부숴버릴 거야’가 당시의 유행어로 인구에 회자되기도.
(2001) 재능, 미모, 품위…동시에 업그레이드 전략
스크린과 브라운관, 광고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중, 갑자기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미술 공부를 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후 몇 달간 벤처 사업가 정호용 씨와의 결혼설로 화제를 모았지만 곧 결별로 이어졌다.
(2003) 중국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중 귀국. 동양화 전시에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가 열리는 인사동의 화랑에 얼굴을 잠시 내비친 ‘사건’으로 온 매스컴이 들끓었다.
(2004) 강남의 가라오케에 등장해 춤을 추는 등, 주위의 시선을 극도로 기피하던 그녀가 슬슬 모습을 노출시키면서 그간 잠잠했던 심은하 컴백설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 중.
줄기찬 이미지 관리로 CF계 최고 몸값에 이르다 이영애
Start 홍콩 영화 붐이 한창이던 1990년대 초, 선배 언니의 권유로 광고 에이전시에 들러 사진을 찍어둔 것이 계기가 되어 장국영이 출연한 투유 초콜릭 광고에 출연하며 처음 화면을 탔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Turning Point 1991년 가을 제작된 마몽드 화장품 광고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산소 같은 여자’는 이영애의 닉네임이 되었다. 도회적이고 당당한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TV 데뷔작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에서 ‘도도희’라는 이름의 당돌한 캐릭터로 눈길을 끌었지만 ‘불꽃’ 이전까지 드라마로는 별반 재미를 못 봤다.
Peak Point 1 스크린 진출작 ‘인샬라’가 실패하면서 한동안 TV와 CF에만 전념하던 그녀를 스크린의 여왕으로 만든 작품은 2000년 최고의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봄날은 간다’ 등으로 이어진 흥행 성공과 함께, 그녀는 은막의 스타로 자리잡았다.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로 CF 퀸이 된 것도 이 무렵부터. ‘이영애의 하루’라는 우스갯소리를 유행시킨 LG카드 광고를 시작으로, 이동통신과 가전제품, 그리고 고급 맨션형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스타만 따낼 수 있는 광고를 모두 휩쓸었다. 거기에 드라마 ‘대장금’의 엄청난 인기까지 더해져, 그러잖아도 최고치를 기록하던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중.
성공 요소
CF 최고 몸값에 이를 때 까지 줄기차게 밀어붙인 고급 커리어 우먼 이미지, 정부의 비호가 따랐다는 소문이 돌 만큼 뛰어난 스캔들 관리능력.
바른생활 이미지로 재벌가에 입성하다 고현정
Start 1989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데뷔한 덕분에, 무명 시절의 서러움은 겪지 않았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라는 쇼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며 방송을 시작했고, 곧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라는 전원 드라마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연기자의 길에 접어든다.
Turning Point 단아한 이미지와 바른생활 아가씨 이미지,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엄마의 바다’등 여러 편의 드라마에서 인기를 모으던 고현정이 연예계 최고의 위치에 오른 계기는 1994년에 방영된 화제의 드라마 ‘모래시계’. 폭발적인 연기력으로 칭송을 받았지만, 드라마의 종영과 동시에 삼성가의 며느리로 입성, 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 연예계 생활을 마감했다.
Peak Point 친지 방문 겸 휴가차 떠난 뉴욕에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을 보러 갔다가 당시 유학생이던 전남편, 정용진 씨를 만났다. 그는 좌석을 찾지 못해 당황해하고 있던 고현정을 도와 안내를 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연애를 시작, 결혼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가 재벌가의 며느리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결혼 당시 큰 반대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Crisis 결혼 생활 8년 내내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미술 관련 강좌를 듣고 어학연수까지 받는 등 갖은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 한 재벌 며느리는 ‘연예인 출신이 우리 그룹에 참가하는 것은 모욕적이다’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고. 결국 자동차 분실 사건을 계기로 이혼했지만, 팬들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는 반응. 컴백설이 강력하게 대두되는 톱 스타 중 한 명..
성공 요소
언제나 반듯하고 밝은 양갓집 규수 이미지
아쉬운 점
신데렐라가 되었다고 행복까지 보장받진 못한다. 차라리 연예계 생활을 계속했다면 위자료의 수십 배가 되는 돈과 인기가 따랐을 것을.
일급 몸매가 재산이다
이혜영
초라했던 과거 얼굴도 등장하지 않는 부분 모델로 일한 적이 있다. 물론 다리 모델로.
