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조조 업성박물관 공사현장.
갈석산(碣石山) 정상 길목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조조의 시 '관창해'
갈석산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갈석(碣石)'이라는 두 글자.
관창해(觀滄海)’
東臨碣石 以觀滄海(동림갈석 이관창해) / 동쪽 갈석산에 올라 푸른 바다 바라보니
水何澹澹 山島竦峙(수하담담 산도송치) / 강물은 출렁이고 산과 섬이 우뚝 솟아있네.
樹木叢生 百草豐茂(수목총생 백초풍무) / 수목이 울창하고 온갖 풀들은 무성하고
秋風蕭瑟 洪波涌起(추풍소슬 홍파용기) / 가을바람 소슬한데 큰 물결이 솟구치네.
日月之行 若出其中(일월지행 약출기중) / 갈마드는 해와 달이 그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 若出其裡(성한찬란 약출기리) / 반짝이는 별과 은하 그 속에서 나오는 듯
幸甚至哉 歌以詠志(행심지재 가이영지) / 아, 즐거움이 끝이 없도다! 이 마음을 노래하노라.
갈석산(碣石山)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숨이 턱까지 차오릅니다.
선선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니 가쁜 호흡도 가라앉는 듯 합니다.
날씨도 맑고 화창하건만 사방을 둘러봐도 조조가 보았다던 창해(滄海)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조조가 남긴 시를 돌에 음각해 놓은 ‘관창해(觀滄海)’ 시 한 수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중국 베이징에서 세 시간가량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250㎞쯤 달리면 허베이성의
친황다오(秦皇島)가 나옵니다.
보하이만에 닿아있는 허베이성의 항구도시 친황다오입니다.
고대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찾으러 사람을 파견한 곳이라 하여 친황다오라 이름 지어졌습니다.
친황다오의 번화한 시내를 뒤로 하고 북서쪽으로 30㎞ 떨어진 창리현(昌黎縣)으로 향합니다.
넓게 펼쳐진 평야 위를 한참을 달리면, 저 멀리 들판 위에 바위로 둘러싸인 채
우뚝 솟아 있는 갈석산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안내원은 “이곳 주변 화북평야에는 갈석산처럼 높은 산은 찾아볼 수 없다”라며
“예로부터 갈석산은 저 멀리 보하이만 지나가는
배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해 왔다”라고 설명합니다.
갈석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선대정(仙臺頂)은 해발 695m로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곳곳에 노출된 암벽이 말해주듯 온통 바위투성이고 꽤나 가파른 암벽산입니다.
높이만 들었을 때는 동네 뒷산 정도 야산(野山)이지만,
직접 보니 등산객 사이에 악산(惡山)이라 불리는 이유 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천하무적 조조라지만 이렇게 깎아지른 가파른 암벽산을 약 1800년 전
그 수많은 마차와 군사를 이끌고 어찌 올랐을까?
갈석산 관리국 왕 국장은 “갈석산은 앞쪽은 가파르고 뒤쪽은 완만하다”며
“아마도 조조는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산에 올랐을
것으로 후대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갈석산 뒤편에는 십리포(十里鋪),오리영(五里營) 등 과거 조조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이 여러군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드디어 갈석산 등반길에 오릅니다.
실제로 조조가 올랐다는 산 뒤쪽보다는 가파른 앞쪽 길을 택해봅니다.
등산로 입구에 도달하자 ‘신이 내린 갈석산은 바다를 바라보는 명승지.
아홉 명의 임금은 이곳에 올라 천고의 수수께끼를 어찌
풀었을까(神岳碣石, 觀海勝地, 九帝登臨, 千古之謎何解)’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도대체 역대 제왕들은 왜 이곳에 힘들게 올랐을까?’라는 수수께끼 풀어보겠단
‘비장한’ 각오로 갈석산 정상 향해 힘찬 발걸음을
재촉해 봅니다.
산기슭에 다다르자 계단 너머로 어디에선가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경전 읽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목탁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기니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암사(水巖寺)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절’이라는 이름의 수암사는 뒤로는 장대한 갈석산을
병풍 삼고 앞으로는 갈양호(碣陽湖), 더 나아가 저
멀리 베이다이허(北戴河)와 보하이만까지 펼쳐져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
최적의 입지를 자랑합니다.