터닝 포인트 1994년 3인조 댄스 그룹 1730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고, 이후 인기그룹 잼 출신의 윤현숙과 함께 ‘코코’를 결성해 인지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성공 포인트 탁월한 각선미와 과감성. 국내 스타로는 이례적으로 1백만 달러짜리 다리 보험에 가입해 화제를 모았다. 이후 계획적인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몸매를 다듬은 후 누드 화보를 촬영, 본격적인 누드 스타의 궤도에 진입. 타고난 패션 감각과 유명세를 십분 활용, 현재 패션몰 ‘스타일닷컴’을 운영 중이다.
제니퍼 로페즈
초라했던 과거 푸에르토리코 이민 2세로 전형적인 뉴욕의 빈민층 출신. 맨해튼의 뮤지컬 댄서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터닝 포인트 비극적인 삶을 마친 라틴계 최고의 디바, 셀레나의 생을 다룬 영화 ‘셀레나’의 주연을 맡아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여배우로 떠올랐다. 이후 ‘아나콘다’를 비롯해 블록버스터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
성공 포인트 육감적인 엉덩이와 몸매, 그리고 시기적절한 가수 데뷔. 라틴 팝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1999년 무렵 가수로 데뷔해 섹시한 라틴 디바로 떠올랐다. 데뷔 앨범 ‘On The 6’가 전세계적으로 8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스타의 궤도에 진입했다. 패션 브랜드 ‘J.Lo’를 론칭, 비즈니즈 능력을 과시하기도.
옷만 잘 입어도 일류가 된다
김민희
초라했던 과거 무명의 설움은 별로 없다. 동대문 부근에서 옷을 사고 있던 그녀를 본 사진가에 의해 캐스팅되었다는 소문.
터닝 포인트 10대를 타깃으로 하는 패션지의 전속 모델로 데뷔, 순조롭게 연기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어눌한 말투와 부족한 연기력 탓에 그다지 빛은 보지 못한 것이 사실.
성공포인트 연예계에서도 정평난 패션 감각. CF 이외의 분야에선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한 데다 그나마 요즘엔 대학 생활에 푹 빠져 활동이 뜸한 상태지만 여전히 최고 스타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이유는 10~20대 여성의 패션 아이콘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
사라 제시카 파커
초라했던 과거 11세부터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 서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 1979년 ‘리치 킷즈’라는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지만 개봉된 영화 속에선 그녀가 나온 장면이 몽땅 삭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주로 소품과 인디 영화에 출연했지만 스타라는 수식을 붙이기엔 다소 거리가 먼 배우인 것이 사실.
터닝 포인트 HBO가 제작한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연, 캐리 브로드쇼를 연기하면서부터. 3년 연속 최우수 시리즈상과 여우주연상을 휩쓴 이 성공적인 드라마 한 편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성공 포인트 두말할 것 없이 패셔니스타로서의 이미지.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 발군의 패션 감각을 통해 세련된 뉴요커의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녀가 드라마에서 줄곧 걸치고 나온 이니셜 목걸이는 최고의 트렌디 아이템이 되기도.
노력 끝에 비범해진 평범녀
전도연
초라했던 과거 주로 하이틴 대상 잡지에서 패션과 뷰티 화보의 모델로 활동. 간혹 남성지에 수영복 차림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는 소문.
터닝 포인트 영화 데뷔작 ‘접속’으로 ‘연기 잘하는 여배우’로 각인되며 고소영, 심은하와 더불어 충무로 트로이카로 떠올랐다. 1999년에는 과감한 노출신을 불사한 ‘해피 엔드’로, 용기까지 겸비한 노력하는 연기자라는 평가를 받아냈다.
성공 포인트 평범하고 소박해서 오히려 연기 폭이 다양한 얼굴, 연기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용기.
르네 젤위거
초라했던 과거 오빠와 함께 드라마 클럽에 가입하며 연기를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인디 영화 외에는 출연 기회를 얻지 못했다.
터닝 포인트 1996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인 ‘제리 맥과이어’에 출연하면서부터. 톰 크루즈라는 슈퍼 스타의 상대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행운.
성공포인트 연기를 위해선 못할 것이 없다는 열정.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선 하루에 열 개씩 도너츠를 먹어대며 몸무게를 엄청나게 불렸고, 영국의 출판사에 위장 취업해 영국식 악센트와 출판 업무를 익혔다. 그 직후엔 ‘시카고’의 출연을 위해 죽음의 다이어트를 감행하고 춤과 노래를 맹훈련하면서 또다시 의지를 불태웠다. 피나는 노력으로 할리우드의 꽃이 된 평범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