수암사는 중국 불교문화 전파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당나라 때 건설한 이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왔으나 지난 1976년
탕산(唐山) 대지진 당시 훼손돼 90년대 다시 재건됐습니다.
이곳에는 지난 1954년 여름 친황다오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이
베이다이허를 바라보고 조조의 ‘관창해’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낭도사(浪淘沙)’를 새겨 놓은 바위도 있습니다.
시구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往事月千年(왕사월천년) / 천 여년 전
魏武揮鞭(위무휘변) / 위 무제 조조가 말을 타고
東臨碣石有遺篇(동림갈석유유편) / 동쪽의 갈석산에 올라 시 한 수를 읆었네.
蕭瑟秋風今又是(소슬추풍금우시) / 당시 스산한 가을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으나
換了人間(환료인간) / 세상은 상전벽해로 변했네.
당시 마오쩌둥은 “조조는 대단한 정치가, 군사가이자 대단한 시인이기도 하다”라고
격찬했다고 전해집니다.
50여년전 마오쩌둥은 조조를 역대 제왕과 견주어 손색 없다고 극찬하며 조조를
역대 제왕중 가장 높은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중국 내 조조에 대한 재평가는 어찌 보면 마오쩌둥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암사를 나오자 본격적으로 가파른 돌계단이 눈앞에 이어집니다.
등산길 주변 곳곳에 기송괴암(奇松怪巖)이 눈에 띄니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집니다.
특히 산이 온통 절벽과 바위로 이뤄져 있으니 바위 틈바구니에 자라나는 소나무들이 많습니다.
누워 있거나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옆으로 휘어지거나 자라는 모습도 형형색색입니다.
입구서 반갑게 맞이한 ‘영객송(迎客松)’부터 당태종이 이곳에서 시를 쓰고
버린 붓에서 줄기가 나와 자랐다는 ‘척필송(擲筆松)’,
한 소나무서 두 개 가지가 나란히 자라 연인의 사랑을 기원한다는
‘정려송(情侣松)’까지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스토리를 들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바위 곳곳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문구도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신선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는 ‘선인지천(仙人指天)’, 하늘에서 날아온 돌이라는
‘비래석(飛來石)’, 바다 바라보는 거북이라는
해조귀금(海眺龜金), 바위 오르니 옷깃 천리 휘날린다 ‘진의천인(振衣千仞)’ 바위에
기대어 휘파람 분다 ‘빙관일소(凭觀一嘯)’등
참으로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산 중턱쯤 오르면 붉은 색으로 ‘갈석(碣石)’이란 두 글자가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가로 세로 크기가 각각 1m는 될 만한 거대한 글씨입니다.
올랐다 쉬었다 하길 여러 번 하며 두 시간쯤 지났는데....‘관창해’를 음각해 놓은
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갈석관해’에 이릅니다.
갈석관해에 올라 올라온 방향 돌아보니 저 멀리 왼쪽 편에 북쪽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연산산맥(燕山山脈) 자락이 끝나고
있고, 눈앞으로는 갈석산 능선이 감싸 안은 계곡과 갈양호(碣陽湖)가 보입니다.
그 건너편에 창리현 읍내가 펼쳐져 있습니다.
안내원은 “조조가 보았다던 창해는 갈석산에서 15㎞ 떨어져 있는데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좋은 날씨에도 창해를 볼 수 없지만 1,800여 년 전 이곳에 올랐던
조조는 분명 역대 제왕의 기운을 받은 듯
가슴 벅차 오르는 마음으로 관창해를 읊었을 것입니다.
당시 조조만큼 가슴 벅찬 감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바위에 붉은 글씨 새겨진
‘관창해’라는 시를 바라보며 그 아쉬움을 달랩니다.
쉰여섯 글자로 이뤄진 시 한 수가 과거 조조의 숨결 조금이나마 느끼려고
이 산에 오르는 방문객을 환영하며 조조의 섬세하면서
여린 감성을 전해주는 듯합니다.
앞서 중국의 진시황과 한 무제가 발자취를 남기고 간 이곳 갈석산입니다.
두 황제는 조조가 갈석산에 오르기 한참 전에 이곳에 올랐다고 전해집니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곳에 올라 동쪽 바다를 바라보며 불로장생을 꿈꿨습니다.
한 무제 역시 이곳에 올라 영생을 기도했습니다.
누구보다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조조도 갈석산에 올라 개선가를 한 수 읊음으로써
자신이 중국 역대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올랐음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중원과 허베이 통일하며 천하를 손에 거머쥔 조조가 역대 두 제왕이 오른 갈석산에
등정해 그들과 같이 천하를 내려다 본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행보입니다.
그리하여 조조는 무리해서라도 갈석산에 올라 두 제왕의 기상을 이어받고
그 명분을 채워야 했습니다.
다만 그들보다 현실적이었던 조조는 허황되게 영생을 빌지않고 승전의 기쁨을
갈석산에서 기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대 제왕들이 잇따라 갈석산에 오르니 당시 이곳이 황제들 사이에서
‘신악갈산(神岳碣山)’으로 불리며 유명세 탔던 것입니다.
조조 이후에도 수 양제와 당 태종 등 6명의 제왕이 이어 갈석산에 올라 제왕의 기운을
얻고자 했습니다.
평야 지대에 유독 돌로 만들어진 산 하나가 우뚝하니 솟아 있고, 그 위에 오르면 보하이만
굽어 볼 수 있으니 제왕으로 위압감과 신비감을 더했으리라 후대 사람들은 가히 짐작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갈석산이 옛 고구려와도 꽤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이 고구려의 편이었을까?
고구려 정벌하러 가던 길에 이곳 갈석산에 올라 역대 제왕에게 승리 빌었던 수 양제와
당 태종은 모두 고구려에 처절하게 대패했습니다.
반면 위나라 사마의는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러 가던 중 갈석산에 올랐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바로 고구려의 기마병과 펼친 연합 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집니다.
갈석산이 중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혼과도 맞닿은 곳이라 생각하니,
턱까지 차오른 숨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허베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중국, 특히 허베이에 불고 있는 삼국지 열풍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원결의에서 이름을 따온 ‘결의로’, ‘도원반점’, 장비의 이름을 딴 술 ‘장비연’,
조자룡의 이름을 딴 ‘조운교’, ‘자룡광장’ 등 거리
곳곳에서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나 지명을 딴 가게 이름이나 도로,
상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800여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허베이에는 삼국지 관련 유적지은 마치 권력의 덧없음과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삼국지의 명성에 비해 대체적으로 허술하게 보존돼 있습니다.
이젠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아있는 유비나 조자룡의 생가, 장비의 사당에 세워진 두 동강 난
옛 비석들, 화려했던 옛 제왕의 성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진 채 옥수수만 무성하게 자라나
쓸쓸함이 느껴지는 조조 업성 유적지, 초라하게 무덤만 남아있는 원소의
옛 무덤 등.....
삼국지에 나오는 그 이야기 속의 현장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듯합니다.
다행히 이제라도 허베이에 삼국지 유적 살리기 열풍이 불면서 과거 흔적 복원해내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현재 유비 생가의 옛 자리에 다시 고택을 복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조조 천년 고도의 옛터만이 황량한 벌판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한단시 린장현 업성
유적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조 업성 박물관 오픈을 눈앞에 두고 있는 데 조만간 유적지와 박물관 등 연계해 삼국지
테마파크까지 건설 계획 중입니다.
실제로 린장현 여유국 관계자는 “허베이성 전체적으로 삼국지 유전발굴 및 보존에
힘쓰고 있다”라며 “향후 삼국지를 사랑하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허베이성 곳곳에 자리 잡은 삼국지 유적에 찾아오길 바란다”라는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1800년 전 삼국지 영웅호걸들이 용쟁호투를 벌였을 그 역사의 현장을 복원이 끝난 몇 년 뒤
다시 찾았을 때 지금과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맞볼 수 있게 되길 바래봅니다.